[더프리뷰=서울] 강민수 기자 = 국립무용단이 <넥스트 스텝Ⅲ: 안무가 프로젝트>를 4월 20일(목)부터 22일(토)까지 달오름극장 무대에 올린다. 전통에 기반한 차세대 창작자를 발굴 양성하는 ‘가치 만드는 국립극장’ 사업의 일환으로, 신진 안무가 발굴을 목표로 하는 무대다.
국립무용단은 한국무용의 특징을 이해하고 매력을 극대화할 안무가 발굴의 필요성을 절감, 2001년 <바리바리 촘촘 디딤새>를 시작으로 <동동 2030><엔톡 초이스><국립예술가 시리즈><홀춤> 등 안무 자원 육성을 위한 프로젝트를 꾸준히 시행해왔다. 국립무용단의 안무가 양성사업은 창‧제작 과정 전반을 체험하는 현장형 인큐베이팅 형태로, 단발성 지원에 그치는 여타 안무가 육성사업들과는 좀 다르다. 체계적인 자체 제작 시스템을 갖춘 ‘제작극장’이라는 국립극장의 특성을 살려, 안무가에게 실질적인 제작 노하우를 전달하는 한편 창작한국무용의 안무가 부족 현상 개선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취지다.
이번 <넥스트 스텝Ⅲ>는 이전 시리즈와 달리 단원뿐 아니라 외부 안무가에게까지 문호를 넓힌 점이 눈에 띈다. 국립무용단은 작년 9월 참여 안무가를 공개 모집, 서류 및 영상 심사부터 작품 계획 인터뷰까지 단계별 심사를 거쳐 최호종‧박소영‧정보경을 최종 선발했다. 이들은 7개월 동안 무대 미장센 부문에 여신동 디자이너, 의상 부문에 최인숙 디자이너, 연출 및 구성 부문에 김설진 안무가, 해외 무용계 경향 부문에 장광열 평론가 등 다양한 분야 멘토와 작품에 대한 다각적이고 종합적인 의견 교환 및 워크숍을 수행하며 각자의 작품을 완성하고 있다. 세 작품은 각 30분 이내 분량으로, 전체 공연은 개별 작품을 살리면서도 한 편의 옴니버스를 보듯 구성된다.
▲최호종 안무의 <야수들>은 ‘한국인의 가족주의’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가족을 연상시키는 네 무용수가 놀이를 주고받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변해가는 모습을 담아낸다. 현실의 고통을 헤쳐나가며 야수가 되어가는 한국인, 그리고 해체되는 가족을 초현실적으로 그린다.
▲박소영의 <라스트 댄스>는 안무가가 무대 위에서 경험한 공황장애의 순간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죽기 전 마지막 춤을 뜻하는 제목처럼 죽기 3초 전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삶의 순간들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막다른 곳에 이르러 마주하는 해방감과 죽음 앞에서 오히려 삶의 이유를 찾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보경 안무의 <메아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모든 것이 언젠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와 울림을 준다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정보경은 정중동의 미학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고 현대적인 무대 미술을 곁들인 한국적 컨템퍼러리를 선보인다. 텅 빈 무대를 오직 무용수와 조명으로만 채우고, <수제천>을 재해석한 음악에 맞춰 삶과 죽음, 가상과 현실의 공존을 실험한다.
<넥스트 스텝Ⅲ>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관객 평가와 전문가 심사를 통해 발전 가능성을 검증받는다. 이 중 선정된 우수작은 초단편 영화 형태의 댄스 콘셉트 필름으로 제작되며, 나아가 국립무용단의 정규 레퍼토리로 확장할 기회도 제공된다.
안무가와 관객이 함께하는 ‘안무가 데이트’
완성된 무대뿐 아니라 창작 과정도 중요시되는 프로젝트인만큼 국립무용단은 안무가가 직접 관객과 마주해 창작 과정을 소개하고 작품의 주제를 중심으로 소통하는 자리도 마련한다. 공연에 앞서 4월 8일(토) 오후 2시에 개최되는 관객 행사 ‘안무가 데이트’다. 안무가에게는 관객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작품을 되짚어보고 최종적으로 다듬는 계기가 될 것이며, 관객은 작품 모티프에 대해 안무가에게 직접 듣고 일부 동작을 배워보는 등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동시에 더욱 유연하고 확장적인 시작으로 공연을 관람 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이다.
국립무용단은 그간 연습 장면을 참관하는 ‘오픈 리허설’, 춤 동작을 배워보는 ‘오픈 클래스’ 등 관객 행사를 운영해 왔지만, 안무가의 창작 과정에 초점을 맞춘 관객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최호종 <야수들>
“막이 오르면 특별한 가족놀이가 시작된다”
안무 최호종
음악감독 하이찬
출연 정세영 황용천 이요음 최호종
한국인의 가족주의를 다룬 작품 <야수들>은 2017년 입단, 독보적인 실력으로 국립무용단의 대표 무용수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최호종이 안무한다. 유튜브 등 온라인 플랫폼에서 다수의 댄스 필름으로 안무 경력을 쌓은 그는 <도메스틱 와일드(Domestic Wild)>로 2022 서울무용영화제에서 ‘관객이 뽑은 베스트 작품상’을 수상하며 연출가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야수들>은 안무가가 길에서 무례한 사람을 만나 불쾌한 일을 겪은 기억에서 시작됐다. “저 사람에게도 가족이 있겠지?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가족이라면 어떨까”라는 물음은 가족과 공동체의 역사로 생각이 이어졌고 “뺏기고 탄압받고 보호받지 못했던 역사 속에서 자신을, 나아가 가족을 지키려다 보니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짙어지고, 타인을 짓밟고서라도 내 것을 지키게 된 것일지 모른다”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작품은 ‘한국인의 가족주의’ 안에 숨어있는 야수의 모습을 담고 있다.
투명한 컨테이너 형태의 무대는 검은 색과 흰 색만을 사용해 흑백영화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복도와 방의 한 부분을 옮겨놓은 듯한 무대에 가족을 상징하는 네 무용수가 등장한다. 그들은 놀이를 주고받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거칠어지거나, 피폐해지는 강렬한 변화를 보여준다. 무용수는 각자가 입은 의상을 가위로 찢어가며 삶의 야수적인 면을 표현한다. 가족과 뭉쳐 현실의 고통을 헤쳐나가며, 야수로 변해가는 한국인, 그리고 해체되는 가족이 초현실적으로 그려진다.
최호종은 “가장 한국적인 게 무엇일까 고민하며 작품을 만들고 있다”라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가족에 대한 보편적 정서와 뿌리 깊은 문화적 특징 등 ‘한국인 특유의 가족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아울러 “연극인지 무용인지 장르가 불명확한 작품이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박소영 <라스트 댄스>
“벗어날 마지막 기회”
안무 박소영
음악감독 서희숙
출연 노문선 이윤정 정현숙 김회정 박미영 이민영
2016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한 박소영은 <회오리><더 룸><가무악칠채> 등에서 주·조역을 맡으며 뛰어난 기량으로 국내외 안무가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무용수다. 2020년 <변신>으로 서울무용영화제에서 관객이 뽑은 베스트상을, 2022년 <새끼>로 젊은 안무자 창작공연에서 우수 안무자상을 수상하며 안무력을 인정받았다. 박소영의 <라스트 댄스>는 안무자가 무대 위에서 경험한 공황장애의 순간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죽기 전 마지막 춤을 뜻하는 제목처럼 죽기 3초 전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삶의 순간들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막다른 곳에 이르러 마주하는 해방감과 죽음 앞에서 오히려 삶의 이유를 찾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섰던 찰나를 수미상관 구조로 표현하며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열린 결말을 선보인다.
그는 무용수로서 연습에 참가하던 중 똑같은 동작을 취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속 각자의 ‘삶의 흔적’을 발견했던 경험에서 작품에 착안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저마다 마주했던 위기와 극복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상상을 펼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상상과 공황장애로 인해 무대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던 순간, 이를 이겨낸 기억을 바탕으로 일상의 위기를 극복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춤으로 풀어낸다.
박소영은 “무용수로서 가장 힘들 때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데도 어떻게든 무대 위에서 움직여야 할 때였다.”라며 자신이 겪은 고충을 교훈 삼아 작품에 들어가기 전 무용수들과 마음을 나누는 리서치 시간을 가졌다. 무용수들과 서로 각자의 경험을 나누며 고민을 공감하는 시간이 안무가가 겪은 트라우마를 들여다보고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으로 이어졌고 이는 작품에 중요한 요소로 투영됐다.
<라스트 댄스>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소품은 ‘문’이다. 죽기 전 마지막 추는 춤을 뜻하는 제목처럼 고통을 극복하고 해방을 위해 여는 ‘행복의 문’이 되길 바라는 안무가의 의도가 담겨있다.
정보경 <메아리>
“경계를 넘는 뜻밖의 여정”
안무 정보경
음악감독 조봉국
출연 김미애 정소연 김은이 엄은진 박지은 송지영 박혜지 황태인 조승열 이태웅 이도윤
정보경은 2023년 제1회 서울예술상에서 <안녕, 나의 그르메>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 무용계가 주목하는 중견 안무가다. 2007년 <절벽 아래 집>으로 데뷔한 이후, 2010년 스페인 빌바오 액트 페스티벌에서 <온 더 로드>로 동양인 최초로 공연예술 경쟁부문 최우수상을 받으며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또한 2019년 안무한 <원>은 한국무용제전 최우수작품상과 대한민국무용대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경기도립무용단의 <경합> 협력안무를 맡으며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메아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모든 것이 언젠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와 울림을 준다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어디론가 떠났다가 돌아오는 ‘철새’를 무용수에 투영해 삶과 죽음, 가상과 현실 등 대비적 요소의 공존을 표현한다. 한국 미학의 핵심 가치인 정중동(靜中動)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고 현대적인 무대미술을 곁들여 한국적 컨템퍼러리를 선보인다. 소품 하나 없이 텅 빈 무대는 오직 무용수와 조명이 채운다. 영원한 생명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궁중음악 <수제천>을 재해석해 사용하는 것도 삶과 죽음의 공존이라는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서다. <수제천>은 장단의 길이가 다르고 불규칙해 춤추기 쉽지 않은 음악이기에 각 무용수의 호흡과 에너지에 따라 춤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무용수들은 저마다의 호흡으로 장단을 정하며 메아리가 울리는 텅 빈 세계를 극적으로 표현한다. 한국춤의 끝없는 실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정보경은 “첫 연습 때 무용수들에게 큰 그림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무대에 올려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밀도 높은 장면이 완성됐다. 최고 기량의 국립무용단과 작품을 만들 수 있어 영광이다”라며 작품에 매진하고 있다. “무용수 각자가 가진 호흡이나 뉘앙스 자체의 독특한 힘이 자아내는 ‘규칙 속의 불규칙’을 극대화할 것”이라는 포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