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이민희 음악평론가 = <이프덴>은 2022년 12월 8일부터 2023년 2월 26일까지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쇼노트 제작, 성종완 연출로 관객을 만난 라이선스 뮤지컬이다. 2013년 워싱턴 D.C에서 트라이얼 버전을 올린 후 2014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넥스트 투 노멀>의 브라이언 요키와 톰 킷이 극본과 음악을 담당했다. 여성 배우 원톱 극으로, ‘여성 주인공’에 목말라있던 수많은 국내 관객에게 여성서사의 정점으로 평가되며 호평을 받았다. 정선아·박혜나·유리아가 주인공 엘리자베스 역에 캐스팅되어 큰 사랑을 받았으며, 남자 주인공인 루카스 및 조쉬 역엔 각각 에녹·송원근·조형균과 신성민·윤소호가, 여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인 케이트 역엔 최현선과 이아름솔이 캐스팅됐다.
<이프덴>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인물로, ‘그’인 조쉬를 따라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인생의 궤적이 달라진다. 극은 엘리자베스가 각기 다른 선택을 한 후 펼쳐지는 두 가지 삶을 평행세계처럼 다룬다. '이프 덴'이라는 제목은 ‘내가 만약 그 남자를 따라갔더라면’ 혹은 ‘따라가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주인공의 가정을 의미한다. 그렇게 극의 한 축은 남자주인공 조쉬를 따라가기로 결정한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다. ‘리즈’로 불리는 엘리자베스는 아이를 낳고 워킹맘으로 일하며 결혼 전 꿈꾸던 삶과는 조금은 달라진 모습으로 살아간다. 한편 조쉬를 따라가지 않고 대학원생 친구와 함께 시위에 나간 엘리자베스는 ‘베스’로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도시의 건축을 총괄하는 인물이 되어 커리어 우먼의 정점에 서는 것이다.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이지만, 이 삶 또한 불안정하며 외롭다.
여성서사, 혹은 대안적 서사의 최전선
뮤지컬 <이프덴>은 최근 한국 뮤지컬계의 가장 큰 화두인 ‘여성서사’를 입체적으로 반영한다. 여성서사란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첫째, ‘여성이 주인공인 극’이라는 가장 단순한 정의에 부합하며, 둘째, 남자가 주인공인 극에 비해 특색 있는 소재나 서사적 전개가 나타나는 지점이 존재한다. 두 번째 범주에서 볼 때 여성서사란 단지 주인공만 여자로 바뀐 것이 아닌, 여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다룰 수 있는 다채로운 소재나 플롯 전반을 다루는 극을 의미한다. <이프덴>의 경우 여성 주인공이 대단한 사건이나 판타지를 겪지는 않지만 ‘여성으로서의 삶’과 ‘여성의 선택’을 풀어낸다는 점에서 두 번째 정의를 충족한다.
한발 더 나아가 여성서사를 일종의 ‘대안적 서사’로 이해할 수도 있다. 즉 극의 주인공이 남자냐 여자냐의 문제를 떠나서 극 전체의 서사구조를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제시할 때, 이를 세 번째 범주의 여성서사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프덴>은 흥미롭게도 이런 세 번째 범주의 여성서사이기도 한데, 첫 장면으로 회귀하는 원형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서로 다른 두 개의 삶을 각각의 플롯으로 복합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이 작품이 중.대극장을 위한 상업 뮤지컬이며, 최대한 많은 관객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런 구성이 생각만큼 복잡하게 제시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이프덴>은 두 개의 삶을 그리지만 각각의 삶에서 비롯된 ‘고통’이 유사한 시간적 지점에 배치되어 있기에 전반적으로는 하나의 호흡으로 감상이 가능하다. 사건이나 설정이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전개되는 점 역시 플롯의 복잡성을 보완한다. 대신 <이프덴> 서사의 진짜 대안적이고도 독특한 부분은 수많은 조연들의 말과 행동에서 비롯되는 서브플롯에 있다.
다양한 정체성의 조연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인 엘리자베스와 상대역인 조쉬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친구 케이트는 레즈비언이면서 아이들에게 여성 히어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유치원 선생님이다. 대학원생 루카스는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는 비건주의 사회운동가이면서 양성애자이다. 스티븐은 아이를 두고 이혼한 뉴욕의 도시계획부 국장이며, 엘레나는 젊고 유능한 여성 직장인이다. 극 안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남녀커플, 남남커플, 여여커플이 모두 등장하며 동성결혼과 대리모 출산은 물론 해외파병, 도심 재개발, 도시의 주거권 쟁취, 기후위기 등을 논한다.
‘아이 낳기’의 방식과 태도가 가부장제와 연관되어 혹은 이와 대립한 채 나타나는 점도 흥미롭다. 엘리자베스는 전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러 시골에 내려갔다가 이혼한 여자이며, 새로운 남편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키우며 워킹맘으로 고군분투한다. 엘리자베스의 새 남편은 부성애의 상징처럼 묘사되며 가정을 위해 파병을 불사한다. 한편 유능한 직장인으로 등장하는 엘레나는 아이를 키우며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하고, 남남커플인 데이빗과 루카스는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애초에 한 남자를 선택하느냐 마느냐의 결정이 몇몇 넘버와 함께 굵직하게 제시되는 것과 달리, 조연들의 성정체성이나 출산·양육에 관한 고민들, 그리고 공정무역, 재개발, 비건 등의 테마는 ‘나열’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가볍게 그려진다. 이러한 처리는 핫한 토픽들을 그저 흔한 클리셰로 전락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하지만 ‘대리모를 이용해 아이를 갖고자 하는 남남커플’ 등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뤘을 때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거센 논란에 비하면 이편이 훨씬 안전해 보인다. 그렇게 양육의 고됨은 게이친구들이 놀러와 유모차를 밀어주는 장면으로, 시민단체 활동가의 정치적 태도는 대학원생 특유의 너드(Nerd)적 성격과 결합해 웃기는 장면으로 대체된다. 관객은 다양한 인물의 정체성이나 고민을 아주 얕게 대면하되, 그것에 호불호를 갖기보다는 “아 맞다, 이런 것도 있었지!”라는 느낌으로 가볍게 스친다.
극 중 다양한 인물과 테마가 ‘집’이라는 소재로 묶여있는 점도 눈에 띈다. 주인공은 ‘도시계획’이 전공인 인물로 평행세계에서는 뉴욕의 도시계획부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녀에게는 낡은 집에 살며 도시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시위를 하는 친구가 있다. 예컨대 극 중 모든 이들이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한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이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의 삶을 은연중에 긍정적으로 다루는 면이 발견된다. 결혼한 리즈는 도시계획을 전공했지만 막상 그녀가 살 집은 남편인 조쉬가 계획한다. 반면 결혼을 하지 않은 베스는 뉴욕 전체의 주거환경을 총괄하는 커리어 우먼이 된다. 전자는 자신의 집조차 남의 계획에 맡기지만, 후자는 시 전체의 주거환경을 주도하는 우월한 위치에 서 있다.
음악을 통해 완성되는 여성 원톱 뮤지컬
혹자는 이 시점에서 이 작품이 정말로 ‘여성 원톱 극’인지, 그녀의 여성적 경험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지 의심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서브플롯이 워낙 다양하기에, 텍스트로만 이 극을 대한다면 여성의 출산과 양육 경험이 남남커플의 대리모 출산과 동일선상에 놓이는 지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극은 어떤 측면에서는 여성이라는 새로운 중심을 설정했다기보다는 중심을 수없이 쪼개고 분화시킨 형태에 가깝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대안적 서사의 전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음악이 결합된 ‘실제 무대’를 보면, 여성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이 모든 것의 중심에 확고하게 서 있음을 알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극의 80%가 넘는 장면에 등장하며 1막과 2막의 끝에 배치된 클라이맥스 넘버를 비롯한 주요 음악을 장악한다. 특히 마지막 넘버인 <결국 다시 시작>은 극 전체를 대표하는 곡으로 난도와 그 효과가 상당하다. 다양한 등장인물마다 넘버가 부여되지만, 함께 부르는 <만약에> 등에서도 엘리자베스의 역할이 중요하며, 남자 주인공과 함께 부르는 <또 다른 나>에서도 엘리자베스가 부각된다. 촘촘하게 배치된 복잡한 텍스트 사이를 엘리자베스가 누비며 자신의 서사를 음악으로 강조하고 전체 넘버의 밸런스를 잡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가창력뿐 아니라 엘리자베스 배역의 아우라가 공연의 승패를 좌우한다. 강렬한 넘버 소화력을 바탕으로 <결국 다시 시작>을 부르며 무대를 휘어잡을 때, 그리고 몇몇 장면에서 주인공으로서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이 극을 ‘나의 선택’이라는 긴 호흡으로 이끌 때, 이 극은 ‘여성 원톱 극’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여성의 이야기와 함께 다양한 인간군상이 극 안에 배열되고, 핫한 토픽들이 고르게 조율된다. 따라서 뮤지컬 <이프덴>은 실력 있는 강력한 디바, 더 돋보이는 여성 배역을 원했던 21세기 한국관객에게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다. 다만 엘리자베스 배역의 가창력이나 장악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작품 전체는 무게추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그 중심을 잃게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역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이 극은 유행하는 소재만을 가득 채운, 수많은 정체성과 슬로건만이 난무하는 시절 유행극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