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리뷰] 제26회 서울세계무용축제 – 첫 번째 이야기
[축제리뷰] 제26회 서울세계무용축제 – 첫 번째 이야기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3.10.08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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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의 특집 ‘죽음과 노화’

 

[더프리뷰=서울] 하영신 무용평론가 = 매해 서울 전역 크고 작은 극장에 갖가지 춤을 풀어 가을을 축하해온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예술감독 이종호, 이하 시댄스)가 스물여섯 번째 잔치를 성료했다. 91일부터 17일까지 총 9개국 23개 단체의 26편 작품이 열연한 올해의 축제는 더욱 유난히 그 가두리가 넓고 깊었다. 그 인상적인 장면들을 복기한다.

 

제26회 시댄스 포스터 (사진제공=시댄스)

시댄스가 조망한 올해의 특집 주제는 죽음과 노화. 지구촌 전역을 몸살케 하고 있는 정치·경제·사회적 긴장과 기후위기의 징후는 개인적 차원의 생존 가능성과 의미는 물론, 공동체의식과 문명의 방향성에 관한 물음을 요청한다. 시스템화된 일상에 제동을 걸고 의혹, 회의, 결단의 과정을 촉구하는 것은 예술과 사유의 몫. 시댄스는 언제나 묵직했고 이제는 긴박해진 이 질문을 2년에 걸쳐 탐구해보기로 작정, 다양한 세대의 작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노년의 무용가 홍신자와 남정호, 장년의 무용가 예효승, 젊은 안무가 양한비와 김혜연 등이 올해의 특집을 숙고했다.

1970년대 뉴욕 포스트모던댄스 씬에서 얻은 호응으로 우리 무용계에 전위의 서장을 연 홍신자는 <이불 위에서>라는 작품으로 자신의 죽음에 정면해보였다. 작품은 무대 정중앙에 펼쳐진 하얀 이부자리와 천장으로부터 드리워져 그 이부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가닥가닥 흰 천의 오브제 장면으로부터 개시된다. 협소해져버린 세계, 세계의 대부분이 어둠에 잠식되었을지언정 이부자리의 세계만큼은 오히려 환하고 여전히 그 삶에는 외연적 자장(아직 작동하는 현실세계의, 혹은 잠입해오는 사후세계의)이 개연하고 있다. 무릎을 접었다 폈다, 모로 누웠다, 간신히 일어나 앉아보지만 상체는 수그러진다. 스멀스멀, 아이고~아이고~ 곡소리가 깔리고 종소리가 울리고 장례미사곡풍 음악이 지나고 나면, 임종 시 스쳐 지난다는 파노라마처럼 삶의 과정적 단면들을 압축한 웃음소리가 무대를 채운다. 고통과 환희 사이, 낭창함과 비웃음과 공포 사이를 광포하게 질주하는, 일상적 표현한도를 초과한 기괴한 소리와 호흡과 침묵을 밭으며 홍신자는 천자락, 삶과 죽음을 그러쥐어 몸에 두르고 풀고, 뜯어내버린다.

홍신자 ‘이불 위에서’ © 박상윤
홍신자 ‘이불 위에서’ ©박상윤

세 단락으로 구성된 작품의 1장은 저승사자의 등장, 죽음으로 마무리되었다. 2장은 80세 되던 해에 그녀 스스로 치렀다는 장례식 퍼포먼스 영상물의 상연이었다. 수의 차림의 홍신자는 자신의 걸음으로 상여에 눕고 지인들은 그 상여를 바다에 띄워 보낸다. 파도소리에 신비로운 음악이 얽히면 홍신자는 양발 끝으로부터 움직여 일어나 앉아 팔꿈치에서 손끝에 이르는 몸의 일부 마디로 춤을 춘다. 3장은 다시 무대, 먼저 그 자리의 이부자리 장면이다. 엎드렸다가, 네발로 기다가, 마침내 두 발의 기립에 성공하고 어정어정한 걸음을 걷고, 다소 활발해진 두 팔의 움직임으로 자기몰입적인 움직임을 성취하는, 윤회와 성장을 고하는 3장으로 작품은 막을 내렸다.

​홍신자 ‘이불 위에서’ © 박상윤​
​홍신자 ‘이불 위에서’ ©박상윤​

요즈음 부쩍 필자는 죽음을 이해할 방도를 구하고 있다. 팔순을 넘긴 노부모는 와병중이고 항시 아슬아슬했던 나의 몸도 갱년기라는 생애주기를 맞은 데다, 자연재해와 기후위기를 인류사에 들이닥친 멸절의 징조로 읽어내고 있다. 아무도 온전히 증언할 수 없는 죽음과 사후에 관한 이해를 누군들 완성해낼 수 있을까마는, 어차피 장래할 죽음들에 관한 이해가 제법 다급해진 처지. 이 작품으로부터 어떤 단초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다. 홍신자, 그녀가 이끌어온 웃는돌무용단은 자연과 영성의 탐구로 설명되곤 하였으니까. 진척된 탐구는 아마도 피상적이거나 개별적인 죽음의 이미지보다는 죽음 본질에 대한 어떤 규명, 어떤 구체적인 이해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 답을 구하지 못하였다고 작품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죽음 자체에 대한 사유를 거들거나 존엄사 등의 논의를 연장하여 죽음과 연관한 사회의 비인간적 태도와 제도에 관한 담론을 숙고하거나, 갖가지 재해로 연발하고 있는 공공의 죽음 등에 관해 애도할 작품들을 보게 되기를, 그로부터 충분히 위무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남정호는 케이 타케이(Kei Takei), 미츠요 우에스기(Mitsuyo Uesugi), 류이치 후지무라(Ryuichi Fujimura) 등의 무용가들과 함께 서울남산국악당 무대에서 노화에 관한 삽화전 <노화하는 몸>을 펼쳤다. 첫 번째 연행은 류이치 후지무라의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How Did I Get Here?>. 시드니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립무용가 후지무라의 자전적 솔로 트릴로지 <Here Now>의 첫 번째 부분인 이 작품은 인생의 가을, 작품 내에서 그가 인용한 문구처럼 탄생보다는 죽음에 가까워지는 시기에 다다른 작가의 가벼운 탄식으로 시작한다. “지금 한 잔이 필요합니다.” 무대 상수 업스테이지에서 하수 다운스테이지로 조명이 낸 길을 따라 흰 셔츠, 검은 면바지, 맨발의 후지무라가 마티니를 홀짝이며 걸어 나온다.

류이치 후지무라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 박상윤
류이치 후지무라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박상윤

생을 반추하는 몇 구절의 아포리즘들, 그 자신의 흐릿한 옛 사진들을 흘려보내고는 이렇게 말한다. “해가 461만 번이나 졌습니다. 얼마나 더 일몰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코어로부터 펼치고 접고 펼치는 격정적이고 형() 없는 자기발화적인 움직임으로부터 완만해지는 움직임 그리고 조용하면서도 큰 포옹과 응시에까지, 시간의 흐름에 조응하는 춤이 지나가고 나면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버전으로 한결 따뜻해지고 후지무라에 긴밀해진 노래 <Both Side Now>가 흐르고 그 가사를 번안하는, 어수룩하지만 그러나 진솔한, 마치 아이의 그것과도 같은 춤이 연행된다. “구름을 양쪽에서 보아왔어그러나 여전히 구름에 대해선 잘은 몰라.” 반복되는 후렴구에 결합하여 삶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충분히 감지되는 충족적인 장면으로 작품은 마무리되었다.

이어진 케이 타케이의 <쌀을 씻는 여자 아이> 역시 작가이자 연행자인 타케이의 생이 농축된 작품이었다. 무대 정중앙에 조명으로 사각의 공간이 구획되어 있고 그 한가운데에 됫박처럼 보이는, 등받이 없는 작은 나무의자에 무용가가 앉아있는 장면으로부터 작품은 시작된다. 여윈 몸, 납작한 팔과 다리, 윤곽이 선명하고 음영이 짙은 얼굴. 춤으로 헌신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몹시도 강렬한, -몸이다. 이 춤-몸이 15분간 연행해낸 것은 춤에 결착되어 이제는 실용적이거나 실제적인 움직임마저 춤의 경지로 지각되는, -삶이었다. 1946년 도쿄생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작가에게 쌀을 씻는 일은 춤만큼이나 오래, 줄곧 해온 일이었으리라. 쌀 이는 행위가 춤이 되어 존재를 증명한다.

케이 타케이 ‘쌀을 씻는 여자 아이’ © 박상윤
케이 타케이 ‘쌀을 씻는 여자 아이’ ©박상윤

귀뚜라미 소리로 작품은 개시된다. 그러나 자연에서 채집된 청명한 소리가 아닌 약간의 쇳소리를 품은 전자음향. 이후 가세하는 새소리까지도 인공의 뉘앙스를 품었는데 요양병동이거나 제한된 신체의 정황으로 읽히는 단호하게 한정된 공간과 함께, 이 작품의 독특한, 일상과 죽음 사이의 오묘한 시공간을 창출한다. 벌리고 힘을 주어 앉은 두 다리로 몸을 일껏 지지하며 타케이는 쌀을, 세계를 인다. 끼그덕 마른 관절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 분절적이었던 동작은, 한 팔로는 반대편 다리를 짚어 중심을 지탱하고 다른 한 팔로 젓는, 그러다가 양팔로, 그러다가 거세어진 충동을 따라 엉거주춤에도 이른다. 잠시의 기립은 이내 주저앉아진다. 여전히 자유를 향하는 의식과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신체, 그 간극으로부터 발생하는 회한, 절망감과 피로감, 그리고 끝내 떨치지 못하는 의욕이 혼재한다.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타케이는 아슬아슬 의자에 올라섰다 아슬아슬 내려온다. 말리고도 싶고 부축하여 응원하고도 싶고 이미 충분하였노라 경외심을 전하고도 싶고, 보는 이의 심경 복잡해진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던 의자를 들어올려보이면 음악과 조명의 페이드아웃으로 작품은 끝이 난다. 나의 죽음도 당신들의 죽음도 저토록 충분한 일생의 자발적인 마무리가 될 수 있기를, 죽음을 축원해보게 되는 일상의 순간들마다 환기되는, 오래 사후(事後)작용을 해줄 짙은 작품을 또 한 편 품는다.

남정호의 <달에게 물어봐>는 노화에 직면한 몸에 관한 탐색과 수긍의 과정이었다. 민소매 블랙 미니드레스와 빨간 양말 차림, 단발머리 남정호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월광>을 춤췄다.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청각장애를 극복해낸 베토벤, 그 절망적인 처지를 받아들여야 할 시기에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월광>은 예전의 기량을 잃어가는 몸 그리하여 달라져야 할 춤을 고심하는 작품의 바탕적 서사가 되었다. 고요하면서도 처연한 1악장 아다지오의 주제부에 맞춰 남정호는 롱드장브(rond de jambe: 한 다리를 축으로 삼아 다른 한 다리로 반원을 그리는 동작) 등 무용의 관행적 움직임을 시연한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로 실행되고, 멈추어지고 조정된 속도로 다시 시작되기를 거듭하는 악절에 더불어 남정호의 시도도 반복된다. 불만족스러움에 머리를 감싸쥐던 무용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 안을 들여다보거나 원경의 어딘가를 응시하거나, 자신의 팔에 꼼꼼히 입을 맞추며 달라진 몸에의 긍정을 시도한다.

남정호 ‘달에게 물어봐’ © 박상윤
남정호 ‘달에게 물어봐’ ©박상윤

그 시도들은 과정 중으로 남겨진다. 관객에게 소리 내어 세어주기를 청하고 그 구령에 맞춰 남정호는 일흔 번의 회전을 감행한다. 스팟(spot: 연속하는 동작 시 어지러움을 방지하기 위해 정해둔 한 지점에 시선을 고정해두는 회전 테크닉)을 사용한 기술적인 회전은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점점 비틀리고 감속되며 그 기술성을 상실한다. 육십! 육십 일! 관객의 음성에 응원의 메시지가 실리고 그 에너지로 일흔 번째까지 회전에의 욕망은 무사히 달성된다. 음악은 3악장 프레스토의 격렬한 지대로 바뀌고 남정호는 기어이 질주에 다다르는 춤을 추고 자리에 눕는다. 다시 아다지오. 그러나 부지런히 테크닉을 구사하는 발, 멈추지 않는 춤에의 의지. 거세되지 않는 생의 충동. 노화는 누구에게나 극복과 수용, 저항과 긍정, 양단의 딜레마 사이를 갈등케 하는 끝끝내 어려울 과제가 아닐런가.

 

남정호 ‘달에게 물어봐’ © 박상윤
남정호 ‘달에게 물어봐’ ©박상윤

미츠요 우에스기의 <두루미의 보은>으로부터는 솔직히 노화 혹은 죽음에 관한 사유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노화한 몸, 축적된 세월만이 발현해낼 수 있는 내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노부부에게 보답하고자 깃털을 뽑아 베를 짰다는 일본 전래동화의 두루미/처자로 분한 우에스기. 팝가수 마돈나 무대의상풍의, 브래지어 형태를 그대로 포함한 하얀색 슬립 원피스, 검은 팔 토시, 그리고 큰 그물코의 흰색 망사 스타킹 차림의 우에스기는 무대 한가운데 조명 아래서 자신의 생명을 소진해가면서도 기어이 보은코자 했던 두루미의 적나라한 고통과 절망을 연기했다. 과장되게 부풀려지고 안간힘을 써보이는 얼굴의 근육들, 벌어지는 다리를 어렵사리 모으거나 무엇에 닿으려는지 있는 힘껏 뻗어내는 팔 등의, 느리고 한껏 팽창된 움직임은 오래고 깊숙한 수련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는 부토의 강렬한 표현지대에 있었다.

미츠요 우에스기 ‘두루미의 보은’ © 박상윤
미츠요 우에스기 ‘두루미의 보은’ ©박상윤

예효승의 <흔적들(feat. 의식의 흐름)>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펼쳐졌다. 무의식 지층에서 발굴되는 자발적 움직임의 직조가 특색인 벨기에의 쎄드라베(C de la B) 소속 무용수로 오래 활동해왔고 2013년에 설립한 단체 블루포엣무용단의 예술감독으로서의 안무작업 역시 몸성의 탐색과 강화에 그 방점을 두어온 예효승은 노화라는 키워드를 변화의 궤적’ ‘변천으로 읽어냈다. 작품은 적층된 블록들에 투사되는 작가 본인 춤의 과거 이미지들로부터 시작된다. 시각적으로 현현(顯現)되는 춤의 장면들이 분절되고 재배치되는 사이사이 그는 무용수에서 안무가로서 이행하면 할수록 더욱더 신체의 감각에 집중하게 되었다, 무용공연이라는 것은 순전히 몸으로써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앞으로도 몸에 집중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지향을 발화하였다.

예효승 ‘흔적들(feat. 의식의 흐름)’ © 박상윤
예효승 ‘흔적들(feat. 의식의 흐름)’ ©박상윤

옷을 새로 입고 신발을 갈아 신고 머리를 묶음으로써 현재의 타임존에 들어서면 그는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으로부터 새로운 춤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강렬한 비트의 타악 사운드에 더불어 잠재력을 현행화하기 시작하는 원천적 움직임은 루핑(looping)하는 사운드와 함께 점강(漸强)하여 트랜스, 무아지경의 사태에 진입한다. 한바탕의 충혈적 춤이 잦아들고 나면 그는 김정호의 <하얀 나비>를 허밍한다.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분명한 가사와 멜로디로 예효승은 노화, 변화하는 몸에 대한 일차적 탐구를 끝맺었다.

예효승 ‘흔적들(feat. 의식의 흐름)’ © 박상윤
예효승 ‘흔적들(feat. 의식의 흐름)’ ©박상윤

죽음의 질량은 아마도 생의 질량만큼이 아닐까. 생의 질량이 꼭 물리적 햇수에 비례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양한비, 김혜연 이 두 젊은 안무가에게 죽음은 아직 멀리서 가볍게 있다. 타자의 것, 급작스러운 사고, 장례식의 장면 등, 그 본연으로부터 멀찍이서 채집되는 죽음. 양한비의 <저는 지금 죽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는 친구의 급작스러운 사고사로부터 출발된 상상, 일종의 가상체험이다. 연희아트센터 소극장 공간에 들어서면 관객은 제단에 올라앉아 있는 네 명의 연행자들에게 절을 올리는 조문절차로부터 작품에 진입하게 된다.

양한비 ‘저는 지금 죽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박상윤
양한비 ‘저는 지금 죽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박상윤

관객석 한 벽면엔 각자의 유언이나 소회가 적힌 액자와 유품이 차려져 있다. 여성 보컬의 <문리버>와 함께 다소 수선스럽게 입장한 다섯 명의 연행자들은 사고, 장례식의 식당, 바다로 은유된 죽음에의 진입. 장기기증, 남겨진 유족 등 죽음에 연루되는 장면들을 진행한다. 캐럴에 맞추어 젓가락으로 인체 피규어 속 장기를 들어내는 적출 장면에서 정점을 이루는, 짐짓의 무표정과 과장된 제스추어로 일관하는 B급 정서는 미래의 작가적 정체성을 가늠하게 하지만 정작 B급의 전략, 비틀어 말하기의 능력치로서는 여직은 모자람이다. 그래도 여린 죽음, 옅은 죽음, 간만에, 짓누르는 무게가 덜어지는 시간이었다. 세상엔 어린 죽음도 있는 법이니까.

양한비 ‘저는 지금 죽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박상윤
양한비 ‘저는 지금 죽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박상윤

김혜연의 <예술래잡기술>도 노화 혹은 죽음 그 자체를 사유해내진 못했다. 제목은 예술’ ‘술래잡기’ ‘기술의 조어(造語). 생성형 인공지능 Chat GPT와의 작업이 한 트랙, 작품 내 화자로 등장하는 곰이 겪는 죽음이 한 트랙, 작품에는 이 두 트랙이 성글게 얽혀있다. 곰탈을 뒤집어쓰고 느린 피칭으로 조작된 기계적 뉘앙스로 직접 내레이션하는 누군가에 의하면 주제의 진행, 토크의 글쓰기, 영상과 음악 등 무대 내 세계의 구성은 챗GPT가 주도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유와 논리의 조직은 디지털 연산 메커니즘에 맡긴 셈이고, 무용수들은 이를 기억과 감정에 결착된 일원적 몸의 감각으로 발현하겠노라 하였다. 심지어 곰-GPT는 이렇게 묻기까지 하는 것이다. “몸과 정신이 없는 기술이 정말 예술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아마도 기술과 인간의 술래잡기로부터 포박되지 않는 인간, 인간성의 누수를 말하는 예술의 가능성을 말하고 싶었을 작품의 의도는 성사되지 않는다. 다행히 아직 인공지능의 글쓰기는 인간의 사유를 압도할 만큼 정밀하거나 조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아직키워드를 입력하는 작가의 사유능력 한계에 맞닿은 결과일 것이고, 그러나 엄청난 속도로 무지막지한 양의 정보를 포집하여 서슴없이 연산해내는 그것’(나는 이 디지털 연산 개체의 의인화를 경계한다)은 머지않아 인류의 집단지성을 초탈하여 스스로의 논리구조를 설계, 진행해나갈 것이다. 정녕 그 때가 온다면 예술은 아니 인간그것이 주도하는 변화한 패러다임에서 스스로가 규정해왔듯 지금처럼 존귀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인가?

인류는 그 존재 규명을 위해 여러 학명(學名)으로 구분되어왔다. 생물학이나 고인류학에서의 분류체계에 의하면 현생인류로 이어진 종()은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 ‘지혜를 지닌 사람이란 뜻의 이 라틴어 학명은 인류가 지혜, 사유할 줄 아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존속해올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니 철학이 그토록 오래 이성적 능력을 인간의 본질로 신봉해온 것. 절름발이였던 철학은 이제 몸의 세계, 신유물론의 세계에로도 그 사유의 물꼬를 텄다. 허나 중요한 것은 육신과 이성, 물질과 정신이 서로를 담지(擔持)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일 터인데, 폭주하는 기술이나 섣부른 예술은 신생하는 개념 혹은 개체를 사유하는 과정 없이 무작정 개발 적용하니 산적한 문제들은 이미 해결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혜연 ‘예술래잡기술’ © 장재훈
김혜연 ‘예술래잡기술’ ©장재훈

사유와 논리의 조직을 인공지능에 의탁한 이 작품에서, 아직은 다행히 미성숙한 챗GPT는 사태나 감응의 전개에 맥락을 이루지 못하는 단편적 이미지들을 산출했다. 하얀색 블라우스와 검정색 하의(전반부에는 치마, 후반부에는 바지)를 입은 네 명의 여성무용수들은 커머셜댄스를 환기하는 각선미 군무로부터 한국전통춤으로 인지되는 할미춤과 북춤을 췄다. 이미지들 간 간극은 기억의 소환이나 사유의 창발을 불러일으키는 몽타주적 순간이 못되었고 표류하는 이미지들은 그저 난독(難讀)의 불투명한 기호로 남겨질 따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인공지능의 생성논리는 머지않아 인간은 그 산출과정을 확인할 수 없게 되어버린 나머지 그것이 내어놓는 결과값에 개입할 방도를 잃게 될 것이라는 비관적 예측의 타당성을 확인해주었다.

김혜연 ‘예술래잡기술’ © 장재훈
김혜연 ‘예술래잡기술’ ©장재훈

노화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룬 2부에서, 사유를 외주한 작가는 자력으로는 죽음과 노화를 사유해낼 수 없음을 실토한다. “(주변으로부터도) 경험해 본 적이 없고……아무리 생각해도 경험하고 싶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싶지 않은 이 주제로부터 난데없이 십장생도와 윤회라는 키워드를 찾아내었다며 두 마리로 불어난 곰 인형을 조작해보였다. 죽음에의 사유는 생에의 사유에 다름 아니다. 생이든 창작이든 사유를 밀고나아가는 과정이 아닐 리 없다. ‘기억을 간직하고 이미 사유를 출현시키고 있는 일원론적 몸이라는 동시대의 테제에도 단서를 걸겠다. 기억과 사유에도 질량과 품질이 있다. 기억과 사유에 조응하고 길항해온 몸과 기억과 사유에 긴밀히 작용해온 바 없는 몸에 어찌 차이가 없을까. 무용예술에 있어 충족적인 몸은 전자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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