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김혜라 무용평론가 = 몇 년째 침체기에 빠져 있던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가 달라졌다. 우리가 직면한 사회 문제를 진단하고 예술의 미래를 예견하는 문제작이 여럿 눈에 띄었다. 특히 우리의 관습적인 사고에 질문을 던지는 창작물로 예술의 존재가치를 확인시키며 풍부한 사유를 촉발시키는 반가운 작업들이 꽤 있었다. 강요찬의 작품이 이런 경우로,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주목하게 된다. <구조와 의식>(10월 19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은 해체 퍼포먼스로 안무자의 의욕과 의지에 동조하게 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강요찬은 한양대에서 한국춤을 전공했고, 독일 비츠토크 예술인 마을 레지던시에서 상주 예술가로, 이탈리아 볼로냐 ‘레제레 스트루투레’에서 무용수로 활동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실험무용학교(SEAD)에서 안무를 공부하며 유럽에서 활동을 해왔다. 그는 2019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초청으로 < The Answer>를 선보인 후 지속적으로 연출과 안무를 하고 있다. 서연수의 안무작 <집속의 집> 〈걷다, 바라보다 그리고 서다〉에서 한국춤에 현대적인 미감과 해석적 포용력을 갖춘 그의 연출이 눈에 띄어 기억에 남았었다. 한국춤 특유의 움직임 동력과 표현적 맥락을 넓게 하는 매개자이자 연출자에서 작년 국립현대무용단 ‘스텝업’ 작품 <We Are>에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안무를 선보였다. 일상과 공연 현장에서 퍼포밍하는 자신들의 행동발생학적 차이에 질문을 던지며, 다양한 내력을 갖춘 출연진이 특별함과 평범함의 경계를 재미나게 풀어내었다. 이번 <구조와 의식>도 작년 12월말 소극장에서 초연 후 대형극장으로 옮겨 사이즈가 확장된 셈이다.
뼈대가 보이는 반투명 비닐로 조립된 거대한 구조물(이하 하우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구조와 의식>은 이 설치된 장치를 중심으로 추상적인 의식의 흐름과 사회를 구성하는 포괄적인 구조와 시스템까지 수렴하려는 야심 찬 의도를 드러낸다. 퍼포머(강요찬)가 비닐 하우스에 균열을 가하는 행동에서 점차 파손하는 과정이 작품의 핵심 행위이며, 반복되는 ‘응시와 실행’도 주요 패턴으로 퍼포머 강요찬은 관조자와 행위자로 경계를 오가며 작업을 이끈다. 긴 트렌치 코트에 칼과 전기드릴, 붉은 리본 같은 도구가 담긴 큰 가방을 들고 등장한 강요찬은 한참을 설치된 하우스와 무대를 관망하고, 자신의 무의식일 수도 있고, 설치된 비닐 하우스 내부에서 동요하는 사람들도 응시한다. 그는 상황에 따라 하우스에서 무용수들을 분리하려는 적극적인 행위자로 이를 분해하며 탈출구를 마련한다. 무용수(안무자는 이들을 ‘표현자’로 표기한다)들의 불안한 정서에서 구조의 모순이란 질문이 제기되고, 설치물을 해체해가는 행위로 답을 찾아가는 경로이다.
무대 중앙에 자리한 비닐로 둘러싸인 하우스 형체에 상처가 가해진다. 퍼포머(강요찬)는 비닐에 구멍을 내고 스모그를 삽입하고 전등으로 공간 내부에서 탈출을 원하는 무용수들을 비춰본다. 불안정한 군상을 구원하려는 듯 퍼포머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비닐을 모조리 걷어내고 지지대인 각목 프레임을 전기 드릴로 절단한다. 이어 무용수의 몸을 붉은 실(리본)로 옭아매다 끊어내는 행위로 한참 동안 작업을 이어간다. 일련의 행위가 작품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뤄지는 주된 행위로 일상 도구를 있는 그대로 사용한다. 칼과 드릴의 익숙한 용도가 무대에서 대상화되며 묘한 긴장감을 야기한다. 구조물의 형체가 와해되어 제 기능(목적)이 상실되어 가는 물건들이 무대에 쌓여갈수록 (소심한?) 쾌감도 일어난다. 우리는 때론 사회 안에서 안정감도 느끼지만 동시에 갖춰진 시스템에 반발심이 들어 무너뜨리고 싶은 파괴의 욕망이 잠재하고 있듯 말이다. 그럼에도 일신(一身)의 편안함을 포기할 수 없어 적당히 침묵하고 묵인하며 사회 시스템에 스며들어 살기도 한다. 이러한 대다수의 소시민들과는 달리 강요찬은 기존의 견고한 힘(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며 (물리적인) 구조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단행한다. 따라서 안정과 억압이란 이중성을 내포한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내적 저항을 자극한다.
오묘하게 적막한 무대를 잠식해 가는 일정한 박음질 소리와 속도가 규칙적인 시스템인양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러나 구조와 의식의 이항구조가 느슨해 감각적인 지각을 자극하는 미장센이 지속되지 못한다. 구조를 부수는 행위의 동기 내지는 발단의 단초가 모호해 진짜로 날 것 그대로 구조물을 부수는 행동의 의미가 증폭되어 발산되지 않는다. 재봉질을 하는 행위자와 틀 안의 무용수들을 사회에 내재된 계층적인 위계로 배치한 것 같으나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거대 사회구조의 요체이자 의식의 불안을 야기하는 재봉질 관련 행위가 퍼포머들(강요찬과 무용수들)과 헐겁게 성겨 있다. 쉼 없는 재봉질로 완성된 수트를 입은 재봉사와 등이 패인 수트 같이 마감이 안된 미완성의 옷을 입은 무용수들의 대비를 작품 말미에나 알아차렸다. 의식보다는 구조 해체에 몰두해 전체 행위의 기저에 있는 심리적인 복선이 단순하게 묘사된 것은 아쉽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해체해 가는 퍼포먼스이나 상당히 몰입감이 있다. 일반적인 춤이라 여겨질 유기적인 움직임 보다는 불안정한 심상을 표현하는 동작의 기조만을 줄기차게 추구한다. 모든 퍼포머가 신체 접촉이나 정서적인 교감도 없으나 전체 작품은 하나의 거대 알고리즘으로 연결되어 보이는 것이 의외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장치마다 비가시적인 의식과 연계되는 소재를 활용하여 균열과 분해, 나아가 해체로 이끄는 경로가 집요할 만큼 일관적이다. 강요찬은 무대 위 양 옆면에 의자를 배치해 프로시니엄 구조에서의 관람 방식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듯했다.
긴 시간 동안 찢긴 비닐더미와 분리된 재료들은 지난했던 행동의 흔적으로 무대에 흥건하게 널려 있다. 이어 두 대립의 아이콘(재봉사와 강요찬)은 드디어 대면하여 바닥에 평행하게 서 있다. 높은 단 위에서 내려와 거리가 가까워진 이 둘의 사이가 희망적인 시그널일까? 아니면 비관적일까? 강요찬은 이내 무대바닥 붉은 카펫을 잘라 회전하게 하고 해체된 더미를 바라본다. 완벽한 해방과 탈출은 불가능할지라도 강요찬의 저항적 행동은 지속될 거라는 뉘앙스(필자의 과한 해석이 아니길 희망하며!)를 풍기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혹은 삶이 허무함의 연속이란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강요찬은 사회구조를 은유한 장치를 해체하는 행위로 자신의 의지를 구현하였다. 의식을 억압하는 힘으로부터 해방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방법론으로 다양한 안무기법이 동원되어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한 작업이다. 이러한 류의 퍼포먼스가 기존에 없었던 것은 아니나, 상투적이지 않다. 그만큼 구조에 대한 상념이 작업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구조에 반문하며 자유를 향한 실존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명쾌하다. 다만 의식보다는 해체에 몰두해 있으나 달리 보면 젊은 창작자가 의욕적으로 자신의 사유를 타진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구축된 구조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탈구축을 희망하는 강요찬의 바람에 궁극적으로 힘이 실리는 이유이다.
균열과 저항 없이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지 않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