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적로' - 중늙은이의 회상인가, 예술가의 꿈인가
[공연리뷰] '적로' - 중늙은이의 회상인가, 예술가의 꿈인가
  • 유화정 무용이론가
  • 승인 2024.02.27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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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적로-이슬의 노래' (사진제공=업플레이스)

[더프리뷰=서울] 유화정 무용이론가 = 국립국악원이 올해 첫 기획음악극으로 <적로-이슬의 노래>(1월 17-27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를 올렸다. 지난 2017년 서울돈화문국악당의 브랜드 공연으로 초연되었던 작품이 두 차례의 무대를 거쳐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전통예술 분야에서 재공연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고유의 문화예술을 전승하고 가치를 확산하는 데 무게를 두면서도 잠재된 관객을 지속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대중성을 유지할 때, 안정된 레퍼토리로서 신뢰를 얻고 또 한 번의 무대를 쟁취하기 때문이다. 공연의 명성은 익히 들었으나 어쩐지 놓쳤던 사람들, 새로운 출연진에 궁금증이 드는 사람들을 객석에 앉힐 수 있는 강렬한 힘을 가졌으리라. 재공연의 무대만이 지닐 수 있는 무르익은 자태와 결실이 기대되었다.

적로(滴露)는 방울지어 떨어진 이슬을 의미한다. 그것이 풀잎에 맺힌 초로(草露)일지,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일지, 그도 아니면 예술가의 피, 땀, 눈물일지? 공연의 서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을 끌고 가는 두 남성, 김계선과 박종기는 한 시대를 주름잡은 대금 명인이자 서로의 예술을 최고로 인정하는 지음(知音)이다. 김계선은 이왕직아악부(국립국악원의 전신) 소속 단원으로 활약했으며 박종기는 대금산조의 체계를 세우고 진도아리랑의 선율을 정리한 명인이다. 두 명의 실존 인물에 허구를 얹어 이야기를 완성하니 꿈과 현실을 아스라이 선회하는 정서가 그득히 흐른다.

국립국악원 '적로-이슬의 노래' (사진제공=업플레이스)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지만 정치적으로 암울한 분위기는 최소화했다. 전통과 신문물을 입맛대로 취해 독특한 색채를 자아냈던 1940년대 경성의 활달한 거리에서, 계선과 종기는 영문 모른 채 인력거를 탄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에는 한 여인이 서늘히 앉아 곡조를 읊는데 푸짐하고 뜨듯하게 공간을 채워주던 두 남성의 소리를 일순간 얼려버리듯, 또렷하고 쾌청한 발성이 이곳저곳을 찌른다. 기생 산월이의 등장은 계선과 종기를 포함해 완연한 삼각형의 구도를 만들어내는 데 제격이다. 사람 셋이 모이면, 두 명으로는 부족했던 각양각색의 감정라인과 움직임 구도를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숫자 '3'은 적어도 하나의 집단으로 볼 수 있는 시작점이라 이들이 뿜어내는 주장은 보다 강력해진다.

세 인물의 애매한 관계 역시 흥미롭다. 두 남자가 산월이를 좋아했던 에피소드가 간간이 회자되며 객석의 웃음을 끌어내지만, 남녀 간 성애를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모양새도 아니고 극을 끌어가는 데 꼭 필요한 장치라고 볼 수도 없다. 그렇다고 동료지간이라 보기에도 아쉽고 사제관계도 아니다. 예부터 비슷한 사회적 위치에서 한계와 핍박을 견디며 예술에 심취해온 기생과 악사의 오래된 관계를 생각하면 오히려 이해가 쉽다. 성별, 연령, 장르가 달라도 예술하는 사람끼리는 통하는 그 무언가를 표현한 것일까? 어떤 굴레로도 설명 불가능한 이들의 오묘한 관계는 사랑과 우정과 존경을 모조리 끌어안는다.

다채로운 감성과 해석의 가능성을 품은 것은 인물 구도뿐만이 아니다. 공연 초반에는 전통의 판소리와 여창가곡의 경계 안에서 꿈틀대는 듯하더니, 곧 틀에 얽매이지 않는 솔직한 목소리가 날개 돋친 듯 연기한다. 세 명이 무대 구석구석을 밝히며 흐드러지게 노래하고 춤추는 동안 그들을 감싸안는 음악은 스윙재즈와 왈츠를 넘나든다. 산월이의 존재감은 여기서 특히 강렬해지는데, 이전까지 두 남자 사이에 앉아 술을 따라주고 적당히 반응해주는 작위적인 표정 속 알 수 없던 정체가 비로소 피어난다. 왈츠 리듬에 맞춰 '젓대나 한자락 불어주소' 경쾌하게 노래 하는 그의 음색은 젊은 성대에서 뚫고 나오는 쨍하게 맑은 소리요, 산월이를 연기하는 배우가 지금 이 순간 느끼는 솔직한 감정이다. 본연의 장르인 정가의 특색을 망각한 채 노래하는데, 그 망각은 가히 성공적인 전략이었다.

병풍 뒤에서 연주되는 악기 또한 전통의 기법을 가볍게 딛고 올라, 알 수 없는 국적의 사운드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극의 소재가 대금인데 대금 연주 장면도 없고 오히려 클라리넷이 특유의 명랑함을 당차게 내뿜는다. 전통 기반 음악극에 등장하는 클라리넷에 대해 크로스오버를 위한 서양 악기의 활용이라 단순히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클라리넷은 본질적으로 대금과 맞닿는 관악기다. 지중해의 갈대로 만든다는 클라리넷의 리드(reed=갈대)는 연주자의 입김에 의해 떨리며 소리를 내고, 대금 역시 갈대의 속살을 청공에 붙여 연주자의 입김과 함께 소리를 낸다. 무대 위에서 성대를 울려 소리를 내는 배우와, 무대 뒤에서 입김을 불어 소리를 내는 연주자 모두가 한 마음으로 파동을 만들어 관객에게 닿으니 예술의 장르와 국적은 가볍게 흐트러진다. 그저 인생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음악극으로 자취를 남기는데 이것이 모던한 전통의 방향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국립국악원 '적로-이슬의 노래' (사진제공=업플레이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작곡과 연출에 감탄을 금할 수 없으나 곳곳에 묻어있는 관습과 전형은 아쉽다. 관객의 웃음을 끌어내기 위한 익살은 단막극 코미디에서 본 듯 어딘가 익숙하고, 눈물을 부르는 배우의 호소는 신파극에서 본 듯 작위적이다. 망자인 산월의 한을 풀어주고 저승 보내는 장면 역시 굿을 본질로 하는 극과 춤에서 늘 놓지 못하는 관행이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울고 웃었다는 점이 허탈한데, 전위적인 예술을 보러 온 것은 아니니까 최대한 많은 사람의 감성을 건드릴 수 있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제작진의 의도에 공감한다. 또 산월이의 입장은 딸의 입을 빌려서도 본격적으로 이야기되지 못했고 두 남성의 시선에 의해 수동적으로 다뤄지다 끝나버리니 개운치 못한 점도 있다. 그저 두 주인공이 가슴에 품었던 뮤즈이자 작품의 원활한 기승전결을 위한 연결고리일 뿐이었던 것인가? 개성 넘치는 음악과 섬세한 연출에 젖어드는 꿈같은 시간이었으나 모든 인물의 입체적인 모습이 드러날 수 있었다면 더없이 좋았겠다.

공연의 막이 내리면서 남는 여운은 결국 유한한 삶과 노화(老化)에 대한 생각이다. 슬프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묵직하고 저릿한 감정이 암전된 극장을 맴돈다. 종기, 계선, 산월이 옛날을 회상하며 춤춘 장면은 누구에게나 한 번은 있었던 꿈같은 시절로 치환되며, 저 멀리 작은 집의 불빛으로 희미해진다. 극 중 세 인물이 노래했던 '두 눈을 딱 감고 사라지리라'의 가사처럼 죽음 앞에 의연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의미에서 필멸의 소리로 불멸의 예술을 꿈꾼 예술가들은 유한한 삶 속에서 영원의 예술을 직조해내는 위인들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가 중늙은이의 빛바랜 회상이든, 예술가의 빛나는 꿈이든, 관객은 아름다운 선율에 젖어들어 깜빡 정신을 놓았다가 삶과 죽음에 대해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며 객석을 나설 수 있었다. 어려운 전통 기반 공연의 환경 속에서 <적로>의 재공연 영광이 계속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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