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최찬열 무용평론가 =컴컴한 무대 허공에 한 사람이 달랑 매달려 있다. 평범한 일상복 차림을 한 그는 스스로 삶을 저버린 보통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삶과 죽음이 날카롭게 갈리는 백척간두 낭떠러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선 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징계에서의 죽음이나 절대 고독을 표현하는 것이리라. 사회에서 일어난 어떤 정치적 사건과 불미스러운 일 등을 풍자하는 한 컷짜리 시사만화나, 혹은 이후 전개될 공연 내용을 강렬하게 암시하는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 같은 장면이다.
제27회 크리틱스초이스 댄스 페스티벌 폐막 무대에 오른 이루마의 <고립주의자 Ⅱ>(2024년 7월 24-25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는 이렇게 삶과 인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처절한 실존의 모습과 전 세계적인 감염병 사태가 우리 사회에 몰고 온 이런저런 정서들과 고립감을 짜임새 있는 미장센에 담아 주제화한 공연이었고, 특히 춤과 오브제, 음향과 음악 등을 세련된 영상 이미지와 썩 어울리게 자유자재로 배치하는 감각적인 연출력이 한껏 돋보이는 무대였다. 말하자면 안무가는 상이한 장르들이 한데 섞여 어우러진 완성도 높은 형상물을 내놓은 것이다.
무대 오른편 뒤쪽에 커다란 직사각형 패널이 서 있고, 그 뒤에 선 사람의 모습이 거기에 실루엣으로 잠시 비치더니 회전무대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회전하는 무대를 거슬러 무대 왼쪽에서 한 명의 남성 춤꾼이 천천히 걷기 시작하면, 패널 앞이나 뒤에서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람, 등을 보인 채 우두커니 선 사람, 허공을 올려다보며 몸부림치는 사람, 그리고 쓰러져 널브러진 사람과 패널을 기어오르다 무대 바닥을 뒹구는 사람, 패널 아래 깔린 사람 등의 모습이 차례로 조명 빛에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마치 영사기에서 투영된 필름의 상(像)이 연이어 스크린에 나타나듯. 회전무대 위에 선 이들의 모습이 잇달아 지나치고, 시차를 두고 보였다가 사라지는 장면들에는 고립돼 실의에 빠진 인간 군상이 현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무심하고 무덤덤하게 방관하는 자도 보인다. 공감 능력과 소통력이 퇴보하고, 공동체적 삶이 파편화되어 가는 일련의 사회적 상황을 영화적 기법이 두드러져 보이는 장면 전환을 통해 재치 있게 형상화하는 대목이다.
그러다 방역복 같은 검은 전신 의상을 차려입은 두 명의 춤꾼이 무대 중앙에 서 있는 한 사람을 패널로 가둔다. 실존을 그 바깥에서 가두거나 관리하고 통제하는 외부의 힘 같은 존재자들이다. 곧 그들은 억압적인 권력이나 비상 상황에서 사람들을 강제로 격리하는 방역 시스템이나 제도 등을 지시하는 인물일 것이다. 이어서 쓰러진 그의 주변을 이리저리 맴돌면서 패널로 에워싸기도 하던 그들이 무대 옆으로 퇴장하면, 무대 바닥에 회오리가 치는 듯한 조명 빛이 곧바로 새겨진다. 알 수 없는 어떤 외부적 힘을 나타내는 그 빛의 운동에 휘말리는 듯 주위를 돌며 비틀비틀, 우왕좌왕하며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까마득한 심연으로 가라앉거나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발버둥 치는 듯한 움직임을 한동안 이어간다. 실존을 한계로 몰아가면서 마침내 극한 상황으로 유폐시켜 버리는 어떤 비인칭적 힘 같은 빛의 운동이다. 온 사회가 팬데믹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던 상황을 강하게 환기하면서, 거대한 변화와 혼란의 시기, 어쩔 수 없이 고립되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빼어난 솔로 춤과 간결하면서도 압축적인 장면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가 빛을 벗어나 어두운 데 주저앉으면, 다른 이가 등장해 그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이끈다. 마다하면 재차 이끌기를 되풀이하는 사이에 회전무대는 다시 돌아가고, 크고 둥근 조명 빛 테두리 안팎에서 두 춤꾼은 서로 당기고 밀어내기를 반복하며 엉겼다가 쓰러지고,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일어서더니 불쑥 주저앉거나 드러눕기도 한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고, 또 밀어내기도 하면서 죽음과 같은 고립감을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행했던 지난 2년여 동안의 사회적 거리 두기와 고립의 후유증이 다시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것일까. 아니면 연결되면 연결될수록 더 고립되는 초연결 시대가 성큼 도래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마치 오랫동안 우리 속에 홀로 갇힌 동물이 친구 동물을 침입자로 여기고 잔인하게 공격하듯이,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세상의 현대인들이 인간 고유의 소통 본능을 잃고 고립된 동물처럼 서로 거칠게 싸우고 투쟁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사성이 강한 듀엣 춤이다.
무대 중앙 뒤쪽에 패널 4개가 스크린처럼 세워져 있고, 영상 이미지가 거기에 투영돼 일렁거린다. 그리고 남녀 춤꾼이 패널 사이나 옆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빠져나왔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하면, 패널 밖으로 퍼져 나간 이미지가 무대 뒤편 전체를 격자 모양으로 나누기도 한다. 추상적인 이미지의 흐름과 확장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곧 이미지는 패널 혹은 프레임에 갇히거나 제약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하고 가로지르면서 증식한다. 프레임이나 틀 같은 지지체에 붙들리지 않는 이미지의 자유로운 운동과 비약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미지가 일렁이는 패널 앞에서 남성 춤꾼이 여성 춤꾼을 어깨에 올렸다가 내려놓으면, 그녀는 패널 뒤로 숨어들고, 그도 그녀를 따라 사라진다. 그러다 다정하게 부둥켜안는 둘과 쓰러지는 여성의 모습이 출렁이는 이미지에 휩싸인다. 실제 몸과 가상의 이미지가 포개지고 겹치면서 몽롱하면서도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전 사회적 고립 이후, 심각한 외로움의 후폭풍이 만만찮은 이 시기,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일상적 삶의 한 과정을 필름 누아르같이 깔끔하면서도 암울한 미장센에 담아낸 특이한 장면이다.
그런데 패널이 스크린 역할뿐만 아니라 공연 내내 실로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는 점도 무척 흥미롭다. 곧 공연에서 여러 개의 긴 직사각형 패널은 막이나 벽처럼 세워져 사람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거나 그들을 분리하고, 또 몇 개의 패널이 연결돼 폐쇄적인 작은 공간을 형성하더니 그곳에 어떤 이가 감금되기도 한다. 그리고 위에서 사람들을 억누르거나 압박할 때 그것은 억압적인 권력처럼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가 비스듬히 놓인 패널을 타고 오르다가 미끄러져 내릴 때 그것은 넘어서고 극복해야 할 어떤 곤경이나 고난을 나타내기도 한다. 요컨대 이루마는 오브제를 요리조리 능수능란하게 배치해 명쾌하게 메시지를 드러내는 재주가 뛰어난 안무자라는 말이다.
다음 장면에서 그녀의 이런 재능은 특히 잘 발휘된다. 무대 양옆에서 패널을 밀면서 등장한 한 무리의 춤꾼이 망연자실 무대 중앙에 앉은 이를 에워싼다. 익명의 무리가 한 여성을 가두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저항하거나 막아 낼 수 없는 위세에 실존은 소외되고 배제되어 마침내 갇히는 형국이다. 그녀는 패널에 둘러싸인 채 놀란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움직여 보지만, 여섯 개의 패널은 그녀 주위를 맴돌며 계속 가둔다. 그러다 패널 뒤로 잠시 사라진 그들이 모두 검은 복면을 덮어쓴 모습으로 나타난다. 표정도 시선도 없는 비밀스러운 얼굴들이다. 우리에게 속할 수 없는 바깥의 존재자, 예측할 수 없는 우발적인 힘과 같은 존재자로서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아니면 내 안의 낯선 타자, 곧 폐쇄적 본능의 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튼 이는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들이닥친 미지의 힘이다. 도식적이면서 분절적인 움직임을 이어가면서 그들은 누군가를 가두거나 억압하고 배제하는 상황을 되풀이한다. 시나브로 우리 삶과 일상에 스며들어 어느새 일반화된 고립의 상황을 무대 바닥을 일정하게 구획하는 여러 양태의 사각 조명들과 패널의 이동과 운동, 조립과 해체를 통해 재치 있게 형상화하는 것이다.
영상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식도 매우 독창적이다. 특히 여섯 개의 분리된 프레임처럼 선 패널에 각각 기하학적인 문양과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추지 않은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동시에 투영돼 보이는 장면은 압권이다. 회화적이면서도 영화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독특하고 창의적인 장면이다. 또 그 이후 전개되는 역동적인 군무와 대비되게 무대 뒤 벽에도 묽고 연한 빛깔의 담채화 같은 이미지가 나타나는데, 첫새벽 도시의 빌딩 벽을 언뜻언뜻 비추는 자동차의 서치라이트처럼 나타났다가 흘러내리듯 사라지는 이미지는 메마르고 차가운 도시의 분위기와 우울한 기분이나 감정 등을 느끼게 한다. 허망함과 허무함을 자아내는 이미지이다. 그런데 이 이미지들이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곧 그림이 될 만한 이미지도 아니고, 어떤 중심도, 특권적 대상도 없는 불특정한 이미지, 하찮은 이미지이며, 나타나는 것의 일렁거림과 반짝거림만 있는 이미지이다. 그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계속 일렁이고 잔잔하게 요동하는 미세한 떨림, 작은 동요 같은 이미지이다. 재현을 경유하지 않은 이미지, 무수한 이미지들이 뭔가 수수께끼 같은 힘으로 용솟음치듯 흩뿌려지고 흩날리는 무대는 이미지가 오가고 통과하는 장이 되고, 이러한 이미지의 유동적인 힘과 운동은 실존의 기저와 배후에 존재하는 동시에, 그들을 연결하고 관통하면서, 또 해체하고 분산시키면서, 고립감과 슬픔, 우울 등의 정서를 한층 더 강화한다. 새로운 감각을 산출하면서도 동시에 명쾌하게 메시지를 드러내는 수려한 장면이다.
공연 후반부, 무대 왼쪽 앞에서 등장한 방역복 차림의 두 춤꾼이 다소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무대 오른쪽 뒤에 서 있는 패널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더니 톡 건드린다. 그 순간 패널이 앞으로 무너지면서 한 무리의 사람이 쏟아져나와 무대 바닥에 뒹군다. 고립된 이들이 한꺼번에 벽을 뚫고 몰려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능동적이라기보다 지극히 수동적이고 무기력해 보인다. 그런 그들이, 빠르고 요란스러운 음악이 울려 퍼지고 현란하고 자극적인 조명 빛이 갑자기 무대 전체를 감싸면, 앞으로 박차고 나간다. 해방을 맞은 사람처럼 여기저기 펄쩍펄쩍 날뛰다가 다시 쓰러지고, 그러다 재차 역동적이면서도 생기 있는 군무를 추면 방호복 차림의 두 춤꾼이 패널을 끌면서 그들 주위를 맴돈다. 언제든지 그들을 은밀하게 배제하고 다시 가둘 수 있다는 암묵적인 위력으로 보인다. 그러다 무대 바닥에 새겨진 여러 개의 사각 조명 안에서 정지 동작을 취하던 춤꾼들이 잠시 퇴장했다가 무대 중앙에 선 둘을 둘러싸더니 그 주위에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방역복을 입은 둘이 마주 보고 서서 허공을 올려다보면 다시 밧줄이 서서히 내려온다. 수미상응하게 또 다른 죽음을 암시하는 엔딩 신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서로 작용하고 작용 받으며 존재하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고립감은 인간에게 상징적 죽음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고립되고, 구석으로 내몰린 이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무력감, 외로움과 멜랑콜리 등은 일상 속 대부분의 의사소통이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혹은 스마트폰과 SNS를 통한 비대면 소통으로 대체되고 있는 현실과 깊이 연관된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초연결 사회에서 더 고립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루마의 <고립주의자 Ⅱ>는 이런 고립감이 보편화되고 일상화된 시대에 현대인이 느끼는 이런저런 정서와 감정을 영상 이미지와 조명, 음악과 음향, 오브제와 의상, 그리고 춤 등 여러 예술 장르의 재기발랄한 혼용과 자유로운 횡단적 놀이를 통해 흥미롭고도 독창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특히 다른 장르 간의 조화로운 이웃 관계와 이질적인 공명이 깊은 울림을 주며 심미감을 강하게 자극하는, 무척 감각적이면서도 세련된 공연이었다. 젊은 안무가 이루마는 동시대 춤의 지형에서 자기만의 색깔이 뚜렷한 춤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altai21@hanmail.net 한국춤 전공 후 모스크바대 인류학 석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인류학 박사과정 및 미학 박사학위 취득.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