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뮐러의 시가 한 편의 오페라처럼 - 베이스 연광철의 '겨울나그네'

2024-12-17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하반기 다섯 번의 <겨울나그네> 공연을 보았다. 바리톤 벤야민 아플,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 테너 김세일, 그리고 베이스 연광철. 12월 4일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열린 연광철의 리사이틀로 마침내 <겨울나그네> 관람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었다.

연광철의 무대에서 그가 오페라 가수임을 확인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리트 가수와 오페라 가수가 어떻게 다른가를 깨달은 시간이었다. 같은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였건만 전혀 다른 버전의 작품 같았다.

앞서 본 리트 전문 가수들의 무대에서 확연한 색채감을 느낀 것은 이안 보스트리지의 무대였다. 회색빛 수묵화랄까. 온통 회색의 음울한 나그네의 여정, 뭉크의 작품처럼 소리 없는 절규를 지르는 듯한 <겨울나그네>였다. 반면 연광철의 무대는 색채감이 가득했다. 한 편의 오페라가 펼쳐지고 한 사람의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가 등장해 청중을 빠져들게 했다.

연광철은 “캐릭터와 시에 극적인 부분을 강조하겠다”고 말한 바 있었다. 연광철이 만들어낸 나그네는 연약하지 않고 분노하지도 않는, 흘러가는 모든 상황을 감내하는 강인한 남자로 보였다. 전설 속 영웅 같은. 부당한 운명이나 형벌을 기꺼이 감내하는. 연광철의 음악에 배어있는 ‘Dignity’는 어떻게 해도 지울 수가 없다.

(사진제공=마포문화재단)

첫 곡 ‘밤인사’에서 특히 인상적으로 들린 가사는 ‘Die liebe liebt das Wandern, fein Liebchen, gute Nacht’였다. ‘사랑은 방랑을 좋아하니, 사랑하는 이여 잘 자요.’ 주인공의 슬픔과 분노가 아니라, 그 노래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바로 그 문장이었다. 실연의 괴로움을 잊으려 떠나는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의 꿈을 방해하려 하지 않았다.

‘보리수’에서 연광철은 마치 해묵은 옛날이야기를 꺼내듯 사랑의 서사를 풀어나갔다. 사랑의 추억은 아득한 과거로 멀어져갔다. ‘도깨비불’이나 ‘우편마차’ ‘까마귀’는 노래 안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도깨비불에 홀려 길을 잃어도 당황하지 않는 초연함, 우편마차가 보일 때의 설레임 아래 숨기듯 깔려있는 체념, 머리 위를 맴도는 까마귀로 인한 불안함이 음악이 그려내는 장면 장면마다 배어나왔다. 14번 ‘백발’은 성악가의 많이 희끗한 머리 때문인지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예전에 어느 드라마에서 삼각관계로 괴로워하던 주인공이 “나는 빨리 늙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지금 이 상황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텐데.”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겨울나그네> 역시 늙어버리면 지금 겪는 사랑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거라고, 하루아침에 늙기를 바라는 남자의 기도가 보였다.

(사진제공=마포문화재단)

20번 ‘이정표’에서는 연광철의 인생이 느껴졌다. 그가 걸어온 인생에 이정표가 있었을까. 성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그의 행로, 1993년 라이프치히에서 데뷔한 이후 이방인으로서 유럽무대에 서온 30년이다. 휴식을 찾아 끝없이 걷는 나그네의 여정이 따뜻하기를 바라면서 노래를 들었다. 이어진 21번 ‘여인숙’은 연광철이 생각하는 이 연가곡의 핵심 주제다. 참 신기하게도, 쉬고 싶으나 어디에도 누울 곳 없는 이 처량한 나그네의 상황을 성악가는 초월적으로 표현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성경의 글귀가 생각날 만큼. 주어진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고 다시 길을 떠나는 남자는, 필시 연광철이 <겨울나그네>를 대할 때 떠오른다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물 같은 사람’이리라.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는 나그네의 방랑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상징한다. 시종일관 장중하고 깊이 있는 서사를 담아낸 피아니스트 박은식은 빈약한 허디거디 연주마저 그 거지 악사가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있는지 느껴지게끔 표현했다. 악사에게 동행과 반주를 청하는 그 정중하고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며 연광철의 <겨울나그네>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 뒷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다.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까마득한 전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