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모니터] 의식과 무의식의 실타래, 백진주의 ‘켜(Couche)’

2023-10-03     나수진 무용이론가

[더프리뷰=서울] 나수진 무용이론가 =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이성으로 유지되는 객관적인 세계와 이성을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주관적 세계가 충돌하며 일으킨 고뇌를 지닌 인물이다. 베르테르의 고뇌는 극단적 자기파괴 행위, 곧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지만, 젊은 백진주의 고뇌는 조금 달랐다. 내적 갈등이 매우 격정적이라는 점에서 두 인물은 닮아 있지만, 결정적으로 고뇌의 결말이 향하는 방향이 달랐다. 안무가 백진주의 치열한 고뇌는 창조적 파괴로 종결되지 않고, 파괴적 창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7월 21, 22일 양일간 언더스탠드 애비뉴 아트스탠드에서 젊은 안무가 백진주가 <켜(Couche)>라는 작품을 올렸다. 그는 작품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조차 규정하기 어려운 이 시대의 혼란을 끌어안고 인간 존재의 심연을 깊이 파고들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켜>는 새로운 형식을 꾀했다. 일반적인 극장 대신 런웨이 같은 무대를 연출했으며,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와 조형 오브제를 활용해 무의식의 영역인 꿈과 환상의 세계, 문명화 이전, 곧 태곳적 인간 본성의 심연을 넘나들었다.

백진주

공연장은 꽤 실험적이었다. 관객석이 정면에 위치하는 일반적인 프로시니엄 무대를 배제하고, 세로로 긴 무대를 사이에 두고 관객이 양 사이드에 마주 앉아 공연을 수평적 위치에서 바라보는 구조를 선택했다. 또한 무대 앞쪽에는 스크린을 설치해 무대 바닥에 투사되는 프로젝션 매핑(Projection Mapping)과 영상을 즐기기에 적합하게 배치했다. 더 나아가 관객이 무용수의 호흡과 체취를 밀착하여 좇음으로써 생생한 현장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관객은 언제나 공연자에 비하면 수동적이고 열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 관객은 공연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무대 뒤 이야기에 대해서는 무지하며, 제한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계를 지닌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켜>의 무대는 관객의 지위를 수동적인 것에서 능동적인 것으로 전이시킨다. 이 무대에서 관객은 자신의 방식으로 극을 인지하고 감상하는 능동적인 존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게 된다. 즉 <켜>는 컨템퍼러리 예술답게 공연자와 작품, 감상자 사이의 격차를 없앰으로써 작품을 감상하는 자체로 모든 관객이 나름대로 자기만의 감각을 분할하고 자신만의 시각을 덧입히도록 유도한다. 랑시에르는 이를 ‘관객과 공연자의 평등’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벡진주

이윽고 펼쳐진 공연은 이러한 무대가 가진 특징을 영리하게 활용한 연출을 보여주었다. 첫 막이 오르자 무대 한편에 파란색 조명이 비치고 한 여자 무용수의 실루엣이 보인다. 반대편에 설치된 스크린에는 무용수의 실시간 모습을 담은 영상이 재생된다. 스크린 속 무용수는 실물보다 커지기도 하고 거울 앞에 서 있는 듯 두 상이(相異)대칭을 이루기도 한다. 두 형상은 분리되어 마주보기도 하고 샴쌍둥이처럼 맞붙기도 한다. 하나의 몸통에 얼굴과 팔이 두 개씩 붙어 있는 모습은 마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 개의 팔을 가진 신들의 모습과 같아 보인다. 영상의 색조가 반전될 때는 인간 무의식의 분석 도구로 쓰이는 데칼코마니가 떠오른다.

무대 위에 엄연히 실재하는 무용수의 움직임이 스크린으로 옮겨가면서 변형된다. 이러한 장치는 관객을 현실과 의식의 세계에서 꿈과 환상, 무의식의 세계로 이끈다. 이렇듯 무대 위 실체를 영상으로 재조명하는 기법은 무대라는 제한된 물리적 공간에서 움직임으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를 확장시킨다.

백진주

영상이 꺼진 후에는 <켜>가 내포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무대 전면에 등장한다. 잠시 암전되었다가 깊은 심연을 상징하는 듯한 푸른 조명이 무대 바닥을 비추면 남녀 무용수의 형체가 드러난다. 그들은 실타래 같은 끈으로 연결된 채 엎드려 있다. 둘을 연결한 끈 위로 창백한 조명이 물결처럼 일렁이면 두 사람은 상대를 향해 기어가서 서로 뒤엉킨다. 상하 위치가 뒤바뀔 때마다 이 둘은 서로에게 존재의 토대가 되었다가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한다. 서로 밀어내다가 다시금 끌어당기는 두 무용수의 모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의식과 무의식 또는 지성과 본성처럼 보인다. 실타래 같은 끈에 묶여 ‘밀당’을 반복하는 두 무용수는 서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대립과 연합을 반복하면서 규정되지 않는 인간 실체를 형상화한다. 결국 어느 쪽도 해방되지 못한 채 남성 무용수가 끌려가듯 퇴장한다. 이러한 비극적 결말로 인해 카타르시스는 유보되고, 무력감과 절망감이 더해지면서 주제의식이 극대화된다.

백진주

다음 막에서는 이러한 인간 본연의 내적 갈등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불안한 음향이 사이렌처럼 울려 퍼지는 가운데 흰 드레스를 입은 무용수가 하얀 두 막 사이에서 힘겹게 빠져나와 무대 위로 떨어진다. 이 장면은 태아가 자궁 밖으로 빠져나오는 듯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갓 태어난 인간은 새하얀 캔버스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뼛속 깊이 본성이 밑그림처럼 각인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성장하면서 생긴 세파의 상흔까지 무의식에 켜켜이 쌓이는 과정이 끊임없이 의지와 현실 세계를 간섭하고 결박한다. 이러한 자아를 표상하는 듯한 무용수는 어떤 절대적인 힘에 조종 당하듯 전율하다가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묶인 듯 무겁게 움직인다. 마치 무의식에 침전된 본능에 자아가 조종 당하는 야수처럼 무대를 기어다닌다. 무용수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무대 바닥에는 영상으로 구현한 빛이 끈적한 피 또는 생명의 진액처럼 퍼져나간다.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진흙탕 또는 수렁 같은 그곳에서 무용수는 팔다리 없는 벌레가 기어가듯, 반신불수 환자가 몸을 비틀 듯 허우적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상체를 들어 올려 상모의 물채를 돌리듯 움직인다. 이는 다양한 내적 자아의 욕구에 결박 당한 의식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영영 같은 자리를 맴도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연상시킨다.

백진주

뒤이어 망사 드레스를 입은 무용수가 등장하면서 이러한 운명 앞에 선 인간의 절규는 최고조에 달한다. 음향효과가 페이드아웃되면서 무채색의 드레스를 걸친 무용수가 움직일 때마다 의상이 바스락대며 소리를 낸다. 관객이 숨죽여 이 움직임을 따라가노라면 갑자기 위에서 동굴 속 종유석 또는 지층의 광물 결정체 덩이 같은 오브제가 남자의 절규와 함께 무용수 곁으로 떨어진다. 무용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식이 향하는 곳으로 묵묵히 움직인다. 하지만 그 기괴한 오브제, 곧 켜켜이 쌓이고 단단하게 굳은 무의식 덩어리는 의식적 노력을 비웃듯이 무대 한편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관객들의 시선을 앗아간다. 뒤이어 무대 바닥에 무용수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투영되면서 의식과 무의식의 간섭, 현실과 환상의 교차 현상이 극대화된다. 마치 물가에 무용수가 비친 듯 영상은 신비롭지만 아름다운 나르시스의 잔영과는 거리가 멀다. 지지직거리는 텔레비전 화면처럼 무용수의 움직임은 계속 흔들리거나 끊긴다. 마치 무의식 속에서 발현된 무언가가 의식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원본을 잃거나 혹은 의식을 통해 들어온 외부 자극이 무의식이라는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원형을 잃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느새 무채색 드레스는 붉은 조명에 따라 핏빛이 되고 무용수는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잡아 흔든다.

백진주

이러한 고뇌가 무대를 압도할 때 스크린에는 무대 밖의 한 공간을 담은 영상이 재생된다. 무의식의 대부분이 억압된 성적 욕구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던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스크린에는 침실과 욕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남자와 여자의 감각적인 실루엣이 누아르 필름처럼 흘러간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사랑’ ‘성(性)' ‘살인충동’과 같은 상호 매개성을 가진 단어들을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한 장면에서 이러한 단어들이 복합적으로 우리 심상에 매개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무의식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폭로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섬뜩함을 마주하도록 만든다. <켜>의 새로운 시도 중 하나인 미디어 아트, 특히 프로젝션 매핑을 적재적소에 활용한 연출은 이처럼 무의식, 꿈, 환상이라는 소재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다.

영상이 꺼진 무대 위에는 영상 속 마지막 자세를 그대로 취한 무용수가 등장한다. 영상 스크린의 반대쪽에서는 뒤엉킨 남녀 무용수가 천 너머 무대 위로 떨어지고, 무대 위에 있던 여자 무용수는 그 남녀 무용수를 넘어 천 밖으로 나간다. 천 밖으로 나간 여자 무용수는 의식을, 뒤엉킨 남녀 무용수는 인간의 에로티시즘에 기반한 근원적 무의식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이 둘은 레슬링하듯 힘을 겨루기도 하고, 원숭이처럼 네 발로 기기도 하며 기이한 몸짓을 이어간다. 무대가 암전되고 다시 어두운 녹색 조명이 무대를 희미하게 비추면, 남자 무용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여자 무용수들만이 무대에 남아 서로 뒤엉킨다. 이때 무대 바닥에 프로젝션 매핑된 촘촘한 하얀색 직선들은 무용수들의 몸짓에 따라 파장을 일으키며 곡선으로 아롱거린다. 이윽고 바지를 입은 여자 무용수가 치마를 입은 여자 무용수를 제압한 뒤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밟고 넘어간다. 이는 의식의 패배, 무기력, 본성에 지배 당하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바닥에서 일렁거리던 선이 모두 사라지고 무대에는 다시 종유석 같은 오브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지를 입은 여자 무용수가 그 오브제를 향해 걸어가면서 암전되고 막이 내린다.

백진주

마지막 부분의 담백한 연출은 해석의 지평에 여백을 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전반부에 미디어 아트와 영상, 오브제가 총동원되어서 그런지 움직임만으로 구성된 후반부는 무대가 어딘가 비어 보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움직임 외의 요소로 조성하는 미장센의 아우라가 약해진 탓이었다. 하지만 왠지 이러한 무대가 마음에 들었다. 비워낸 만큼 관객이 비집고 들어갈 기회가 많아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일 마지막까지 미디어 아트와 영상이 극을 끌고 나갔다면, 모처럼 관객과 공연자의 평등이 이루어진 무대 연출의 의미가 다소 퇴색되었을 것이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압도적인 미디어가 숨을 죽이는 순간, 그 고요 속에서 오히려 관객은 내적인 카타르시스와 해석의 가능성을 직면하게 된다. 즉 관객들이 수평적 위치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숨죽여 따라감으로써 공연자의 기획 의도와 안무에 담긴 의미를 주체적으로 해석할 기회를 잡았을 터였다. 그것은 이미 조용한 폭발이었다. 해석의 가능성이 사방으로 무수히 다층적으로 뻗어나가는 반복될 수 없는 한순간의 아름다운 가능성이었다. 관객이 능동적 또는 주체적으로 공연을 해석하는 만큼 공연의 의미 범위는 자연히 확장된다. 실험적인 관객석은 이처럼 오히려 비어 보이는 무대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했다.

백진주는 젊기에 고뇌했고 이는 <켜>의 주제와 형식 모두에서 드러났다. 이에 관객 대부분은 한 젊은 안무가의 고뇌를 오감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는 인간 실존에 관한 철학적 고민 끝에 인간의 본성과 무의식의 심연까지 파고들었다. 특히 하이 테크(High-tech)를 무용 공연에 접목하면서도 감성을 배제하지 않는 감정적 깊이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공연장을 가득 채운 격정은 관객의 내면을 들끓게 했으며 백진주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도록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