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필름리뷰] 사라져 가는 골목을 찾아 나선 전통춤꾼 - 골목춤 ‘보광동’
[더프리뷰=서울] 김혜라 무용평론가 = 팬데믹 시기 점화되었던 댄스필름 제작 열기가 현장공연이 복귀되며 지속적으로 관심을 모을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현장성과는 다른 영상미와 기록적 가치를 지닌 댄스필름의 유용성에 예술가들의 인식이 변화했고, 짧은 기간에 비해 여러 성과도 있었다. 단순한 랜선 송출에서 자체 제작의 단계로 점진했고, 공공기관의 지원에 힘입어 무대공연과 내용은 같지만 기법이 다른 댄스필름으로 동시 제작하며 시대적 요구에 맞는 창작물 유통 가능성에도 힘을 싣고 있다.
무용영화제나 댄스필름축제도 그간 축적된 경험으로 프로그램이 세분화되고, 서울무용영화제나 서울국제댄스페스티벌인탱크, 노박스댄스필름페스티벌과 올댓댄스온라인페스티벌 등을 주축으로 다양한 국내외 댄스필름이 소개되고 있다. 현장 공연과는 달리 댄스필름이 수용할 수 있는 가용 범위는 상당히 넓으나 상업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독립영화에 비해도 관객 확보의 취약성은 여전하다. 당분간은 현장공연과 댄스필름이 공존할 것 같으나 코로나 시기와는 다른 기획으로 방향성을 다질 필요도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한 예술가의 인생을 입체적으로 다루거나, 공간의 의미를 인식하게 하는 소위 ‘장소성’이 강조되는 필름은 앞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노박스댄스필름페스티벌에서 상영된 <골목춤 ‘보광동’>(10월 14일 에무시어터)이 바로 ‘장소성'을 강조한 영상작업의 한 예가 되겠다. 최예진 감독, 서정숙 춤꾼, 김보라 음악감독이 만든 댄스필름은 보광동 골목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한다. '빛나는 마을'이란 뜻을 지닌 보광동은 과거 전쟁의 희생자와 소수자들이 살았던 마을로 현재는 한남 뉴타운 재개발을 앞둔 곳이다. 보광동 언덕에서 바라본 서울의 풍광은 화려하고 아름답다. 한강 물줄기 한 편에 높다란 빌딩과 아파트가 즐비하나 보광동 마을은 인적이 드문 폐가와 좁은 골목들로 같은 하늘 아래 너무나 다른 풍광이다. 김보라의 구음과 함께 서정숙은 폐가를 둘러보고 계단과 골목 구석을 다니며 발을 디디고 손을 들어 도심 속에 고립된 골목의 공기와 기운을 어루만진다. 빨랫줄에 널린 수건을 낚아채 구음 살풀이를 골목에서 한 판 시연하기도 한다. 살풀이 춤의 힘으로 사람의 온기로 과거의 시간과 접속되는 상상을 하게 한다. 담벼락을 치고 ‘어여 둥기’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즐겁게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한다. 골목길마다 삶의 이야기가 배어 있는 곳에서 넘실대었던 사람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춤꾼은 하늘을 향해 손짓을 하고 과거의 이야기를 품어 땅 바닥에 몸을 누인다. 흙 냄새, 꽃 냄새를 더 이상 맡을 수 없을 것 같은 아련함으로 이제는 곧 사라질 마지막 보광동의 풍경이 서정숙의 춤내력으로 공간과 합일되어 영상에 담겼다.
“보광동은 일제 강점기 용산 일대가 군기지로 수용되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둔지미 사람들과 40년대말 북한 이주민부터 60년대에는 농촌지역 이주민들이 토박이와 어울려 살던 곳으로, 현재는 서울특별시 뉴타운으로 재개발이 되면 ‘보광동’ 이름은 없애고 ‘한남 뉴타운’으로 쓰인다고 한다.”(영상 프롤로그) 최예진 감독은 ‘보광동’이란 이름이 사라질 곳에 몸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지 고민을 했다. 동네 곳곳의 틈과 사이에 배어 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며 보광동 골목에 존재했던 몸들과 만나 묵혀 둔 이야기를 듣고 싶어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감독은 하나의 물음이 사람들과 교감을 일으키고, 그 울림의 파장을 기다리는 작업이 <골목춤 ‘보광동’>이라 소개한다. 안무와 콘셉트를 맡고 춤까지 춘 서정숙은 이번 작업이 동시대와 어울리는 전통춤으로 미디어와 친해지는 계기였다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 공간에서 춤의 통로를 연 것 같았다는 소회를 전했다. 사랑방이나 프로시니엄 극장에서만이 아니라 전통춤꾼들의 활동영역이 다양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도 했다.
유럽과 미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장소춤(Site Specific Dance)에 대한 인식이나 창작이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춤을 수단으로 공통의 관심사가 함양되는 커뮤니티 댄스는 어느 정도 저변을 확대하고 있는 반면, 특정 장소가 주된 대상이자 매체인 장소춤 관련 활동은 아직은 미비하지 싶다. 커뮤니티 댄스나 장소춤의 목적은 춤과 춤꾼이 주인공이 아니다. 커뮤니티 댄스에서 춤은 단지 수단이 되어 커뮤니티 구성원들과 소통하는 것이 우선이고, 장소춤도 장소를 매개로 장소와 하나되어 장소성의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코로나 시기에 극장 밖 야외 공연도 많았으나 이는 자연공간에서 실연한 플레이스(Place) 댄스이지 사이트(Site) 댄스는 아니다. 사이트 댄스는 장소(Site)에 새겨진 역사, 사건, 상징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경우는 정치사회적 현안이나 환경 및 지구 생태계와 관련된 실제적인 문제를 포괄해 다루면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예를 들면, 글로벌 사이트 퍼포먼스의 <54 Capitols, 54 Dancers>는 미국의 54개주 의사당 건물 앞에서 54명의 무용수가 동시에(2019년 11월 10일) 춤을 추면서, 정치적인 선언은 아니라고 당사자들은 말하지만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이는, 상징적인 퍼포먼스를 했다(https://www.globalsiteperformance.org/2019/11/10/54-capitols-54-dancers/). 그런가 하면<Global Water Dancers 2023~Minneapolis>(2023)는 미니애폴리스에서 미시시피강의 수질 개선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한 경우이다(https://www.globalsiteperformance.org/2023/09/10/global-water-dances-2023/). 바디카토그래피 프로젝트의 <resisting-extinction>은 생태계 파괴로 인한 지구 멸종에 저항하는 퍼포먼스로 환경문제를 환기시키는 작업이다(https://bodycartography.org/portfolio/resisting-extinction/). 극장춤이 구현하는 사회비판적 메시지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실제 현장에서 실질적인 문제와 마주하게 하는 장소춤의 파급력은 강력하다.
춤으로 장소를 매개한 <골목길 ‘보광동’>도 아련한 정서를 넘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란 심각한 사회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멋들어진 건물이 세워지면 자본의 논리에 밀려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이 곳 보광동 골목길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질 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장을 포착한 <골목춤 ‘보광동’> 작업은 기록적 가치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낭만적이면서도 사회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장소특정형 댄스필름 작업을 통해 최예진 감독은 “우리가 보존하고 기억할 것이 무엇이지” 질문을 던진다.
최예진 감독과 서정숙 춤꾼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골목춤’ 시리즈를 만들 계획이라니 그들의 행보가 기대된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공간이 품은 시대적, 역사적, 현재적 의미를 조명한 이와 같은 장소특정형 공연과 필름작업이 많아지길 바란다. 이번 작업은 댄스필름이 나아가야할 한 방향을 제시한 좋은 사례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