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뮤지컬 ‘겨울 나그네’ - 눈 내리는 겨울날, 첫사랑의 감성과 추억
[더프리뷰=서울] 유희성 공연칼럼니스트 = 뮤지컬 <겨울 나그네>는 1997년 초연 이후 2005년 재연을 거쳐 2023년 12월 15일 삼연에 들어갔다(2024년 2월 25일까지 한전아트센터). 마침 2023년은 원작자인 최인호 작가의 10주기이기도 하다.
이번 프로덕션에서는 포스터와 메인 로고, 음악과 무대, 의상, 영상 등 모든 것들이 달라져 있었지만, 특히 프로그램에 수록된 읽을거리의 풍성함과 다양함에 눈길이 머물렀다. 고 최인호 작가와는 <겨울 나그네>뿐 아니라 <몽유도원도>까지 두 편의 뮤지컬 작품을 함께 일구어 내며 막역한 친구처럼 의기투합,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윤호진 예술감독이 고인의 10주기를 맞아 그에 대한 기억과 그의 대표작들을 소환하며 편지체로 쓴 글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울컥했다. 나 또한 <겨울 나그네>로 몇 차례 뵙게 되었던 생전 최 작가님의 따스한 시선의 온기와 더불어 나지막하고 차분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아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다.
최인호 작가의 <겨울 나그네>는 1984년 동아일보에 1년 여 연재되었던 장편소설로, 제목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서 가져왔으며 또한 프랑스 화가 마네가 그린 <피리 부는 소년>에서 영감을 얻어 젊은 날, 아름답고 순수한 청년의 사랑과 인생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민우를 중심으로, 낭만이 있지만 다소 불안정했던 그 시대 청춘들의 초상이었던 다혜와 현태, 은영 네 사람의 엇갈린 청춘의 사랑과 삶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작품은 잃어버린 순수와 아련한 첫 사랑의 기억에만 머무르지 않고, 급변하는 사회 속 굴곡진 인생과 삶의 무게를 담아내면서 오랫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로맨스 소설로서 세대를 뛰어넘는 인기를 이어 갔다. 더불어 1986년 영화로 만들어져 당대 유명 배우인 강석우, 이미숙, 안성기, 이혜영이 출연해 최고의 흥행작으로 인기를 누렸으며 제 25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눈 내리는 겨울에 쓸쓸하고 아련하게, 더러는 호젓하게 떠나는 겨울 나그네의 뒷모습, 마음까지 적시는 하얀 눈을 맞으며 하염없이 걸어가는 쓸쓸한 나그네의 뒷모습은, 누구라도 쉽사리 꺼내거나 물어보지 못할 지독한 사연처럼, 처연한 아쉬움과 그리움처럼, 그림처럼 영화처럼 말없이 함께 걷고 싶게 만든다.
초연 때 참여했던 배우로서, 재연을 거쳐 삼연까지 지켜보며 느낀 것이 있다. 작품에서 결코 변하지 않은 것은 풋풋한 첫 사랑의 설렘 같은 원작의 정서를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물론 시간과 세태의 흐름에 따른 표현의 변화와 차이는 있었지만) 시대와 세대가 바뀌어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련한 첫 사랑에 대한 순수한 추억, 순수한 청춘들의 초상은 매 시즌 거기 그렇게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돌이켜보면,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고 사라져 버린 청춘의 간이역을 지나쳐버린 첫 사랑과 더불어 붙잡지 못할 청춘의 초상, 그 순간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무심한 시간처럼 그렇게 유유히 지나쳐 버린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다. 인생의 황금기였던 청춘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결코 붙잡아 둘 수 없기에, 단지 기억으로나마 가슴 한켠에 저장해 두었다가 불현듯 그리워하고, 그래서 더 애틋하고 가슴 저미는 호젓함으로, 청춘의 초상인 겨울 나그네의 흔적과 함께할 수 있는 것 같다.
작품을 보면서 새삼 느끼게 된 것 - 새내기 캠퍼스의 봄처럼 가장 아름다운 청춘시절의 풋풋함과 생기 넘치는 사랑과 기쁨이 마냥 샘물처럼 솟아나던 시절의 기쁨의 강을 지나고 나면, 어느새 굴곡진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인생이라는 기차를 타고 생경스런 수많은 간이역을 거쳐 한여름과 가을을 지나 어느새 추운 겨울까지 수많은 사람과 사건과 상태를 경과해 삶이라는 간이역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져 다시 스치게 되고, 저마다 같은 듯 다른 인생의 계절과 계절을 반복해 무수한 사람들과 만나고 지나치며, 그렇게 또 언제일지 모를, 정해지지 않은 정거장을 찾아가는 인생의 기차 여행을 하는 것 같다.
이번 프로덕션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윤홍선 프로듀서의 뚝심 있는 결단과 배려로 이 시대에도 유효한 원작의 정서를 거듭 되새기며 모두가 향유할 수 있도록 동시대성을 가미해 제반 제작환경을 안배, 1차 창작진과 기술 스태프진에까지 과감하고 획기적인 변화를 주었고, 더불어 70-80세대 뿐 아니라 MZ세대까지 시대와 세대를 뛰어 넘어 첫사랑의 순수한 감성을 자극하고 소환하며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 했으며, 더불어 모두가 함께 즐기며 감동을 주고받게 한 것이었다.
박동우 무대디자이너는 초연부터 삼연까지 모든 프로덕션에 참여했으며, 중학생 시절부터 우상으로 여겼던 최인호 작가를 향한 각별한 마음과 기억들을 되살려 고인에게 헌정하는 마음으로 이번 무대를 디자인했다고 한다. 아름답고 슬픈 기억의 교차를 드러낸 커다랗게 엇갈린 황금색 액자와, 기억과 추억을 더듬게 하는 자작나무 숲과 메인 무대인 나이아가라 클럽을 배치하며, 영상과 조명을 배려한 화면과 공간의 여백을 살린 구성을 통해 다양한 장면들을 순식간에 변화할 수 있게 했다. 더불어 송승규 영상디자이너와 구윤영 조명디자이너와 제대로 된 합을 일구어내며, 세련되고 아름다운 무대 미장센을 구축해 냈다.
또한 그 환경에서 씨어터 댄스와 드라마틱한 생활 움직임, 공간 전체와 부분을 자유자재로 구성해 장면을 구축하고 배우들의 극태(劇態)에 매력과 활력을 불어넣은 박경수의 안무 또한 일품이었다.
음악 또한 서정적인 맬로디, 초연 때 김형석 작곡의 메인 멜로디, 현태의 아리아 ‘친구여’가 직.간접적으로 다양하게 사용됐다. 캠퍼스의 봄과 민우와 다혜의 테마, 아버지의 넘버에서도 이를 영리하게 활용한 신은경 음악감독의 진취적이고 과감한 작.편곡을 통한 드라마의 정서나 동시대적인 리듬의 변화를 통해 음악적 볼륨감으로 풍성하게 거듭나게 해, 드라마와 캐릭터의 정서와 상태를 생동감 있게 이끌었다.
배우들 또한 동시대 모든 세대들을 배려한 메인 캐릭터에서의 아이돌 급부터 실력 있는 전천후 뮤지컬 배우들의 열연으로 작품의 예술성과 작품성은 물론이고 대중성을 골고루 안배하며 작품을 이끌어 갔다.
민우 역의 인성 배우는 아이돌이지만, 그동안 수차례 뮤지컬을 해 왔던 터라 이번 작품에서도 최선을 다해 열연하며 또렷한 음색과 전달력으로 작품의 중심을 잘 잡아 주었으며. 현태 역의 세븐 또한 그동안 다양한 뮤지컬 작업의 경험과 성실함으로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로 극적인 정서를 리드하며 캐릭터의 변화에 대한 당위성을 구축했다. 또한 어느새 아버지 역으로 분한 서영주 배우는 노련하고 안정적인 연기와 가창으로 노련하게 드라마의 중심축을 잘 잡아 주었다.
특히 이번 무대에서 주목 받은 다혜 역의 임예진은 뮤지컬 배우로서 출중한 가창력과 청아하고 소녀 같은, 순수하고 앳된 외모로 역할을 제대로 살려냈다. 더불어 로라킴 역의 주아 배우는 완숙한 베테랑 뮤지컬 배우답게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열정적이고 거침없는 가창의 완급조절과 당찬 극태로 작품의 정서와 캐릭터로의 몰입도를 완벽하게 구축해 냈다.
겨울에 딱 어울리는 뮤지컬 <겨울 나그네>와 함께 세대를 불문하고 눈 내리는 겨울이면 떠 올릴 수 있는 순수하고 서정적이며 볼거리 가득한 아름다운 창작뮤지컬의 매력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