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New York Live Arts ‘Fresh Tracks’
- 뉴욕의 젊고 푸른 춤
[더프리뷰=뉴욕] 하영신 무용평론가 = 관찰컨대 한 시절 뉴욕 컨템퍼러리댄스의 주요 두 근거지는 조이스씨어터(Joyce Theater)와 뉴욕라이브아츠(New York Live Arts, NYLA)였다. 첼시의 같은 블록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지만 양 극장으로부터 산출되는 춤들은 뉴욕 컨템퍼러리댄스계의 다른 층위를 채우고 있다. 조이스가 세계와 미국 전역으로부터 이미 검증된 단체와 작가를 순환시키는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면 NYLA는 뉴욕 무용예술계 아방가르드의 역사적인 현장 세인트 막스 처치(St. Marks Church)에 소재한 댄스페이스프로젝트(Danspace Project),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가세한 바리시니코프아트센터(Baryshinikov Art Center)와 더불어 뉴욕을 근거로 활동하는 신예들을 양성하고 있다. <<Fresh Tracks>>는 NYLA가 연례행사로 선보이는 젊은춤 지원사업. 올해는 지난 5월 17일과 18일 양일에 걸쳐 줄리아 안티노찌(Julia Antinozzi)· 리오니 가르시아(Liony Garcia)· 빈슨 프랠리(Vinson Fraley)· 시마라 사리아(Symara Saria) 등 신진 안무가 네 명의 신작을 선보였다.
올 해로 59번째 트랙을 기록하는 이 행사의 전신은 뉴욕시가 1965년부터 자체적으로 실행해왔던 ‘Dance Theatre Workshop’. 초기 경력 안무자들을 위한 육성 프로그램이었던 DTW는 ‘Studio Series’ ‘Choreographers Showcase’ 등의 타이틀을 거쳐 1982년 오늘의 ‘Fresh Tracks’로 안착되었고 2012년부터는 빌 T. 존스(Bill T. Jones. 인종, 성, 권력, 환경 등의 아젠다를 다루어 일명 '안무선동가’라 불리는 빌 T. 존스는 그 자신 1977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DTW를 통해 뉴욕 무대에 데뷔했었다)가 이끄는 NYLA로 이관되어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빌 T. 존스는 물론 케네스 킹(Kenneth King) 등의 작가를 발굴 지원하며 미국 현대춤 미학의 고랑을 매온 한편 안 테레사 드 케에르스매커(Anne Teresa De Keersmarker) 등 유럽의 선구적 안무가들을 소개하며 미국 춤 지형을 충격해온, 말 그대로 미국 춤 씬의 ‘fresh’한 한 ‘track’.
8개월에 걸쳐 각각 50여 시간의 스튜디오 공간과 5천 달러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탄생한 올 해의 신작 네 편 중 첫 번째 무대로 소개된 작품은 줄리아 안티노찌의 <Third Variation>. ‘변주 (variation)'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바 발레 근간으로부터 채굴된 동작구 배열이고 이러한 계열의 작품이 그러하듯 내용적으로는 ‘무제(untitled)’적이다. 작품이 개시되면 업스테이지 상수로부터 여자 무용수 한 명이 촛불을 들고 걸어나와 다운스테이지 중앙에 놓인 의자에 촛불을 내려놓고 왼발을 앞으로 딛은 깊숙한 린지 자세로 양팔을 위아래로 흔든다. 업스테이지에 맺히는 그림자와 더불어 펼쳐지는 동작구는 선(線)이고 분절적이고 반복적이다.
이어 남성 2인무, 여성 2인무, 혼성 4인무 등이 교차 진행되었다. 그 사이 누군가는 변별적으로 검은 아우라의 복장을 입었고, 막바지쯤 조명은 바닥에 사각형의 공간을 구획했다가 거두는 등 일단의 시너리(scenery)적 변화가 연출되었으나 애초의 촛불과 의자로부터 일련하는 흐름들은 어떤 독해의 여지를 생산하지는 못한다. 동작구의 미감과 역학 또한 상투적. 차라리 특유의 미감, 특유한 역학을 겨냥하는 리서치로 20여분을 채웠으면 좋았을 것을. ‘variation’과 ‘untitled’는 모더니즘의 과제였고 이 계열 춤의 인물로는 루신다 차일즈(Lucinda Childs)가 독보적이다(<더프리뷰> ‘Dance Reflection New York edition, 첫 번째 이야기’ 참조). 줄리아는 루신다가 그어놓은 구역 안쪽에 너무 안전하게 있는 듯하다.
리오니 가르시아의 <Fantasy Punctured>는 소셜미디어가 방사하는 이미지가 삶의 내역을 점유하는, 말하자면 일찍이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에 의해 예견된 시뮐라시옹(simulation)의 세계를 그렸다. 모노톤 일상복을 입은 남성 무용수가 무대에 놓인 컬러풀한 알루미늄박지로 만든 긴 실타래를 흔드는 탈구적인 움직임으로부터 작품은 시작된다. 이어 노란색, 분홍색, 보라색 복장의 여성 무용수들이 가세한다. 그들은 따로 또 같이 무대를 점유하지만 그들 혹은 그들의 춤은 시종 관계성이 탈락된 채로다. 주관, 개성, 정체성, 뭐라 부르든 자신에 대한 주장은 확고해지고 연애, 결혼, 기타의 연대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작금의 삶의 양상 그대로다. 그러나 관계맺음으로써 세계에 개연하지 않는 주관은 기능 가능한가, 아니 실존 가능한가.
후반부에 한 여성무용수는 메탈릭 컬러의 풍선을 들고 앉아 칼로 긋는다. 현대인들이 지닌 꿈, 망상의 상징물, 풍선은 칼로써도 터지지 않는다. 다른 색상의 풍선이, 그를 그으면 또 다른 색상의 풍선이, 풍선이 풍선으로 대체된다. 소셜미디어의 세계처럼, 그에 밀접해진 동시대 삶의 환경처럼 이미지는 이미지들의 고리 속으로 미끄러지고 그에 결착된 욕망 역시 욕망의 환으로 다만 연쇄할 뿐이다. 실재의 내역은 감추어졌거나 왜곡되었거나 탈락되었거나 아무튼 편집된 왜상들이 실재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그리하여 보드리야르가 말한 바 파생실재 ‘시뮐라크르(simulacre)’가 리얼한 삶의 현장을 재편하는, 그 시뮐라시옹의 세계에 대하여 리오니 가르시아는 ‘판타지’라는 진단을 내린다. 가르시아에게 판타지는 지옥의 다른 이름이다. 검은색 망토, 사자(使者)의 복장을 하고 그는 바닥을 기어 다닌다.
동의한다. 판타지의 세계는 엄연히 우리의 리얼한 세계로부터 대상적으로, 결국엔 비현실적으로 있을 뿐이다. 그것은 현실이 건재할 때 향유 가능한 부가가치다. 소셜미디어가 제시하는 세계의 실체적 내부는 풍요롭지도 않을뿐더러 결국엔 허상과 허구다. 그것이 주장하는 네트워킹은 기능 불발이거나 역기능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다만, 진단은 이미 충분하다. 어떻게 살자고, 회복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작품들이 보고 싶을 따름이다.
이어지는 빈슨 프랠리의 <Alluvium>도 실존의 문제를 다룬다. 생소한 제목자는 ‘지질학적으로 현재에 가장 가까운 새로운 지질시대에 퇴적된 지층’에 관한 세부 명칭이라고. 업스테이지 전면 가득 퇴적의 무늬를 담은 동영상이 채워지고 상의를 탈의한 차림의 빈슨 프랠리의 탁월한 몸이 누워 있다. 판도라나 캘빈 클라인의 광고모델로도 활동한 바 있다는 경력이 말해주듯 원톱 조명이 비추는 빈슨의 몸은 마치 청동으로 주조된 고대 조각상들의 근육을 지녔다. 특별히 잘 훈련된 몸임이 틀림없다. 이 작품의 관건은 동시대 인간 전체를 대리할 빈슨의 몸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내적충동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사유를 얼마만큼 담지하고 끄집어낼 수 있는 몸인가일 터.
“looking for the rest” 거듭되는 속삭임으로부터 실존에의 탐구가 시작된다. 아마도 그의 문제의식은 컨템퍼러리댄스계 한 섹션에 관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안드레 레페키(André Lepecki)가 만연시킨 무용계 내 어떤 의식에 개연하는 듯하다. 뉴욕대학교 공연예술학부 교수이며 에세이스트이자 드라마투르그로 활동 중인 안드레 레페키는 주저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 Exhausting Dance : Performance and the Political of the Movement』에서 동시대 안무의 과업은 “몸을 통해 주체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라 주장한다. 이때 비판적으로 다시 사유되어야 하는 몸은 ‘(노동 생산성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임을 강요하는 근대성에 포획된 몸’, 그러므로 그는 근대적 춤(발레)에 대하여 ”어떻게 몸이 그토록 스펙터클하게, 효과적으로, 자족적으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라는 각도의 정치적 의혹을 제기한다. 그에 반하여 발레 혹은 무용극 등 근현대적 춤들이 춤의 순간보다는 서사, 재현적 마임으로서의 진행이고 비견하여 동시대의 춤 컨템퍼러리댄스야말로 실존을 현전시키는 대목들의 함유량이 높다고 판단하는 나로서는 레페키가 주목하고 애정하는 작가들(윌리엄 포프엘· 브루스 나우먼· 제롬 벨· 자비에 르 루아· 트리샤 브라운· 라 리보)의 작업이 생명성, 항진적이든 정지에 가깝든 어쨌든 살아서 호흡중인 몸성을 극명히 드러내는 춤의 본질적 매체성에 대하여 너무 해체적이라 생각해왔다.
빈슨 프랠리도 그들의 앞 세대와는 다른 판단을 했다. 그의 잘 훈련된 근육들은 충분히 바닥을 기고 구르고 직립하고 보행하고 도약하여 현재적 삶의 양태들을 표현적으로 표출해내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가공할만한 것이거나 혹은 우리가 미처 감지해내지 못하던 층위를 캐는 일이 아니었어서, 그리고 퇴적층 혹은 물결의 일렁이는 동영상 내 움직임 역시 익히 봐오던 이상의 무언가는 아니었어서, 나는 정지나 휴식에 관한 격렬한 욕구를 느끼지 못했고 그러므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의 진의 혹은 생에 보완적인 휴식, 수면 그리고 그 모든 종착의 죽음을 새삼의 경외심으로 맞닥뜨릴 순간도 없었다. 후반부에 그는 투명아크릴로 만든 의자를 들고 나와 앉았고 비로소 당도한 휴식은 그 의자처럼 패셔너블하지만 흔한 바로 그 감도였다.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시마라 사리아의 <Batty Juice>는 흑인 여성 트리오의 춤. 아직은 공존과 연대의 전통을 유지해내고 있는 흑인 커뮤니티 일원으로서의 삶이, 그리고 공적 제도와 공공선이 와해되어가고 있는 동시대 풍조에서의 삶이 교차한다. 무대에는 알록달록한 컬러의 그 무엇으로 재인할 수 없는 작은 조형물 다섯 점이 놓여있다. 꼬이고 흐르는 천의 질감과 깃털 장식으로부터 특유의 어떤 초과적 힘이 느껴지는 오브제, 더불어 다른 박자들로 겹쳐지며 시간을 중첩시키는 초침소리들이 흘러다니는, 어떤 정신적 영역으로부터 한 명씩 나름의 춤을 구동해내기 시작한다.
다중적 초침소리에 가세하는 멜로디, 빗소리와 천둥소리, 고음역대의 휘파람소리, 그리고 각자의 자율적 충동으로서의 춤. 카오스적 현실에 처한 각자의 생존적 역능으로서의 춤은 강렬해지고 거세어진 후 응당 무기력으로 잠긴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연대가 필요한 순간은 온다. 흑인 전통의 찬가가 깔리면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여 어떤 벽을 넘어서보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현재적 삶이 그러하듯 연대는 불발되고 아무도 그 벽을 넘어서진 못한다. 누군가는 불구적 몸이 되고, 누군가들은 그를 질끈 눈감고 자신의 삶을 간신히 살아내고. 춤들이 열렬할수록 코끝이 시큰해진다. 나의 삶, 당신의 삶. 그들은 “We’ll go” “Come on” 관객을 선동함으로써, 조명을 관객석으로 투사하며 연대에의 의지를 부추김으로써 작품을 마무리했다.
극복과 상생을 말하는 젊은춤, 익히 보아온 상투여도 새삼 반갑다. 그나마를 말하는 작가들과 작품들을 만나기도 어려워진지 오래. 갈수록 공교해지는 현실에 비해 춤들은 다만 엄살하거나 각자도생을 말하거나 최음적 위락을 구해왔다. 현실을 뚫고나갈 전복적 상상, 이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희구(希求)는 젊은 예술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젊은춤으로부터 어떤 날카로운 전망을 발견한 기억이 멀다. 최근 우리나라 지역에서 봤던 젊은춤 제전에서 느꼈던 문제의식과 겹친다. 30주년을 기리기 위한 출신 선배들의 축하공연 그러니까 연배 상이나 안무경력 상 오늘의 뉴욕 작가들과 이력이 비등한 세대의 춤들을 한 무대에서 몰아보았는데, 그랬다, 글로벌 시대 얼추 비슷한 삶, 여기나 저기나 할 것 없이 위독한 정치적·경제적·환경적 위기에 놓인 생들은 한결같은 개인적 불안, 공포, 고독, 외로움을 토로한다. 근 반세기에 달하는 컨템퍼러리댄스들이 다뤄온 줄곧 같은 주제들.
우리의 젊은춤 중 한 편은 탈춤에의 연원이 깊었는데, 신랄한 풍자가 핵심미학이었던 탈춤이건만 과거의 양반들은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전망을 흐리고 훼방하는 대상들과 사건들은 감추어진 채였다. 그런가. 소셜미디어 풍조가 이미 만연했기 때문에, 어차피 착취와 피곤을 부추기는 사회가 시스템으로 굳어진지 오래기 때문에, 누구나가 고립된 채 연대가 불발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불의와 불안을 감당할 도리밖에 없는 것일까? 자유를, 평등을, 희망과 사랑을, 연대를, 포장지만 남은 구호들의 진여(眞如)와 실천을 불러올 신랄하고 불편한 젊은 예술가들, 빌 T. 존스의 후예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