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간조어객의 그림과 화제(畵題)-4] 김명국의 '천붕지통(天崩之痛)'

- 하늘이 무너져 내리다.

2024-10-12     안국진 미술칼럼니스트

[더프리뷰=부산] 안국진 미술칼럼니스트 = 먼저 화제부터 살펴보자.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을 만드는데,

그림으로 모습을 그릴지언정 어찌 말로 전하랴?

세상에 시인이 많다지만,

자신의 흩어진 혼은 누가 불러 주는가?

將無能作有, 畵貌豈傳言, 世上多騷客, 誰招己散魂.

앞의 두 구절은 《주역》 <계사전>으로 알 수 있다. “글은 말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성인들은 상징[象]으로 그 뜻을 다 드러낸다."  즉,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려 글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하지 못하던 것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이 그림의 상(象)으로 그림 속 주인공이 가진 배경이나 뜻을 모두 드러냈다는 말이다. 셋째 줄에 나오는 ‘소객(騷客)’은 원래 <이소(離騷)>를 지은 굴원(屈原)을 말하지만, 나중에 시인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다음으로 ‘혼을 부른다[招魂]’라는 것은 원래 죽은 자를 붙잡기 위한 남은 자의 처절한 외침이지만, 산 사람의 넋을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화제는 연담이 다른 그림에 쓴 서체와는 흘림이나 내려 쓰는 방법이 달라 보인다. 또 화제를 쓴 종이는 뒤에 누군가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상단의 화제는 이 그림을 본 다른 사람의 아주 좋은 감상이지, 연담이 직접 쓴 글이라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림을 살펴보면 겉옷의 허리를 바짝 조여 묶고 왼손에 대나무 지팡이를 비스듬히 들고 선 사람의 슬픈 뒷모습이다. 머리에 수질(首姪)은 없으나 두건을 썼고, 허리를 뭔가로 묶었으며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으니 상을 당한 사람의 모습이 맞다. 우리나라의 전통복장에서 겉옷을 저렇게 메어 묶는 것은 상을 당한 경우 말고는 없다.

《예기》 <문상(問喪)>에 “부친상에는 저장(苴杖)을 짚으니 저장은 대나무로 만들며, 모친상에는 삭장(削杖)을 짚으니 삭장은 오동나무로 만든다." 하였다. 그러니 상을 당했다면 아버지를 여읜 것이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우리 전통의 상복과는 완전히 다르다. 옷단이 검은색인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선비의 평상복인 학창의(鶴氅衣)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저 그림은 분가하여 따로 살다가 아버지의 부고를 듣자 상복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채 평소 입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두건으로 머리만 가리고 허리에 교대(絞帶)를 묶어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림은 간결하고 속도가 빠르다. 옅은 먹을 듬뿍 찍어 거친 필치로 지나간 몇 개의 선과 담묵이 옷단의 전부다. 그러면서도 어디 하나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이 완벽하다. 그림 속에 처진 어깨가 보이고, 막막한 죽음의 그림자도 보인다.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부모님 돌아가신 고통을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했다. 그 비통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림 속에 있는 사람의 옷자락이 앞으로 삐쳐나간 모습이 앞으로 걷다가 섰다는 느낌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가다가 그 슬픔과 아픔에 잠시 멈춰 선 것처럼 보인다.

그림 속에는 정말 처연한 모습을 한 사람이 두건을 씌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은사도(隱士圖)> 알려졌던 연담의 그림이다. 흔히 “대지팡이 짚으며 어디론가 가는 은일자”라거나 “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화가 자신을 표현”했다고 설명한다. 유홍준은 <화인열전>(2001)에서 “상복(喪服)을 입은 채 지팡이 비껴 잡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자의 뒷모습을 그린 것인데 그림 위쪽에 마구 흘려 쓴 화제를 보면 저승으로 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며 '죽음의 자화상'이라 불렀다. 그런데 위에 쓴 글씨도 연담의 글이 아니며, 이 그림 속의 사람이 정말 저승으로 가는 모습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에서 사람이 죽으면 저승사자가 와서 데리고 가지, 망자가 직접 막대기를 들고 황천이나 북망산으로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망자가 스틱스 강을 건너는 사후 여행은 그리스에 바탕을 둔 유럽 문명에나 있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