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장승헌 공연기획자 =
이데일리문화대상 무용부문 수상작, 허창열의 <탈,굿>
지난 10월 만추, 제11회 이데일리문화대상 무용부문 최우수 수상작으로 허창열의 <탈,굿>이 선정되었다. 필자는 심사위원 중 최연장자란 이유로 여배우(진세연)님과 함께 공동 시상자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섰다. 허창열 <탈,굿>의 모태인 고성오광대가 올해로 국가문화유산 지정 60주년을 맞았으니 더 의미가 있었다. 일각에서는 "연희종목이 무용부문 최우수작이라니..."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탈춤이 대한민국 전통춤 범주에 있는 한 심사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현재 전국의 탈춤단체는 13개이다. 이들이 ’연희‘라는 이름 아래 무용장르와 국악장르의 경계선에 머물러 있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경상도 춤의 대명사인 ’덧배기 장단‘과 ’배김새‘는 영남춤 특유의 흥과 신명의 이중적 미학의 정서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서민들의 애환과 해학, 그리고 흥겨운 놀이정신이 담긴 탈춤이나 야류 등, 이렇듯 마당춤에서 영남춤의 특색들을 볼 수 있는 만큼 이들은 전통춤 계열에 당당히 진입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이번 수상자 허창열의 <탈,굿> 심사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필자는 독일에 있었다. 뒤셀도르프 탄츠하우스를 중심으로 격년 개최되는 탄츠메세 참관과 20세기를 대표한 최고의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15주기 묘소 참배를 위한 여행 중이었다.
지난 8월 1일 국가무형유산원 한국문화의 집 (KOUS)에서 공연된 허창열의 <탈,굿>은 허창열의 첫 개인공연이었다. 그의 명성으로 보나 지난 행적들을 볼 때 첫 개인공연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이번 작품은 경상도 덧배기춤과 전 5과장 탈춤의 순서를 달리하며 허창열의 창의적 요소가 더해졌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연희전공 동기 동창들인 황민왕(음악감독, 남해안별신굿 이수자) 강민수(진도씻김굿 이수자), 그리고 동해안별신굿 이수자(여성무당 역)와 현장 연주자까지 합세해 허창열의 개인공연을 위해 마음을 나누어 주었다. 마을공동체 두레의 정신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모인 9명의 출연진은 그간의 경력으로 쌓인 여유로움을 바탕으로 관객과 호흡을 맞추며 현장성을 더했다. 객석에서는 박수와 웃음 그리고 '얼쑤’ ‘좋-다!’ 등 추임새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공연장은 어느새 흥겨운 잔치자리가 되어 있었다. 이날 무대 마지막에는 허창열의 스승 이윤석(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선생과 문둥북춤 이수자 이태영 님이 함께 무대에 올라 가슴 뜨거워지는 ‘춤의 고을 고성사람들’의 정을 나누는 모습이 다시금 먹먹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이번 작품은 고성오광대 탈춤의 확장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춤적 요소와 더불어 해학의 정신을 보여주는 등 작품 구성과 제5과장 이후 에필로그로 이어지는 상여놀이 없이도 오롯이 음악 반주만으로도 밀도 높은 고성 탈춤과 패기만만한 중견 전통예술가들의 내공, 그리고 그간 켜켜이 쌓아온 재능을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내년 2025년에는 국립부산국악원이 주최, 주관하는 <제8회 영남춤축제- 춤, 보고 싶다>를 통해 허창열의 <탈,굿>이 멀리 남녘 경상도 마당춤의 해학과 흥과 신명의 기운 넘치는 탈춤의 풍경을 지역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자리가 다시 또 만들어지길 희망해 본다.
김현태 <강물이 비로소 큰 길을 열었다>
지난 11월 26일 대구오페라하우스 무대에서 마주한 중견 남성무용가 김현태(정길무용단 대표, 계명대 교수)는 영남지역의 대표 남성무용수이자 안무가로 다채로운 활동의 이력을 소지한 인물이다. 지역 무용인들의 절대적 감소로 인해 부산을 시작으로 사립대학 무용학과 폐과가 도미노처럼 각 지역 무용생태계를 붕괴시키고 있는 속에서 김현태는 정길무용단을 설립, 운영하며 대구지역의 무용 활성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 이번에 공연된 정길무용단 제15회 공연 <강물이 비로소 큰 길을 열었다> 역시 그의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번 공연은 이육사 시인의 저항정신과 예민한 시적 감수성이 깃든 시들을 대본으로 재구성 해 다섯 장면의 주제로 안무했다. '광야' '삶의 시작' '상실의 계절' '존재의 이유' 그리고 제5장 '마지막 불꽃'에 이르기까지 촘촘한 춤 대본이 눈에 먼저 들어 왔다. 중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광야> 그리고 <고목>과 낭만적 분위기 흠씬 풍기는 <청포도> 등 오랜만에 만난 이육사의 대표작들은 잠시나마 필자에게 1970년대의 감수성과 초심의 문학소년 모습을 소환시키기에 이르렀다.
음악작곡(김희준) 무대미술(구동수) 의상디자인(이경연) 조명디자인(백승동) 연출(최두혁) 등 지역 스태프들과 함께 작업한 이번 작품은 영상 사용 없이 특유의 질감의 미장센과 오브제, 그리고 근대시기를 떠올리는 의상 빛깔 및 결의 느낌까지도 넘치지 않으면서 조화로움을 이루었다. 한편, 26명(첼리스트 포함)의 무용수들의 춤과 연기까지 어느 하나 튀지 않으며 완성도를 높였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 명절 때에 받았던 종합 과자선물 상자의 기억 소환을 비롯해 추억을 떠올려주었던 작품으로 2024년 하반기 한국창작춤 베스트(수작)라고 단언하고 싶은 마음이다. 지역에서 제작된 문화상품으로 시작되었지만 더욱 성장, 확장되어 K-Dance의 하나로 전국 순회공연은 물론, 해외 무대 진출까지도 도전해 볼 만하다고 예견해 본다.
마지막 소개할 공연은 전통춤꾼이며 안무가인 부산 출신
최지은(정신혜무용단 지도위원, 서울교방 동인)의 <살푸리>
이다. 동아대 출신 최지은은 이매방류 <승무> <살풀이춤>은 김명자 선생에게서 배웠고, 창작춤은 정신혜(부산 신라대 교수)무용단 주역 무용수로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익혔다. 이후 서울로 옮겨 서울교방 동인으로 김경란 선생의 가르침을 느리고 긴 호흡으로 학습하며 차세대 대표 전통춤꾼으로 성장했다. 지난 2021년 12월 5일 코로나 팬데믹 당시 ‘댄스 플렛폼 휘’라는 이색적 이름의 프로젝트 단체명으로 ‘한옥춤 시리즈1’ <춤, 한옥에 깃들다>, ‘한옥 시리즈2’ <춤, 레트로에 빠지다>를 통해 본격적으로 서울에서의 활동을 알렸다.
지난 11월 29일 복합문화공간 플랫폼엘에서 전통춤 재해석, 그리고 영호남 서로 결이 다른 <살푸리> 세 편을 영상과 함께 협업을 시도했다. 특히 김영길(아쟁 연주자) 음악감독이 이끄는 품격있는 현장 연주와 정가 이수자 김보라의 구음까지 더하며 우리나라 공연예술 형식의 근간인 ‘가무악 일체’를 보여주었다. 공간 전체가 모두 흰 색인 플랫폼엘에서 춤을 추겠다는 최지은의 얘기를 듣고서 내심 우려와 걱정의 마음으로 투덜거리던 필자의 편견이 와르르 무너짐을 직접 현장에서 확인했다. 그녀의 치밀한 준비와 탄탄한 기본기에 세 가지 빛깔 의상(디자인 이서윤)의 색감과 질감까지 더해져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첫 살푸리는 이매방류 국가무형유산 살풀이춤으로 주인공 최지은이 단아한 정서를 객석에 조심스레 건넨다. 조바위로 머리장식을 하고 저고리와 치마, 그리고 장삼까지 의상의 색감이 파스텔 톤의 영상과 어우러지는 가운데 남도 시나위 가락이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왔다. 사계절을 주제로 자연스런 연출까지도 이목을 집중시켰다. 봄을 지나 여름을 맞으며 <구음 검무> (박연주, 강선미)를 객석 앞뒤 무대에 배치한 원근감이 이색적이다. 역시 김보라의 구음이 서사를 담아 내며 집중력을 더 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살풀이춤은 김수악제, 김경란류의 <논개별곡>. 무대 우측에 25현 가야금(연주 박지현)과 그 옆 자리 콘트라베이스(연주자 노태헌)의 조율은 낯설면서도 조심스러운 협업의 완성도를 한껏 끌어올려 주고 있었다. 가을은 달빛을 닮은 창가에 일렁이는 갈대 영상과 함께 넉넉한 대금 연주(김선호)로 이어진다. 어느새 겨울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김영길 음악감독의 아쟁 소리가 처연하게 울음을 삼키게 한다. 문을 열고 담담한 모습의 최지은이 전북 남원의 예인 조갑녀제, 김경란류의 <민살풀이 춤>을 시작한다. 무대 중앙에 자리하고 고즈넉한 옛 권번의 법도에 따라 고개를 내려 인사를 건네자 바로 응답을 하는 소통의 마음이 저절로 열리고 있었다. 살풀이춤이야 말로 자신의 춤 인생과 추는 이의 마음이 진정성을 보여야 납득이 되는 여인의 춤이다. 최지은의 춤은 매우 단정하고 가슴을 아리게 하는 감성이 묻어 있었다. 특히 징을 치며 판소리를 근간으로 한 중저음의 남성구음(지명인)이 더욱 먹먹하게 만들며 객석, 곳곳 관객들의 눈가를 적시게 한다. 더욱 거세진 눈바람을 뒤로한 채 무심한 듯 뒤돌아 퇴장하는 뒷모습이 아련하게 잔상으로 남이 있었다. 동시대성이란 바로 이련 춤 풍경이 아닐까? 최지은의 <2024 살푸리>는 잠시 잊고 있던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뇌리에 강하게 인식시켜 준 시간이었다.
올해는 우리 근대춤의 시조 한성준 탄신 150주년이었다. 그래서인지 서울을 비롯, 전국 여러 지역에서 크고 작은 전통춤 공연들이 줄줄이 열렸다. 필자는 이미 선을 넘어 버린 공급과잉을 바라보면서 우려감을 피력하고 싶어진다. 궁중정재, 마당춤, 무속춤, 그리고 권번춤까지 모두 소중하고 귀한 우리 대한민국의 오래된 문화유산이다. 필자는 50대 이후, 실제 한 우물을 파고있는 찐(?) 전통춤꾼들의 마음을 존중한다. 그들은 연습실 혹은 무대 뒷줄 한 자리를 사수하며, 수만 번 반복 훈련을 하며 흘렸을 억겁의 시간과 땀, 그리고 눈물, 그리고 스승이 남긴 춤 유산의 의미까지를 기억하고자 노력 중이다. 그것이 근대춤 100여 년을 앞둔 시기에 더욱 우리춤에 대한 관심과 무대화가 곳곳에서 펼쳐진 이유이기도 할 것이리라.
오랜만에 쓴 이번 필자의 칼럼에서 언급한 고성오광대 탈춤꾼 허창열, 대구를 중심으로 꾸준히 한국창작춤(15편)을 짓고 있는 김현태, 그리고 영남춤의 본가인 부산 출신 최지은의 경우, 전통춤과 창작춤의 영역 확장을 도모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튼실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는 40대 중반 무용가들의 활동에 ‘춤은 경상도’란 오래된 가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다소간 친애의 마음을 담아 응원과 격려를 보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