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2024년 봄여름 뉴욕, Joyce Theater
[공연리뷰] 2024년 봄여름 뉴욕, Joyce Theater
  • 하영신 무용평론가(Young Shin Ha)
  • 승인 2024.07.22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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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현재, 여기와 저기, 월경(越境)하는 춤들의 집합소

[더프리뷰=뉴욕] 하영신 무용평론가 = 뉴욕에서 무용예술공연의 한 시즌을 통과한다는 것은 물량의 압박을 받는 일이고 동시에 춤의 다층위를 섭렵하는 일이다. 아메리칸 발레시어터(American Ballet Theater)와 뉴욕시티 발레단(New York City Ballet)이 일주일 단위로 대여섯 레퍼토리를 게다가 출연진을 바꾸어가며 꾸려내는 링컨센터(Lincoln Center)의 클래시컬 발레 씬도 어마어마하지만 첼시 예술구역에서 미국 모던댄스 무용단들의 과거와 현재를 존속시켜내고, 지금 미국 전역에서 산종(散種)하는 컨템퍼러리댄스를 교류시키는 조이스 시어터(Joyce Theater, 이하 조이스)의 역할도 상당. 1982년 개관 이후 매해 연간 45-48주간의 시즌을 꾸려 15만 명 이상 관객에게 다각도의 예술춤들을 선사하고 있는 조이스는 세계 무용예술을 불러들이는 뉴욕의 관문이기도 하다. 다양성과 포용력, 예술의 최고 가치가 여기서 실현된다.

photo by Eric Vitale, courtesy of The Joyce Theater
조이스 시어터 외관. (c)Eric Vitale, courtesy of The Joyce Theater

춤 관람을 목적으로 뉴욕을 방문하곤 하는 필자에게 조이스 시어터는 성지다. 조이스에 앉아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시어터(Alvin Ailey American Dance Theatre), 마사 그레이엄 댄스컴퍼니(Martha Graham Dance Company), 폴 테일러 댄스컴퍼니(Paul Taylor Dance Company), 리몽 댄스컴퍼니(Limón Dance Company), 트리샤 브라운 댄스컴퍼니(Trisha Brown Dance Company), 트와일라 사프 댄스(Twyla Tharp Dance) 등 모던댄스와 포스트모던댄스 시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유서 깊은 미국 무용단들의 과거와 현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파슨스 댄스(Parsons Dance)나 컴플렉션즈 컨템퍼러리발레단(Complexions Contemporary Ballet) 등 현시대 미국 춤의 세부적 상황, 그리고 허버드 스트리트 댄스 시카고(Hubbard Street Dance Chicago)나 알론조 킹 라인스 발레단(Alonzo King LINES Ballet) 등 다른 도시에 소재하는 국제적 명성의 미국 단체와도 만날 수 있었다

예술은 집을 떠나지 않고 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ART IS THE ONLY WAY TO RUN AWAY WITHOUT LEAVING HOME.” 건물 한 측면에 대문자로 대문짝만하게 새겨놓은 트와일라 사프의 어록처럼, 조이스는 곧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어차피 집은 떠나온 셈이지만 어쨌든 여건상 제2의 거주지라 할 수 있는 뉴욕에서 조이스를 부지런히 드나든 덕에 나는 이스라엘의 오하드 나하린(Ohad Naharin, Batsheva Dance Company) 등 세계적 명성을 지닌 작가들의 신작이나 북유럽의 폰투스 리드베리(Pontus Lidberg),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그레고리 마코마(Gregory Maqoma, Vuyani Dance Theatre)처럼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각 대륙 작가들의 문제작들, 혹은 일본 부토의 명가(名家) 산카이 주쿠(Sankai Juku)의 세대교체 등을 목도할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 자국과 타국, 월경하는 춤들의 집합소. 2024년 봄여름 시즌에도 조이스의 프리즘은 다채로웠다.

2024년 봄여름 시즌, 조이스가 애정한 자국의 춤들

3월 이른 봄부터 허버드 스트리트 댄스 시카고, 트리샤 브라운 댄스컴퍼니, 에일리 ll 등 쟁쟁한 단체들이 시즌의 포문을 열었지만 필자의 여정은 5월 중순 파슨스 댄스의 공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술감독 데이비드 파슨스(David Parsons)가 이끄는 40년 연혁의 파슨스 댄스(2004, 2011, 2012년 세 차례에 걸쳐 방한한 바 있다)는 데이비드 파슨스의 대표작 <Caught>(1982)<Whirlaway>(2014), 또 한 편의 단체 대표 레퍼토리인 로버트 배틀(Robert Battle)<TAKADEME>(1996) 등 기존작에다 데이비드 파슨스의 신작 <The Shape of Us>와 신세대 미국 안무가들에게 의뢰한 두 편의 신작, 자마르 로버츠(Jamar Roberts)<Juke>(초연작)와 페니 손더스(Penny Saunders)<Thick as Thieves>(2023)로 단체의 건재를 알렸다. 스트라보 조명과 6분간 1백 여 차례의 점프로 가시성과 비가시성, 환영과 실존, 유희성과 예술성 사이를 파고든 <Caught>가 여전히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다양한 민족 커뮤니티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는 뉴욕, 이 시즌 조이스가 선정한 민족춤은 플라멩코였다. 국제적 명성의 플라멩코 예술가(플라멩코는 손뼉과 발구름 그리고 캐스터네츠 등 손 악기와 몸의 악기적 연주가 지배적인 악가무일체(樂歌舞一體)형 연행이므로 특별히 무용가라는 칭호가 적합지 않다고 생각한다)인 카를로타 산타나(Carlota Santana)1983년 뉴욕을 근거지로 설립한 단체 플라멩코 비보 카를로타 산타나(Flamenco Vivo Carlota Santana)는 소속 예술가 에밀리오 오찬도(Emilio Ochando)의 신작 <EQUILIBRIO(Clásica/Tradición)>의 미국 초연으로 조이스의 무대를 달궜다. 아홉 명 예술가(세분하자면 여섯 명의 무용가와 세 명의 음악가)의 열세 곡 연주와 노래와 춤. 간단한 장치와 연기로 장면 지음으로써 동시대 무용예술의 미학관을 성취한 작품의 연행 내내 객석에서는 연신 “Ole!” 축포처럼 추임새가 터져나왔다

 

Flamenco Vivo Carlota ‘Equilibrio’ © Steven Pisano
Flamenco Vivo Carlota ‘Equilibrio’ ©Steven Pisano

미국 모더니즘 춤계의 큰 이름인 폴 테일러가 설립한 폴 테일러 댄스컴퍼니의 예술감독 마이클 노박(Michael Novak)625일에서 30일까지 선보인 이번 정기공연을 모두 폴 테일러의 작품으로만 채웠다. 안무가의 유산을 짊어진 단체들이 대개 유작들로 이루어진 프로그램과 후대 안무가의 작품 혹은 신진 안무가에게 의뢰한 신작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을 하루씩 번갈아 공연하는 관행과 달리 창립자의 유작으로만 채워진 이번 <<Extreme Taylor>>는 각별한 기획이었다. 동시대에 창발하는 춤에 관심이 기울어져 있는 나로서는 공연예술이 과연 아카이빙만으로도 현재적 의미를 생성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갖고 바라본 공연이었다.

프로그램 A에는 <Private Domain>(1969) <Duet>(1964) <Big Bertha>(1970) <Airs>(1978), 프로그램 B에는 <Runes>(1975) <Post Merdian>(1965) <Brandenburgs>(1988) 등 그의 주요 작품이 배열되었는데 이틀에 걸쳐 두 프로그램을 관통하고 나니 모더니즘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미학일반의 큰 흐름을 관망한 듯했다. 인간과 공동체의 내면 탐구와 그 파토스의 방출로부터(<Runes><Post Merdian>) 사회 시스템과 상징계의 귀속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 익명화되고 기호화된 개인들의 단자적 운동과 그 총합으로서의 세계(<Brandenburgs><Airs>)로의 흐름. 사유 방점의 시대적 변천과 그에 결합하는 미학관의 변동, 즉 뜨거운 추상에서 차가운 추상 혹은 표현주의에서 물리적이고 운동역학적인 범주로의 미학적 전이가 선명히 감지되었다.

Paul Taylor ‘Private Domain’ © Steven Pisano
Paul Taylor ‘Private Domain’ ©Steven Pisano
Paul Taylor ‘Big Bertha’ © Ron Thiele
Paul Taylor ‘Big Bertha’ ©Ron Thiele

특히 다운스테이지에 세 개의 네모난 문틀을 뚫어놓은 가벽(Alex Kartz의 세트)을 설치해놓고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넘나든 <Private Domain>에는 컬래버레이션, 현전과 부재, 감각과 상상과 사유 등 동시대 춤의 키워드들이 이미 매설되어 있으니 그 전위성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나는 작품은 아케이드, 전람회와 더불어 초기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상징적 이미지인 위락놀이시설을 배경으로 미국 중산층 가정의 몰락을 그린 <Big Bertha>. 감시자이자 종용자인 빅 브라더 광대, 가장의 실패와 좌절, 그럼에도 증폭하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허영, 해체되고야 마는 가정, 그에 동반되는 광기와 가학과 심지어는 소아성애의 장면까지, <세일즈맨의 죽음>의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비판적 시선을 지닌 춤작품의 세계관도 흥미로웠고 그 속에서 파열하는 춤들의 강도도 인상 깊었다. 재현적인 춤과 추상적인 춤 그 각각의 한계를 초월한 작가의 온전한 발화로서의 춤은 각 공연의 말미를 장식한 추상적인 군무작들과 대별되는 층위의 춤이었는데, 이는 지금 이 시절에도 유효한 담론을 제공하는 작품이기도 하였거니와 개인적으로는 폴 테일러라는 이름으로는 기억되지 않았던 새로운 장면의 발굴이기도 하였다.

컨템퍼러리발레 씬의 단체로는 샌프란시스코를 근거로 30주년의 연혁을 달성한 스무인 컨템퍼러리발레단(Smuin Contemporary Ballet)이 선정되었다. 모두 단체의 오리지널 레퍼토리로 이루어진 트리플 빌이었는데 세 작품 공히 단체의 너른 스펙트럼을 투사했다. 첫 무대를 연 발 카니파롤리(Val Caniparoli)<Tutto Eccetto Il Lavandino>(2014)는 컨템퍼러리발레'라는 단체의 정체성을 선언하는 작품이었다. 군무진으로부터 출발하여 듀엣과 앙상블의 단위 조립을 거쳐 군무진으로 마감되는 작품의 세부사항은 클래식 치고는 꽤나 리드미컬하고 역동적인 비발디(Antonio Vivaldi) 음악에 상응하는 운동역학의 방출이었다. 그러나 춤과 동선의 인상이 여전히 네오클래시시즘의 선형(線形, lineal)적이고 대칭적인 미감과 극도의 추상성에 갇혀 있다. 중반부에 삽입한 남성 군무진의 한숨짓고 울먹이는 짧은 연기 씬과 대미에 무용수들의 퇴장에 맞물려 무대로 이끌려 들어오는 파란색 수지의 싱크볼 오브제 미장센은 아마도 컨템퍼러리발레의 컨템퍼러리즉 동시대의 어떤 경향들을 보충하고자 하는 시도였던 것 같은데, 작품 내부의 산발적인 씬들이 내용적으로 어떠한 맥락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싱크대를 제외한 모든 것 Everything But the Kitchen Sink'이라는 제목자만큼이나 생뚱맞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짧은 인터미션 후 전개된 두 번째 작품은 곧 단체의 새로운 예술감독으로 부임하게 될 에이미 세이워트(Amy Seiwert)<Renaissance>(2019). 무대 하수 업스테이지에 드리워진 세 폭의 황금빛 발(葭簾, tapestry)과 애절하고도 강렬한 동유럽 민속음악(Kitka Women's Vocal Ensemble)으로 채워진 바탕적 세계에서 열다섯 무용수들은 삶의 원형적 층위의 서사, 지배와 피지배적 관계들에 의해 빚어지는 비애와 연대와 해원(解冤)의 과정을 일구어낸다. 안무적 내역과 장면들, 무용수들의 연행이 생(), 살아낸다는 것의 심도를 다시금 체득케 해주는 깊은 작품이었다.

Smuin Contemporary Ballet ‘Renaissance’ © Chris Hardy
Smuin Contemporary Ballet ‘Renaissance’ ©Chris Hardy
Smuin Contemporary Ballet ‘Tupelo Tornado’ © Chris Hardy
Smuin Contemporary Ballet ‘Tupelo Tornado’ ©Chris Hardy

역시 짧은 인터미션 후 프로그램을 마무리한 작품은 단체의 최신작인 아나벨 로페스 오초아(Annabelle Lopez Ochoa)<Tupelo Tornado>(2024), 로큰롤스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삶이 수월히 추정되는 유희성 작품이었다. ‘Hound Dog’‘Love Me Tender' 사이, 유명인사의 것으로써 극명히 대유되는 삶의 명과 암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상의 어수선한 풍경이 위트 있게 그려졌다. 첫 번째 작품의 품위와는 너무 먼 대별적인 작품이라 단체의 경계 없는 기량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제는 더 이상 발레로 재인되지 않는 컨템퍼러리발레에 대한 어떤 우려가 상기되기도 했다. 특히 이 경우처럼 자기발화적이지 않을 때 컨템퍼러리발레 작품은 컨템퍼러리댄스 범주에서 낙후성을 지적받기도 한다.

2024년 봄여름 시즌, 조이스가 초청한 타지의 춤들

이번 2024년 봄여름 시즌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유럽의 작가는 북아일랜드의 우나 도허티(Oona Doherty)였다. 에딘버러 프린지(Edinburgh Fringe, 2017 Total Theatre Award 수상)와 베네치아 무용 비엔날레(Biennale de Danza di Venezia, 2021 Silver Lion 수상)를 휩쓸며 특유의 저항적 사고와 탈구적 표현방식으로 주목 받고 있는 이질적 작가 우나 도허티는 6월 첫째 주 <Navy Blue>로 조이스 데뷔를 치렀다.

Oona Doherty ‘Navy Blue’ © D. Matvejevas
Oona Doherty ‘Navy Blue’ ©D. Matvejevas

개인적으론 작년 몬트리올의 트랑스아메리크 축제(Festival TransAmériques, FTA)에 이은 두 번째 관람인데 472석 규모 조이스 중극장 무대에서의 감응이 훨씬 깊었다. 우울과 무력감과 죽음의 공포를 시전한 열한 명(FTA에서는 열두 명) 연행의 밀도는 시종 뻑뻑, 인류 역사를 관통해온 죽음일반과 그에 연동하는 심리일반으로 느껴졌던 첫 관람은 지금에 횡행하는 익명적이면서도 오히려 빈번한, 죽음의 구체적인 동시대적 사태로 다가왔다. 재차의 관람이기도 하거니와 이 도시의 분위기, 다른 무대 규격에 맞추어진 어떤 포화 덕분인 듯도 하다.(작품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더프리뷰 ‘몬트리올 공연예술축전, 그 첫 번째 이야기참조)

그 다음으로 마주한 유럽의 단체는 네덜란드의 인트로단스(Intridans). 서울에서나 뉴욕에서나 친숙한 구면의 네덜란드 춤단체는 역시 네덜란드 단스테아터(Nederlands Dans Theater, NDT). 과거 서울세계무용축제(Seoul International Dance Festival, SIDance, 시댄스)에서 공연한 적도 있지만 나로서는 이제사 목격할 수 있었던 인트로단스는 네덜란드 정부가 국가적 자산으로 인정하고 있는 주요 무용예술 단체 중 하나라고 하는데(네덜란드가 정부 지원금으로 돌보는 무용단은 총 다섯 단체로 NDT와 네덜란드 국립발레단(Het Nationale Ballet), 스카피노 발레 로테르담(Scapino Ballet Rotterdam), 클럽 가이앤로니(Club Guy & Roni), 그리고 인트로단스가 있다. 클럽 가이앤로니는 2022년 제25회 시댄스를 통해 방한했었다. 더프리뷰 ‘25회 서울세계무용축제의 세 작품참조.), 과연 다채로운 작가군의 트리플 빌로 포진한 <<Energy>>6월 둘째 주 조이스는 열렬했다.

NDT처럼 발레로부터 컨템퍼러리댄스로 전향한 인트로단스는 고도의 테크닉에 기반한 강력하고 강렬한 기량과 표현력으로 일견 성향이 전혀 다른 세 작가, 아크람 칸(Akram Khan)· 루신다 차일즈(Lucinda Childs)· 마우로 비곤제티(Mauro Bigonzetti)의 작품세계를 능히 펼쳐내보였다.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추상에서 재현, 고도의 형식주의에서 질펀한 유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소화력의 예술성을 입증해보인 셈.

첫 번째 무대는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방글라데시 혈통의 안무가 아크람 칸의 <Kaash>. 우리나라에도 시댄스에서 처음 소개된 이래 서울국제공연예술제(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 SPAF), LG아트센터를 통해 수 차례 방문한 바 있는 아크람 칸은 무용예술 세부장르 간 횡단을 통해 자신만의 작가주의 언어를 발굴해내는 컨템퍼러리댄스의 이념적 기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 2002년 초연작 <Kaash>는 아크람 칸을 세계적 명성의 작가군에 합류시켰을 뿐 아니라 향후 그 예술적 행보의 단초가 되었던 주요 초기작이다. 서사와 영상에의 높은 의존도로 정작 춤의 역량은 현격히 축소되었던 가장 최근의 방한작 <정글북: 또 다른 세계 Jungle Book reimagined>(LG아트센터, 20221118-19일)의 아쉬운 관람을 위로할 만큼 춤작가로서의 정체성과 그 고유한 어휘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Introdans ‘Kaash’ © Filibert Kraxner
Introdans ‘Kaash’ ©Filibert Kraxner

막이 오르면 업스테이지 전면에 마치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색면추상화가 연상되는, 붉은 바탕 안쪽 상당 부분 경계선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검은색이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인도 태생으로 런던을 기반으로 회화와 조각 등 다방면에 걸쳐 세계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검은 안료로서의 완벽한 블랙이라는 그 문제적 반타블랙(Vanta Black)’을 창출해낸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장치다. 비록 그 반타블랙은 아니지만 미묘한 면적과 깊이의 변화로써 창조와 파괴, 발현과 소멸 사이를 제시하는 아니쉬 카푸어의 붉음과 검음은 아크람 칸 안무를 위한 완벽한 풍경이다.

플로어를 지배하는 백열빛과 더불어 섬세하게 뉘앙스를 바꾸는 아니쉬 카푸어의 바탕적 세계에 가세하는 박동적 퍼커션과 구음(口音), 초월적 감도의 종금(鍾琴), 그리고 간혹의 고요. 검은색 긴 치마 차림의 근원적 존재로 등장하는 다섯 무용수는 세트와 음향이 구현하는 세계의 운동에 긴밀한 존재론적 춤을 구동한다. 다리의 정교한 테크닉에 기반하는 서양춤 전통과 달리 인도의 전통춤 카탁(Kathak)으로부터 연원하는 아크람 칸의 안무는 섬세한 팔의 연기로 존재를 재현한다. 한껏 뻗어 세계를 가르는 두 팔, 구부러지고 꺾이며 내적 상태를 발화하는 손목. 선연히 다른 방식의 서사. 반복으로써 강화되며 존재론적 강밀도를 방출하는 동작구들은 일대 다, 앙상블과 군무 등의 구성을 거치며 작동하는 세계에 내속하는 존재들의 상태와 관계를 시전한다.

Introdans ‘Kaash’ © Hans Gerritsen
Introdans ‘Kaash’ ©Hans Gerritsen

일렬종대로 선 무리가 단계적으로 양팔을 펼치는 힌두신의 이미지를 정점으로 개인과 다중(多衆), 둘 둘 하나 혹은 둘 셋 앙상블의 수평과 수직의 동선으로 쟁투적 삶과 그 긴장감을 구사하던 춤은 이제 원형의 군무, 해소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25분 연행 내내 방점적 개인이었던 한 남자, 말하자면 아크람 칸의 페르소나는 이제 관객석을 등지고 하늘을 향해 천천히 양팔을 들어올린다.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그리고 더 큰 우주에 교합하기, 개별성의 극진으로서 보편성으로 나아온 아크람 칸의 존재론. 인트로단스는 일말의 이질감도 없이 이 존재론적 춤의 온전한 질감과 강도를 수행했다.

이어지는 작품은 루신다 차일즈의 <Concerto>(1993). 협주곡의 소나타 구성을 깨고 9분간 시종 긴박하게 치닫는 헨릭 고레츠키(Henryk Mikołaj Górecki)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Concerto pour clavecin et cordes op. 40>을 완벽히 구가하는 루신다 차일즈 특유의 수학적이면서도 강도적인 무보(그 예술세계는 더프리뷰 ‘Dance Reflections New York edition, 첫 번째 이야기를 참조)는 인트로단스 일곱 무용수의 정교하면서도 밀도 높은 수행으로 압출(壓出)되었다. 단순히 뉴욕 관객들을 위한 선정을 넘어 단체의 기량과 예술성을 유감없이 확인 시켜준, 짧은 소품이지만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한 연행이었다.

Introdans ‘Concerto’ © Hans Gerritsen
Introdans ‘Concerto’ ©Hans Gerritsen
Introdans ‘Cantata’ © Hans Gerritsen
Introdans ‘Cantata’ ©Hans Gerritsen

인터미션 후 연행된 프로그램의 대미 마우로 비곤제티의 <Cantata>는 앞서의 두 작품(물론 두 작품도 서로 이질적이지만)에 비해 훨씬 풍성한 정감을 선사한다. <Kaash>가 구도(求道)적 수행, <Concerto>가 형식주의 미학의 각도에 있었다면 <Cantata>는 인간적 서사, 즉 재현적이고 유희적인 층위를 펼친다. 총 열일곱 무용수들은 40여 분간의 연행을 통해 저잣거리의 왁자지껄한 삶을 구가한다. 대결과 사랑 사이 극렬한 희로애락이 발레가 참조된 그러나 한껏 항진된 동작구로 표출된다. 플렉스한 발, 한껏 벌린 손가락, 서로의 몸을 타고 넘는 춤은 생의 에너지 혹은 어떤 성적 충동에까지 삶의 극명한 장면들을 명징하게 돌출시킨다. <노트르담 드 파리> 등 컨템퍼러리댄스가 상당한 매력을 발산하는 동시대 뮤지컬의 인상과 겹치는 작품은 예술적으로도 유희적으로도 충만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독특한 억양(남부 이탈리아 방언)으로 그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던 합창과 대사, 물론 동시대 공연예술들이 흔히 그러해왔듯 그것은 음가(音價)적 뉘앙스로 물질화되어 그 전달이 무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마도 그 가사와 대화는 인생에의 수사학(修辭學, rhetoric)이었을 터. 아마도 해독 가능했다면 훨씬 풍성한 관람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개인적으로 필자는 언어를 차용하는 무용예술가들이 왜 쉽사리 언어의 예술적 특수성 즉 문학성을 파기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언어를 초과하는 몸의 언어인 춤의 세계에 필적할 수 있는 언어의 층위는 문학이 아니겠는가).

독일 마인츠 국립극장(Staatstheater Mainz) 소속 무용단 탄츠마인츠(Tanzmainz)는 그 고유한 스타일로 세계 유수 극장들과 각종 페스티벌의 환대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 출신의 젊은 안무가 샤론 에얄(Sharon Eyal. 2009년 생 샤론 에얄은 나하드 오하린이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컨템퍼러리무용단 바체바(Batsheva Dance Company) 출신으로 소속 무용수, 부예술감독, 안무가로 활동하다 2013년 창단한 자신의 무용단 L-E-V로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네덜란드 단스테아터, 파리 오페라 발레 등 세계적 명성의 무용단들로부터 작품을 의뢰받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2022년 국제현대무용제(International Modern Dance Festival, MODAFE) 개막작 <Chapter 3: The Brutal Journey of the Heart>2023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스웨덴 예테보리 오페라댄스컴퍼니(Göteborgs Opernans Danskompani)<SAABA>를 통해 관객과 만난 바 있다)<Soul Chain>(2017)으로 20231월에 이어 재차 조이스의 무대를 밟았다.

샤론 에얄의 작품에선 통상 공연하다를 의미하는 무대를 밟다라는 관행적 표현이 무대를 디디고 누르며 (의미심장하게) 걷는다(살아낸다)’는 중의(重意)로 다시금 무겁게 재인된다. 샤론 에얄 춤의 징표라 할 수 있는 를르베(relevé, 뒤꿈치를 들어올린 발의 자세) 워크는 이 작품에서도 쉼 없이 가동하는 지배적인 모티프로 특유의 미학관과 세계관으로 적립된다. 추어올려지는 생명력, 춤은 가감(加減) 상 어떤 강밀도(剛密度)적 층위에서건 어쨌든 항진적인 생의 순간들이다. 높건 깊건 빠르건 느리건 크건 작건, 대체로는 일상적 행위보다 훨씬 더 강밀도적으로 조밀히 연동함으로써 그 가시성과 촉각성을 발현해내는 것이 춤이건만 샤론 에얄의 춤은 발꿈치를 든 채 그러니까 온몸의 무게를 다 싣지 않은 채 왼발, 오른발 짧고 규칙적인 스텝 위에서 반복되는 단자적이고 미분적인 운동의 총합이다. 그러나 언제나 끝내는 몹시도 소진적인 결말로 누적되는 그 총합은 그것이 결국 우리네 인생살이에 관한 강력한 항변이었음을 체감케 하고야 만다.

Tanzmainz ‘Soul Chain’ © Andreas Etter
Tanzmainz ‘Soul Chain’ ©Andreas Etter
Tanzmainz ‘Soul Chain’ © Andreas Etter
Tanzmainz ‘Soul Chain’ ©Andreas Etter

여느 때처럼 홀로, , 혹은 서넛이 무대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마치 패션쇼 캣워크 같은 장면에서 출발하여 전체로 수렴, 반복되는 조직성 안에서 미묘하게 드러나는 변형과 충동으로써 군중 속 개인의 고독한 자존과 절대성을 드러내고야 마는 샤론 에얄의 55분 세계를 열일곱 탄츠마인츠 무용수들은 일말의 여지없이 관통해낸다. 오리 리히틱(Ori Lichtik) 특유의 타악기 비트가 강조된 일레트로닉 사운드 스케이프와 그저의 어둠과 빛으로 주어지는 미니멀한 조명 그리고 역시나 별다른 서사적 해석의 여지를 두지 않은 샤론 에얄의 진공적 세계 내에서 누드톤 레오타드 차림의 그들은 무용단 자체였고 동시에 개별의 리듬과 힘을 가진 각자였다. 의기양양함에서 취약성까지, 조직적 운동으로부터 내밀한 관능에까지, 꼼꼼하게 조립된 이 기괴한 퍼레이드가 기이하게도 생의 원천적 힘을 방출해보일 수 있었던 것은 안무의 고유성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완전히 몰입한 무용수들의 탁월한 역량 덕분이다.

샤론 에얄의 춤 세계에 대해 부연하자면. 그녀는 일찍이 미학적으로도 사유적으로도 고유하고 독보적인 한 세계를 이뤄낸 형식주의자다. 그런데 여전히 유효한 스타일리스트다. 샤론 에얄의 작품은 그녀를 감안한 예상선상에 있고, 그리고 언제나 그 한계를 예상치보다 멀리로 미루어낸다. 고백컨대 필자는 요즘 컨템퍼러리댄스의 몰역사 그 오래된 중언부언에 염증을 느끼던 차인데 샤론 에얄만큼은 한참 더 매료될 수 있을 것 같다. 익명적이면서도 고유한, 그 공통감을 불러일으키는 생의 장면들, 작가의 것이면서도 춤추는 이의 그리고 보는 이의 생으로 공유되는 컨템퍼러리댄스의 파기된 서사의 위력으로 여직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온전한 춤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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