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극과 음악의 온전한 풍자극 완성 - 정민이 지휘한 스트라빈스키 ‘병사의 이야기’
[공연리뷰] 극과 음악의 온전한 풍자극 완성 - 정민이 지휘한 스트라빈스키 ‘병사의 이야기’
  • 더프리뷰
  • 승인 2024.05.02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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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4월 13일 오후 5시, 강릉아트센터 소공연장

[더프리뷰=강릉] 박제성 음악칼럼니스트 = 스트라빈스키의 <병사의 이야기>. 사실 기악곡으로나 편곡 버전으로는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작곡된 지 100여 년이 된(1918년작) 이 무용곡을 온전한 프로덕션으로 한국에서 감상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 사실. 무대 위에 두 명의 배우와 무용수, 내레이터가 등장하고, 7명의 솔리스트들과 지휘자가 연주하는 이 작품은 현대 무대극의 효시와도 같은 중요한 출발점이자 이후 많은 작곡가들이 차용한 아메리카의 탱고나 래그타임 같은 다양한 무곡을 사용한 선구자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이 무대극이 정식으로 연주된다는 소식에 희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감상한 후에 몰려온 정신적 포만감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사실 스트라빈스키의 대표곡인 발레음악들은 물론이려니와 많은 무대극(오페라, 음악극, 오라토리오 등등)들은 음악 그 자체만으로 작품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대에서의 발레나 연극 같은 비주얼적 미장센이 수반되어야만 작곡가가 의도한 리듬과 박자의 다양한 움직임과 풍자적인 메시지, 극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가 올바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만큼 이번 강릉에서의 <병사의 이야기>는 이렇듯 스트라빈스키의 예술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작지만 위대한 첫 걸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극 연기자 (사진제공 = 강릉아트센터)
음악극 연기자 (사진제공=강릉아트센터)

고풍스러운 한옥의 외양을 지닌 소공연장의 분위기에서 70여분 동안 펼쳐진 <병사의 이야기>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우선 출연자들을 언급해 보자면 연출과 내레이터를 맡은 조정근과 안무를 맡은 김지은을 중심으로 병사 안재민, 악마 이광석, 공주 박수연이 출연했다. 러시아의 옛 동화 내용에 역동감과 장면변환을 부여하기 위해 하얀 천 뒤에 조명을 쏴서 그림자 놀이를 처리하는 공간과 앞으로 나와 실제로 장면을 연기하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이 둘을 이어주는 것이 의자에 앉아있는 내레이터. 엄청난 발성과 표현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견인한 내레이터의 집요한 운율 변조를 통해 상황이 설명되는 가운데 연기자 병사는 무용수 악마와 바이올린과 막대한 부를 거래하고, 병사는 하얀 천 뒤에서 열심히 걷고 또 걷고, 악마는 자신의 유혹을 온 몸으로 표현했다. 전반부의 내용을 실내악 음악으로만 듣는다면 어떤 장면이 펼쳐지는지 그 선율 하나마다의 의미를 음미하기 힘들지만, 이렇게 또렷한 이미지가 가세하니 작곡가의 ‘경제적’ 편성과 ‘세속적’인 멜로디가 어떠한 풍자와 은유의 힘을 드러내는지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정민과 강릉 필하모닉 (사진제공 = 강릉아트센터)
정민과 강릉 필하모닉 (사진제공=강릉아트센터)

정민과 강릉 필하모닉 멤버들의 음악 또한 대단히 훌륭했다. ‘병사의 행진곡’과 ‘왕의 행진곡’에서 캐릭터의 성격을 반영한 흥미로운 장면표현을 보여줌과 동시에, ‘세 개의 춤: 탱고-왈츠-래그타임’에서 그 이국적인 무곡들이 갖고 있는 진정한 즐거움을 유감없이 표출했다. 금관들과 타악기의 활약이 특히 빼어났고 앙상블을 리드한 바이올린 송수현의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음색과 리듬감은 스트라빈스키의 유머를 보여주는 데에 모자람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정민의 정제된 제스처와 놀라운 리더쉽을 통해 이 작은 편성에 입체감과 긴장감을 부여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그의 해석을 통해 실내악이나 편곡버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극적인 카타르시스까지를 전달 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 ‘그랜드 코랄’과 ‘악마의 개선 행진곡’에서 음악과 극의 아이로니컬한 결말을 통해 관객은 해피엔딩으로서의 해갈보다는 의뭉스러운 물음표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스트라빈스키가 의도한 올바른 <병사의 이야기>일 것이다. 부모와 함께 온 어린이 관객도 다른 연주회에서 볼 수 있는 흐트러진 감상자세와는 달리 정말로 무대에 집중해서 감상을 하는 모습이야말로 앞선 결론을 뒷받침해주는 듯했다.

멋진 외관과 바다를 향해 탁 트인 정경을 갖고 있는 운치 있는 강릉아트센터. 현재 2,000석 규모의 대공연장은 오케스트라 피트를 증축하기 위해 잠시 휴관 상태라고 한다. 앞으로 정민과 강릉 필하모닉이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넘어서서 오페라와 발레까지를 아우를 수 있는 종합적인 공연장이 되려는 큰 그림을 그리려는 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민이 상임 지휘자로 온 이후 강릉 필하모닉은 수준 높은 연주력과 레퍼토리 확장으로 그 기세를 몰아가고 있는 중인 만큼 이러한 하드웨어적인 확충을 통해 강릉 문화계의 발전과 새로운 클래식 음악의 중심지로서의 정체성을 만들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강릉은 자연과 관광, 교통과 숙박, 맛집과 커피 등등, 한국의 그 어떤 지역보다 문화의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도시로서 앞으로의 멋진 상승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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