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국립현대무용단 김성용 '정글'
[공연리뷰] 국립현대무용단 김성용 '정글'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4.05.10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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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의, 관자의, 그리고 어느 예술양식과 시대정신, 한 세계의 가장자리

[더프리뷰=서울] 하영신 무용평론가 = 지난 411일에서 14일까지 나흘 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는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김성용의 <정글>이 올려졌다. 지난해 10월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선보였던 부임작 <정글-감각과 반응>(더프리뷰 20231030일자 참조)의 두 번째 에디션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미감과 표현에서 차이를 생성했다. 특히나 전작에 연이어 이번 작품에 몰두한 열일곱 무용가들(강성룡 강승현 김민아 김윤미 김윤현 성민정 양지연 유다정 이경엽 이지수 정재우 정주령 조현도 천영돈 최연진 하지혜 홍지현)의 움직임에서는 물리적은 물론이거니와 심리적 변천이 유추되리만큼의 심도적 가세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생략할 수 없는 몇 가지 질문이 남는다.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정글>의 전체적인 미감은 <정글-감각과 반응>에 비해 도회적으로 정돈되었다. 주황, 녹색 등 컬러풀한 색조로 업스테이지를 채우던 백라이팅과 튜닝을 거쳤으나 자연으로부터 채집된 소리와 타투 문양을 담은 의상 등 정글의 일차원적 이미지를 적시하던 제반요소들이 모노톤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강렬한 색감과 양감으로 독자적인 미감과 의미를 발산하던 천장의 반구형 장치는 편평해졌고 자체의 색감을 덜어 조명과 더불어 전체와 부분으로 운용되며 비로소 춤들을 위한 특정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장소(정글, 혹은 아스팔트 정글)로서 그 세계 내 심리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바탕적 세계의 하늘이 되어주었다.

그 조율된 세계 내에서 춤들은 훨씬 깊어졌다. 정글에 출현하여 각자의 춤을 창발하는 무용가들은 기능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떤 한계를 밀고 나아간 듯했고 한껏 유려해진 춤들은 때론 생경하고 이질적인 형상을 빚었다. 그러나 역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춤작품의 건립은 잘 만들어졌거나 잘 추어진 춤의 진행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 아닌가, 필자는 60분 연행의 마디마디에서 그 깊어진 춤에 홀딱 사로잡히지 못하고 어떤 부족분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첫 번째 질문, 춤작품의 목표는 특유한 동작, 희소한 동작의 계발인가?

춤의 오랜 관찰자이자 애호가인 필자는 전작으로부터 이번 작품에 이르기까지 안무가이자 예술감독인 김성용과 열일곱의 무용가가 무엇을 작정하고 그 작심을 마침내 어떻게 실현해내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분명 자신의 춤 경험 안에서 맺혀져 정형과 정렬을 이룬 어떤 표현적 한계들을 밀고 나아갔다. 다른 강도와 속도와 흐름의, 그리하여 어떤 양상 혹은 어떤 심리 혹은 어떤 정감으로 쉽사리 재인할 수 없는 동작들이 시연되었다. 몇몇 무용가들의 연행에서는 과연 어떤 성취감과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 경지에의 당도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안다. 그야말로 온몸, 정신과 연동하는 일원론적 신체를 다른 차원에 놓는 그 일은 한 세계의 돌파를 향한 부단한 시도와 실패 끝에 희소하게 이루어지는 일이고, 그러므로 치유와 성장이라는 감격적 순간들에 결부한다.

그 배면적 의미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춤작품 내 동작구들은 결국 시각적이거나 촉각적인 이미지, 의미론적 연관체계, 혹은 정동적 역량으로써 관객에게 전이되어야 한다. <정글>의 몇 장면에선 실로 이질적인 동작구들이 독무나 간소한 앙상블로 시연되었는데 특이하기가 마치 고도로 숙련된 요가의 수행이거나 혹은 외계의 생명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 특유함들은 극적인 장점이 되지 못했다. 그 혹은 그녀 그리고 그들을 이끈 안무가가 그러한 동작을 추구하고 행하는 연유가 살펴지지 않았고, 작품 맥락상 그 동작이 각별히 조망되어야 하는 심미적이거나 내용적인 필연이 읽혀지지 않았고, 그러므로 어떤 충동이나 해방감은 그들만의 것이었지 나를 달뜨게 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생소하여 감정이입 혹은 무조건적 몰입이 좌초되는 동작들의 연행은 내 기억의 두 지점을 불러들였다. 하나는 아크람 칸(Akram Kahn)과 실비 길렘(Sylvie Guillem)<신성한 괴물들 Sacred Monsters>(2006). 2007LG아트센터를 통해 우리 관객에게도 선보였던 이 작품의 최종에서 빚어진, 기능상 그리고 미감상 춤 관행 밖의 일이라 다소는 어색했던 이인무는 가시적으로 확인되는 연행의 액면 아래 춤의 어느 통시적 맥락을 달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전통춤 카탁으로부터 컨템퍼러리댄스계로 나아온 아크람 칸과 발레의 범주 안에서 클래식과 컨템퍼러리를 넘나들며 언제나 능수능란했던 실비 길렘의 조우는 출중한 두 스타 무용가의 만남이기도 하였거니와 춤 지형 전체의 지역·전통·양식을 가로지르며 맺어지는 또 하나의 특이한 생성점이기도 하였다. 무용예술작품의 관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즉물적이거나 즉각적일 수 있다는 특유함을 갖지만 그렇다고 인식론적 차원이 절대적으로 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정글>에서 시연된 특이한 동작구들의 배후엔 <정글-감각과 반응>이 있을 뿐이다. 특수 관계자가 아니라면 관객은 열일곱 무용가들의 춤 역사를 일일이 가늠할 수 없다. 아마도 불특정다수 관객들 중 상당수는 <정글-감각과 반응><정글> 모두를 관람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해의 심화를 촉발하지도 심미적인 충족감을 선사하지도 않아도, 오로지 새롭다는 충격감만으로도 예술은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두 번째 질문, 더 이상 말하기를 멈춘 오늘의 춤작품들

단답하자면, 성립 가능하다. 예술은 사유를 촉발시키기도 하지만 잠들었거나 생소한 감각들을 촉각케 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최상의 성과는 물론 이 둘의 교합이다). <정글>에 연동하여 다시 불러세워진 또 하나의 기억인 시드라 벨(Sidra Bell)<FRICTION>이 그러했다. 2018년 뉴욕라이브아츠(New York Live Arts)에서의 초연을 관람했었는데 이 작품의 일곱 무용수들이 펼친 기량과 표현은 극한(極限)적이어서 극한(劇寒)의 정감으로 나를 포박했었다. 춤추기에는 적정치 못하다는 첫인상을 줄 정도로 다부진 몸으로부터, 반대로 모든 마디들이 너무 길어 어찌해도 휘청해보이는 창백한 몸까지, 안 그래도 유난스레 특질적인 몸들을 시드라 벨은 한없이 느린 그러나 모든 각()들을 광폭으로 벌린 임계치의 움직임으로 엮어 특이한 한 세계를 사출해내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작품군을 스페이스 오디세이라 별칭한다. 인격을 초과한 몸짓, 탈존(脫存)의 전시, 대개 앰비언트 계열의 음악(ambient music)과 일루전(illusion)적 조명을 동반하는 이런 작품들은 세계의 심급이거나 바깥, 아무튼 인간적인 서사와 연관이 끊긴 외재적 신세계다.

<FRICTION>의 즈음만 해도 이런 이질적 세계의 제시는 (감각적으로) 유효했다. 난수표처럼 해독 불가능한 동작이 난무하는 다른 중력의 세계를 50여분이나 견디는 일은 힘들었지만 어찌되었건 그 생경한 존재들에게는 주의가 기울여졌고 낯설므로 매 순간 강렬한 심리적 부침을 일으키는 그()들의 움직임은 잊히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인간이 저토록 탈존적일 수도 있다니, 저런 탈구적인 동작들은 도대체 어떻게 익혀지는 것일까, 가장 강력하게 존재론적 자장을 발산하는 눈을 보게 된다. 맙소사 텅 빈 눈들. 더 이상은 이 가혹한 우주적 냉기를 참아내기 어렵겠다는 판단이 치미는 순간 무용수 중 누군가 사람이 방출할 수 없는 음색과 성량의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고 급기야 자리를 박차려니 암전, 마침내 시드라 벨의 차갑고 지독한 세계는 종식되었다.

지금도 그 세계는, 시드라 벨 행성에서의 기억은 나의 일상적이고 존재론적인 세계와는 박리된, 그저 막막해지는 나머지 무력감마저 불러일으키는 포비아적 기억이다(그러므로 감각적 각인이다). 다만 예술의 지평에서, 또 유독 무용예술의 지평에서 충동, 무의식, 물질적 세계, 혹은 우주, 무어라 불리던 일상사와 문명의 바깥은 자주 출몰한다. 그 빈번한 출현의 누적으로부터 나는 요즘 유행에의 현혹, 사유와 말하기를 멈춘 작가적 태만을 의혹하기도 한다. ‘컨템퍼러리’ ‘포스트모더니즘등의 양식적 가두리가 정당성을 부여해준, 전통적 무용극으로부터의 춤의 독립은 춤의 애호가로선 지금도 여전히 달가운 일이다. 가감(加減)의 어느 방향으로든 항진된 생명성으로서의 춤은 연극이나 영화와는 달리 서사에 능히 교호(交互)하지는 못하는 법이니까(돌이켜보건대, 클래식발레가 그리던 정령의 세계나 모던댄스가 그리던 신화의 세계나, 일상성에 대하여 초과적으로 추어올려지는 춤들은 애당초 리얼리즘엔 정합할 수 없는 매체일지도 모르겠다). 일원론적 몸들로부터 발굴되는 통사적 기억, 서사적 진행으로써 무대 위 등장인물 누군가의 것으로 갇히지 않는 감정과 충동 그 자체의 분출은 목도하는 이 누구나에게 해당사항이 되는 존재론적 공통항이었기에 한 시절 춤들은 훨씬 더 즉각적이고 온전한 소통, 정동의 장을 만들어내곤 하였다.

그러나 이젠 그마저도 도그마로 굳혀진 듯하다. 세부장르를 종횡하며 실상은 고도의 테크닉으로부터 발현되는 탈구적인 동작들은 불특정다수 관객에게는 갈수록 오리무중의 일이고(알 수 없음은 이젠 현대성의 상수(常數)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눈치고), 상대적으로 경험치가 높은 나에게는 이젠 좀처럼 날카롭게 감각되지 않는다. 싫증, 변덕, 마비, 감각은 의외로 쉽게 익숙해지고 무감해지는 법. 누구나가 경쟁적으로 새로운 감각물들을 제출하고 있는 컨템퍼러리아트의 세계에서 기실 시절을 충격할 만큼의 새로운 발견은 없었는지 오래고, 자신이 나름 실재(the Real)라 믿는 어떤 세계, 그 세계의 물리력을 집요하게 펼쳐내는 컨템퍼러리댄스 작가들의 세계관은 나에겐 더 이상 각별해지지 못한다. 전문가의 피로도는 현대예술은 도통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불특정다수 관객의 통상적인 불만과 궤를 같이하게 된다, 예술지상주의, 그 명암 중 암().

지난 해 가을 국립현대무용단이 선보였던 황수현의 <카베에 caveae>는 하이퍼리얼(hyperreal)한 감각에의 추구가 인간의 감각능력 즉 감수성의 지대를 초월하여 결국 관객을 몰감각적인 그리하여 무의미한 사태에로 매몰시킨 대표적인 작품이다. 단언컨대, 이 작품은 결코 작가의 작심이 엉성하거나 그 구현에 실패한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천장을 열어 천고(天高)를 한껏 높인 국립극장에 원형으로 재단한 무대의 시간은 공동(空洞, cavity)을 의미한다는 제목자의 사태를 완벽히 구동해내었다. 서른아홉 명 탁월한 무용수들의 일렁임과 분출은 베르그손이나 들뢰즈 등의 생성철학자들이 실재라 말하는, 바탕적 우주에 내속하는 미립자적 이미지들의 운동을 시전(施展)하는 듯했다. 그런데 다만 나에게로, 인간적으로 만곡(彎曲)하지 못하니 그 시간은 흡사 텅 빈 동굴을 부유하는 객관적 시간이거나 우주의 블랙홀처럼 다만 삼켜지는 무효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꽤 오래, 이 품질은 우수하나 어떤 의미로 길어 말하기가 어려운 이 작품을 말할 방도를 간구했지만 결국 이런 각도를 빌려서야 말하게 된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카베에' © 박수환
국립현대무용단 '카베에' © 박수환

김성용의 <정글>은 유사한 난관을 안긴다. 그는 연이어 세 번의 정글'적 세계를 펼쳤다. 대구시립무용단 무용수들과 함께 찾아냈던 <Process In It>(2022)에서의 20여 분 정글의 양상에서는 실체적 밀림에의 참조가 확연히 느껴졌었고, 작년 가을의 <정글-감각과 반응>으로부터는 정글은 삶의 각축장으로 대유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정글>은 정글 혹은 삶의 구체성을 떨구고 나름껏 읽혀지기를 고대하는 기호가 된다. 형식(렉처퍼포먼스였던 <Process In It>과 나머지 단독형 두 작품)과 제반요소들의 질료성과 심미성 그리고 춤 자체, 즉 기표들의 차원에서 세 작품은 분명한 차이와 심화를 생성해내었다. 세 작품의 시간적 간극을 볼 때 거두어지기 쉽지 않은 성과, 작가의 고심이 살펴진다. 그러나 그 기표에 결합해야 할 기의는 부박하다. ‘삶의 양상은 정글에서와 다르지 않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당위의 중언부언, <정글> 내 기호들은 너무도 명백한 나머지 독해의 가능성이 지워진 텅 빈 기호다.

그러나 앞서도 예시했듯 예술적 기호는 가끔 기표의 명징함만으로도 충분해지기도 한다. 우주에 던져지든 동굴에 던져지든 관람이 시각적 경험을 넘어 온몸적 체험의 경지로 펼쳐질 때, 쾌든 불쾌든 그 세계에서 꿈틀대고 움직이는 것들로부터 생생한 감각들이 자극될 때, 그럴 땐 그 기의가 실팍하지 않다 해도 그것은 예술의 경지로 인정 가능하다. 여하간 의미든 감각이든 무언가가, 나에게 이해되거나 공감되거나 전이되거나 육박(특히 춤장르는)해오는 무언가가 있어야 작품은 소통 가능하고 충족적인 예술작품이 된다. 그런데 <정글>은 물리적(감각적)으로도 심리적(의미론적)으로도 너무 멀리에 있다. 전작들에서는 없었던 등퇴장이 있고, 무리는 삼삼오오 만나고 헤어지고, 단독의 연행은 공간의 전경과 후경을 가르는 등 시퀀스들은 흐름 즉 서사적 구조를 띠는데 그러나 춤의 내역은 어떤 의미연관체계로 드러나거나 맥락화되지 못한다. 그저 병렬할 따름인 부분들은 나에게로 감각적으로든 의미론적으로든 개연하지 못하고 저 멀리의 현상, 타자들의 각자도생으로 목도되었을 뿐. 그들의 고군분투가 나의 생명현상으로 환원되거나 그로써 생에의 동감, 전망으로 확전(擴轉)되지 않으니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세 번째 질문, 메소드로서 ‘process in it’의 기제와 미적 효능은 무엇인가?

<정글>이 특유한 동작의 연쇄와 배치를 이루었으나 그것이 하나의 통합적인 의미체계의 전개로 수렴되지 않는 이유는 최근 김성용의 작법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Process In IT>에서의 렉처 이후 그는 <정글-감각과 반응><정글>을 위한 프로그램과 인터뷰 등을 통해 움직임사유"에의 애착을 밝히고 있다. 그의 믿음처럼 무용가들이 방출하는 움직임은 필시 그들 자신의 어떤 역사, 기억 등 우리가 임의로 물리적 신체와 가름하여 기어이 정신의 영역으로 분간해온 그 정신적 측면에 결부한다.

그러나 한 편의 무용예술작품은 결국 작가가 결집해낸 하나의 집합적 세계다. 춤작가는 자신이 조직하고자 하는 고유한 어떤 세계를 무대 위에 실현해내기 위해 어떤 몸들로부터 무엇을’ ‘어떻게불러낼 것인가, 안무적 결단을 내리고 그 결단을 집요하게 발현시켜내는 자다(이것은 필수불가결한 자격이다). 그리고 요즘의 매체융복합적인 확장적 예술환경에서라면 협업하는 장르들의 물질적 구동도 결정하는 자다(이것은 선택사항이다. 춤장르에서 협업하는 장르들은 얼마든지 배경적으로 있어도 좋다. 춤으로 주도되는 충족적인 한 세계를 위해 효과적이기만 하다면).

중요한 것은 ‘work’‘piece’로서 닫힌 구조의 무용예술작품에서라면 선재되어야 할 것은 작가의 어떤 세계에 관한 사유적 밑그림이라는 것이다. ‘무엇을세울 것인가에 대한 초벌적 설계도는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몫. 그 밑그림 없이 무용가 개개인에게 잠재되어 있는 움직임-사유의 우연한 발현과 그 편집만으로 과정이 채워진다면 그 세계는 구체적인 양상을 지닌 어떤세계로 완공되기 어렵고 그러므로 공감대와 설득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진다. 김성용의 <정글>이 그렇다. 제목이 예고하는 바, 날 것 생명들의 극적 펼침이라는 기대에 비해 외려 모호하고 추상적인 지대. 어떤 상황들이 어떤 갖가지 생명을 자극하여 어떠어떠한 반응들로 드러난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외려 온도가 낮은, 원근법적 구도의 간극 저 멀리에 있는 미적지근한 정글.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주어지는 자극, 상황에 대하여 감각하고 반응한다는 것은 예술 뿐 아니라 삶의 당위다. ()을 극명하게 전사(傳寫)하는 컨템퍼러리댄스라면, 컨템퍼러리댄스란 세계에 거하는 무용수의 삶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구체적 서사 내 설정된 인격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국면에서의 생존적 반응을 충혈적으로, 리얼하게 살아내보이는 것이 컨템퍼러리댄스의 미학적 본성, 전통적 서사구조를 떠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렇지 못할 거라면 이 현대적인 서사의 파편성과 부작위성은 게으른 몰역사에 불과한 것을. 김성용은 왜 굳이 그 자신 작가의식으로부터 색다른 의미를 첨언하지 못하는 정글을 연거푸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의 입장으로 이입해보면 십분 이해는 간다. 김성용은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 간 대구시립무용단을 이끌며 <군중>(2018), <The Car>(2019), <i tube>(2021), <i tube episode>(2022) 등의 작품을 통해 현대문명 속 군중의 삶을 충족적으로 조망해왔다. <초인>(2013), <Moving Violence Episode 1,2>(2013, 2016) <Lynch>(2016) 등 초기 대표작들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힘의 사회적 작동방식에 관한 작가의 문제의식은 일 년에 두 차례씩 돌아오는 정기공연을 위해 만들어졌던 상기 일련의 대형작 목록을 통해 충분히 말해졌다( <정글-감각과 반응> 후반부에서의 유일했던 서사형 시퀀스는 이 문제의식의 흔적이기도 했다). 정기공연 외에도 국내외 각종 예술기관과 무용제의 초청에서도 예술적 성취를 입증해야 헸고 더불어 단체가 소속하고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 및 크고 작은 지역행사를 위한 공연 등 공공단체의 장으로서 책임져야 했던 안무일정은 한 개인의 작가적 행보로서는 꽤나 소진적이었다. 군중의 익명적 삶에 대해 말하기에 이골이 났다면 지금 당장, 그는 그 어떤 새로운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이는 비단 김성용이라는 한 작가의 개인적 한계인 것만은 아니다. 필자는 또한 다른 각도에서도 그의 이골(나의 추측이 맞다면)에 동감한다. 모든 양식은 개시와 만연과 퇴조의 숙명을 밟는 법. 1980년대 초반으로부터의 일이었으니 컨템퍼러리댄스의 역사도 정점을 지나왔을 것이다. 파편적이어서 공통항으로 추려지고, 누군가들의 특정한 사건들이 아니어서 보편타당한 것이라 주지되던 포스트모더니즘적 분쇄형 서사는 이젠 몰정체성, 몰역사의 위험을 고지한다. 그렇다고 과거 프로파간다 예술의 귀환을 고대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이 제시하는 전망이 통용될 리 만무하리만치 세계는 간단치가 않아졌으니까. 그러나 예술이 그 지향과 사유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여타의 오락물들과는 어떻게 다를 것인가?

작가로서 한 시절의 끝까지를 질주해낸 김성용은 대구시립무용단과의 마지막 작품 <Process In It>에서 숨을 골랐다. 소진된 무엇의 공백은 두고 어떻게에 대해 말했다. 춤은 무용수들의 몸에서 어떻게 출현하는지, 배면의 어떤 누층들로부터 발현되는 것인지를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그 과정적 시연을 위해 김성용이 춤 발생의 요인으로 무용수들에게 제시한 것은 몸의 한 점(), 한 축() 등이었다. 그것은 다소 불완전한 설명이었다. 무용수 개인의 사유가 담지되는 고유하고 농축된 인격적 움직임이란 안무가가 예술적 카리스마든 친밀한 관계로부터든 어떻게든 인간적인 파악으로부터 감안하여 제시하는 어떤상황에 동의하고 몰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자신의 일상사와 춤사가 열리며 길어올려지는 것이지 목적과 함의 없는 아무 조건에고 수월히 촉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불완전한 논리는 <Process In It>에서는 효용이 있었다. 아무튼 무용수들의 춤이 안무가가 디자인한 일방적인 안무의 실행이 아니라 무용수 자체로부터 흘러나오고, 몸과 몸·소리(음악(조명) 등 세계와의 관계맺기라는 것을 일러주는 정도로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용수 저마다의 감도로부터 출발하는 춤들의 병렬을 다양체들의 서식처 정글이라 이름 붙인 <Process In It>의 액자형 소품이 두 번의 단독형 에디션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제출하는 세계에 대한 자필적 규명 없이 무용수들의 움직임-사유에 의존된 부작위는 정글 혹은 생의 치열함에 대하여 피상적인 세계를 출현시켰다. 문명과 다른 질서인 정글의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선 차이를 캐고 일상과의 연관을 묻는 오히려 더 면밀한 사유, 그 과정을 통과한 작위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 황인모

그 피상성은 아직은 논리가 막연한 ‘process in it’에의 천착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최근작들의 프로그램이나 연계된 인터뷰를 통해 김성용은 ‘process in it’비정형적 움직임 리서치라 부연하며 자신의 고유한 안무 메소드로 소개했다. 안무 메소드란 작가가 나름의 고유한 춤의 질적 특질을 위해 특별히 고안한 방법론. 또한 그 메소드로부터 작품군의 질감이 특화되는 법이다. 그런가. <Process In It>에서부터 나는 논리상 ‘in’‘it’이 어떻게 기제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건지, 그리하여 완성된 고유한 프로세스의 실체적 기제와 그 효능이 무엇인지를 미처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안무가가 그 자신의 단련된 춤적 경지로써 무용수의 과거와 현재적 상태를 알아차리고 그로부터 나름의 어떤 자극으로 충격하여 그 내적 한계를 뚫고 해방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것은, 즉흥에 기반하는 동시대 안무작법의 당위요 윤리다(아니라면, 간단한 상황에의 단서만 던져주고 무용수들이 찾아낸 동작구를 취하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약탈적이다). 앞서도 이야기한 바대로 <정글>의 어떤 장면들에선 춤예술의 현장에서 실상은 탈락된 윤리가 회복되고 안무가와 무용가가 합심하여 치유와 거듭남이라는 예술의 근간적 성과를 성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찾아진 비정형적 움직임들이 김성용이 설계하고자 하는 세계의 내역과 질성으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정형에의 의욕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움직임에의 추구와 한 세계에 대한 사유가 상호 필연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독창적인 움직임 계발에 치중된다면(주지하다시피 그 역시 예술의 의미있는 한 범주이긴 하다) 그러한 의욕을 지닌 작가는 작정하여 의미맥락을 감축하고 특정 스타일의 고안과 변주에 전념하는 자발적 형식주의자여야 옳다. 정글의 두 에디션은, 그리고 김성용의 작가로서의 현재적 위상은 그렇다기엔 어정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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