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2024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무용부문 총평
[공연리뷰] 2024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무용부문 총평
  • 나수진 무용비평가
  • 승인 2025.03.31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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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를 넘어선 춤의 지평, 다양한 실험과 도전의 현장

[더프리뷰=서울] 나수진 무용평론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2024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무용 부문 7편의 작품이 올해 1월부터 3월까지 대학로예술극장과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이번 창작산실 작품들은 문화적 융합, 사회적 주제, 실험적 공간 구성을 통해 춤의 영역을 탐색했으며, 전통과 현대, 기술과 신체, 개인과 사회 사이의 경계를 횡단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올해 작품들이 단순한 미학적 실험을 넘어 동시대적 이슈와 철학적 담론을 무용이라는 매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무용이 하나의 독립적 장르로서 적극적인 예술의 정치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욕망에 침식된 신체성에 대한 탐구

백주희의 <당신을 배송합니다>(2025.01.04~05)는 현대 플랫폼 경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배송 노동의 실체를 신체적 언어로 해석한 작품이다. 안무가는 '빠른 배송'이라는 현대사회의 욕망과 노동자의 신체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를 예리하게 포착했다. 퀵 서비스, 배달 앱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착취의 대상으로 기능하는 노동자의 몸은 끊임없이 소진된다. 백주희는 인간의 욕망과 노동자의 신체성이 서로 길항하는 지점을 파고들었다.

백주희 '당신을 배송합니다'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백주희 '당신을 배송합니다'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무용수들의 정밀한 앙상블과 군무는 기계적 반복성과 육체적 소진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했으며, 카트와 배송 물품 등의 오브제는 노동의 물질성을 강조했다. 특히 배송 노동자들의 시간 경쟁과 육체적 고단함을 표현한 중간 부분의 군무는 신체와 사물의 관계성에 대한 적절한 유비(類比)였다. 다만 일부 솔로 파트에서 발견되는 느슨한 장면 전환과 내러티브의 불연속성은 작품의 완성도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또한 무용수들의 진정성 있는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후반부에서 노동-소비의 순환구조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다소 모호하게 표현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역사적 인물의 재현과 그 한계

아트로버컴퍼니의 <녕(寧), 왕자의 길>(2025.01.25~26)은 조선 태종과 세 왕자의 역사적 서사를 통해 '평안함의 본질'을 탐구한 작품이다. 12명의 남성 무용수가 태평무, 살풀이, 검무 등 전통 춤사위의 현대적 변용을 시도했다.

아트로버컴퍼니 '녕(寧), 왕자의 길'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트로버컴퍼니 '녕(寧), 왕자의 길'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5장의 옴니버스 구조로 펼쳐진 이 작품은 왕권과 가부장적 질서 내에서의 갈등을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형상화했으나, 각 인물의 심리적 깊이와 역사적 맥락의 복잡성을 충분히 담아내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특히 전통 춤사위의 차용이 표면적 인용에 그쳐, 한국무용이 지닌 미학적 층위와 현대적 재맥락화 사이에서 유기적 전환을 이루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역사적 소재를 다루는 과정에 있어 단순 표상을 넘어선 신체적 사유의 깊이와 상상력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비가시적 물리법칙의 미학적 가시화

류장현과친구들의 <GRAVITY>(2025.02.07~09)는 중력이라는 보편적 물리 현상을 존재론적 메타포로 확장한 수작이다. 균형, 저항, 낙하, 상승의 역학을 통해 인간 존재와 관계성의 본질을 탐구한 이 작품은, 추상적 개념을 가시적인 몸의 언어로 재현하는 안무의 본질적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중력을 단순한 물리법칙이 아닌 인간 실존의 은유로 확장시킨 철학적 사유가 단연 돋보였다.

류장현과친구들 'GRAVITY'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류장현과친구들 'GRAVITY'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12명 무용수의 정교한 앙상블과 신체적 대화는 내적 긴장감을 극대화했으며, 헬륨풍선과 의상 등 최소한의 오브제를 통해 중력과 반중력 사이의 역설적 관계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했다. 특히 물리적 제약을 초월하려는 인간 의지와 신체적 한계 사이의 갈등을 감각적으로 포착한 지점은 매우 탁월했다. <GRAVITY>는 과학적 원리와 철학적 사유, 안무적 실천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드문 사례로, 현대무용의 지평을 확장하는 대안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동시대 현대무용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횡단적 사유로 탐색한 문화적 경계

99아트컴퍼니의 <피안의 여행자들>(2025.02.13~16)은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전통음악과 한국무용의 만남을 통해 문화적 경계를 초월한 예술적 대화를 시도한 야심찬 작품이다. "머물 수 없는 몸은 닿을 수 없는 땅을 향해 간다"라는 주제 아래, 이주와 유목의 경험을 지닌 다수의 신체가 만나 새로운 예술적 언어를 모색했다. 단순한 문화적 혼합을 넘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 즉 이주와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공유한 무용수들의 실제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99아트컴퍼니 '피안의 여행자들'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99아트컴퍼니 '피안의 여행자들'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원형 객석 배치를 통한 공간의 재구성은 무대와 객석 사이의 위계를 해체하고, '피안'이라는 상상적 공간의 공동 구성을 가능케 했다. 무용수들은 부르키나파소 전통과 한국무용의 기법을 유기적으로 접목하며 문화적 융합의 실천적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만 이주자의 기억, 제의, 균사체 등 다양한 개념적 요소들이 다소 산만하게 배치되어 서사의 명료성을 저해한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문화적 교차점을 찾으려는 야심찬 시도가 다소 과잉된 상징 및 메타포로 이어진 측면이 있지만 그 경계면만큼은 선명하게 탐색하고 있다.

노년의 신체와 시간성에 대한 실험적 고찰

창작그룹 괘념치의 <로망(Roman) 노망(老妄)>(2025.02.21~23)은 노화와 기억, 세대 간 단절의 문제를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다. 낭만적 열망(로망)과 인지적 상실(노망) 사이의 모순적 공존을 탐구하며, 전문 무용수와 비전문 노인들의 협업을 통해 커뮤니티 댄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창작그룹 괘념치 '로망 노망'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그룹 괘념치 '로망 노망'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간병, 회고, 욕망과 상실,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 조건과 삶의 의미 등을 4장으로 구성해 표현한 이 작품에서는 특히 무대 디자인과 오브제의 상징적 활용이 돋보였다. 비닐 세트를 통한 바다 연출, 재활용 의상과 컨베이어벨트 등은 기억의 파편화와 시간의 비선형성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했다. 그러나 3장 이후 등장한 과도한 장치와 복잡한 구성은 작품의 집중력을 분산시킨 측면이 있다. 노년의 신체가 지닌 특유의 시간성과 질감을 탐구하는 의미 있는 시도였으나, 형식적 과잉으로 인해 주제의 심층적 탐구가 희미해진 점은 다소 아쉽다.

형이상학적 야심과 안무적 실현 사이의 간극

와이즈발레단의 <갓세렝게티>(2025.02.28~03.01)는 신과 인간의 투쟁이라는 신화적 주제를 발레적 어휘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캐나다 단편영화 <신의 장난: 세렝게티>에서 영감을 받아, 인간문명의 진화와 신적 질서 사이의 갈등을 주제로 삼았다. 이는 신화적 서사를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로, 한국 발레에서 보기 드문 소재를 기민하게 다루면서 주제적 확장 가능성을 모색한다.

와이즈발레단 '갓세렝게티'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와이즈발레단 '갓세렝게티'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그러나 주제의 형이상학적 깊이와 발레 형식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신-인간의 복합적 관계를 표현할 안무적 어휘의 개발이 미진했고, 개념적 야심과 실제 구현 사이의 간극이 두드러졌다. 특히 아프리카 사바나와 신의 영역을 표현한 무대 디자인과 발레의 전통적 어휘 사이의 불일치는 작품의 통일성을 저해했다. 이는 한국 발레계가 직면한 과제를 보여주는 사례로, 발레의 고전적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동시대적 주제와 감성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시공간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철학적 탐구

언노운피에스의 <TIME IS SPACE SPACE IS TIME>(2025.02.28~03.02)은 시공간의 관계성을 안무적으로 탐구한 작품이다. 선형적 시간관을 해체하고 공간-시간의 상호침투적 관계를 신체와 무대장치로 구현하며, 인간 인식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현대 물리학의 시공간 개념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무용을 통한 과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언노운피에스 'TIME IS SPACE SPACE IS TIME'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언노운피에스 'TIME IS SPACE SPACE IS TIME'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LED 라이트봉, 스테인리스 박스, 회전 원형바닥 등을 활용한 미니멀리즘 미학은 철학적 질문을 감각적 경험으로 전환시켰다. 다만 시각적 장치의 강렬함이 때로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압도하여, 안무가 부차적인 요소로 전회되는 순간이 있었다. 특히 후반부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기술적 장치의 시각적 효과에 종속되어 신체가 지닌 고유한 표현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과학, 철학, 안무의 접점을 탐색한 의미 있는 실험으로, 창작산실 무용 부문의 대미를 장식했다.

한국 컨템퍼러리 댄스의 가능성과 과제

2024 공연예술창작산실 무용부문은 한국 컨템퍼러리 댄스가 당면한 미학적 도전과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7편의 작품들은 개념적 깊이, 신체적 언어의 개발, 형식적 혁신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춤의 경계를 확장하려는 시도를 펼쳤다.

<피안의 여행자들>과 <GRAVITY>는 개념적 야심과 신체적 구현의 균형을 이루며 가장 완성도 높은 성취를 보여주었다. 반면 <녕, 왕자의 길>과 <갓세렝게티>는 흥미로운 주제를 포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무적 언어로의 변환에 있어 한계를 드러냈다.

오늘날의 무용이 단순한 형식실험이나 개념예술에 그치지 않고 신체의 고유한 지성과 감각을 통해 세계를 재해석하는 예술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안무 어휘의 본질적 개발과 동시대적 맥락화 사이의 균형이 요구된다. 무용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향한 의미 있는 시도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작품의 완성도와 예술적 깊이를 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전통예술의 현대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도전과제로서, 앞으로 한국 무용계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더불어, 창작산실의 취지에 따라 예술의 동시대성, 다양성, 실험성을 지향하는 젊은 안무가들을 위한 무대가 더 폭넓게 개방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창작산실’이 파격적 실험에 도전하는 신진 안무가들의 동시대성에 대한 자유로운 구상과 상상을 지원하는 지속가능한 플랫폼으로 기능하며, 한국 무용계의 대안적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감당해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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