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김미영 무용평론가 = 어렸을 적, 학교에 서 있는 동상이 밤이 되면 걸어다닌다는 소문에 무서워했던 적이 있다. 밤에 자기 위해 불을 끄면 책상에 놓여있던 인형이나 사물들이 활동을 시작하는 상상을 했더랬다. 사물들의 주체인 내가 잠에 빠져들고 나면 객체였던 사물들이 세상의 주체가 되는 상상. 누구나 이런 상상을 해보지 않았을까? 이번 작품을 만든 두 예술가는 이러한 자유로운 상상력을 무대에 쏟아놓았다. 기존의 객석 대신 무대 위에 사면으로 배치된 관람석 의자들과 기존 객석의 중간에 가설된 무대(일명 아일랜드 무대)는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일랜드 무대에서 한 남자가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관객들 중앙에 마련된 무대에는 커다란 타워가 두 개 설치되어 있고 각각의 타워 위와 무대 한 켠에 연주를 위한 세팅이 되어 있다. 사면으로 앉은 관객들을 맞은편에 앉아 보고 있자니 이 또한 무대의 한 오브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듯하다. 무대의 설치물들을 관찰하고 있으니 파란 조명을 받은 비닐이 부스럭거리며 무대 뒤쪽에서부터 관객들의 머리를 지나 아일랜드 무대까지 날아간다. 비닐의 움직임과 소리가 마치 바람처럼 물처럼 느껴지며 아일랜드 무대에 있는 남자의 상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지난 6월 16일-17일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The Object>라는 공연이 이머시브 실감공연으로 소개되며 무대에 올랐다. 이번 공연은 경기아트센터·대구문화예술회관·제주아트센터 3개 기관이 함께 한 극장 교류사업으로, 경기도 공연 전 이미 대구에서 공연된 바 있고 이후 제주로 건너가 공연되었다. BTS, 싸이 등 K-POP 스타들의 공연과 평창올림픽 등 굵직한 무대를 만들어온 유재헌 감독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대구시립무용단의 김성용 예술감독이 안무 연출을 맡아 진행되었으며, 이들은 대구시립무용단의 제76회 정기공연 ‘THE CAR’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이번 공연의 또 다른 의미는 한국전통무용을 베이스로 하는 경기도무용단과 현대무용의 대구시립무용단 무용수들이 한 무대에 섰다는 것이다. 긴 소매로 한삼의 역할을 하도록 만든 의상을 입은 경기도무용단의 최은아, 김동훈, 이나리, 이진택, 이예닮 무용수의 에너지 넘치는 움직임들이 빠른 비트와 ‘하!’하며 내는 무용수들의 기합소리와 함께 객석을 들썩인다. 긴 소매를 공중에 뿌리거나 공간을 휘저으며 우리네 전통 움직임을 떠올리기도 하고 미소 띤 얼굴로 소매를 바닥에 내리치며 마음에 응어리진 것들을 해소시켜 주기도 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 간다. 이와는 반대로 다소 정적인 움직임이 배치되기도 하는데 작품은 시종 무대설치와 무용, 연주 등 주매체를 바꾸어가며 각각의 매체가 다양한 변화를 일으켜 관객의 집중도를 유지시킨다.
설치된 타워 이외에도 재미있는 오브제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가 원통으로 생긴 이동식 튜브(터널)이다. 경기도무용단의 움직임이 전통무용에서 기인하여 우리만의 흥을 이끌어 냈다면 대구시립무용단의 신승민, 김분선, 박정은, 김홍영, 김인회 무용수는 이 튜브를 이용하여 할 수 있는 수많은 현대적 움직임을 개발해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정서상태를 표현했다. 투명 아크릴 소재로 보이는 튜브의 외면을 북처럼 두드리는가 하면 튜브 안에서 벽을 타고 올랐다 미끄러져 내려오는 등 원통의 형태를 이용한 움직임들이 막대한 연습량을 자랑하며 일사불란하게 이어졌다. 튜브 안의 작은 세상 속이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굴레인양 무던히도 달리고 애쓰는 모습이 애잔하게 느껴졌는데 바로 그 모습 안에 내가 있기 때문이었다.
또 흥미로웠던 오브제는 형형색색의 신축성 좋은 커다란 주머니이다. 이 안에 무용수가 들어가 이리저리 몸을 늘리며 만들어 낸 형상으로 프로그램 북에는 octopus(문어)라고 소개된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체가 아닌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 튀어나온 유기체의 모습이다. 지금 보고 있는 무대는 현실이 아닌 의식과 무의식, 상상이 뒤엉킨 곳임을 상기시킨다.
다시 아일랜드 무대로 시선을 빼앗기면 그 곳에서 객체와 주체의 도치가 점차 극대화된다. 거대한 비닐에 의해 진공상태가 된 주인공이 허물어져간다. 객체는 주체가 되고 주체는 객체가 되어가는 모습을 쓸쓸히 보여주며 연주자들의 연주만 무대에 남는다. 무대를 채우던 무용수들과 움직임들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사라지며 생각에 잠기다 보면 맞은편의 관객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증이 밀려든다. 공연의 제목 ‘오브젝트’는 특별한 물체를 가리킨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다양한 오브젝트의 선택과 연결을 통해 다양한 시각적 형상(形象)이나 작품이 만들어진다.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싶었다는 유재헌 감독의 ‘낯설게 하기’가 무대의 곳곳에서 관객들에게 상상력을 일으킨다.
이번 공연은 무용예술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다양한 예술분야가 각각의 비중을 가지고 융복합되어 관람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었다. 구조적으로 이끌려가는 스토리 텔링은 아니지만 9개 섹션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전개를 통해 보다 쉽게 작품에 접근할 수 있다. 내가 본 공연 회차에서는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객 연령대를 볼 수 있었는데 대상별로 버전을 확대 발전시킨다면 상업화도 꾀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갖게 된다.
다만 이머시브 실감공연이라는 부가설명은 무색했다. 무대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는 것 외에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는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감공연이기에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체험하고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제작 초반에는 체험형 공연으로 준비했으나 COVID-19로 인해 관객체험이 어려워진 탓에 전면 수정되었다는 후문이다. 제작진의 문제가 아니니 어서 팬데믹이 끝나기를 바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