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도쿄] 최병주 SAI 예술감독 = 숨가쁘게 달리기만 한 2021년, 몇 개월만에 주말이 비어서 마음도 들떴다. 최근 일본 넷플릭스에서 인기 있는 한국 드라마 하나를 완전 정복해 볼까 벼르고 있는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요코하마에 가서 공연 좀 보라는 이종호 선생님 연락이었다.
YPAM(요코하마 공연예술마켓, TPAM의 새로운 이름) 기간인 12월 10-12일에 개최된 이번 공연의 명칭은 ‘DaBY(Dance Base Yokohama) Performing Arts Selection 2021’로, 요코하마 가나가와예술극장(KAAT)에서 상연되었다. 이 공연의 근간은 2020년 6월 창작가 육성 특화사업을 기획/운영하는 민간 레지던스 하우스인 DaBY와 아이치켄예술극장(愛知県芸術劇場)이 서로의 역할을 보완하는 형태로 탄생한 민관 연계 프로젝트이다. 창작과 상연을 연결시켜 작품을 국내외 유통 및 재연의 기회로 결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첫 기획으로 ‘무용의 계보학’과 ‘스즈키 류 트리플빌’을 지난 10월 아이치켄예술극장에 이어 이번 YPAM 기간 중에 공연하였다.
일본의 대표 여성안무가 3인이 펼친 ‘무용의 계보학’
이틀 동안 세 공연에 걸쳐 전 작품을 다 볼 수 있었다. 우선 ‘무용의 계보학’부터 이야기하려 한다. 발레의 역사를 쇄신해온 포킨, 이르지 킬리안, 포사이드의 이념을 계승함과 동시에 거기서 활약해 온 3명의 무용가가 그들의 ‘안무의 원점’이 되는 오리지널 작품을 상연, 또한 ‘안무의 계승/재구성’인 신작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에서의 첫 발레 공연은 1911년 도쿄 황실 근처에 세워진 제국극장의 개막을 기념한〈플라워 발레>이다. 오페라나 클래식 발레 보급을 위해 다음 해 런던 극장에서 활약하던 이태리 무용가 G. V. 로지(Giovanni Vittorio Rosi)를 초청하지만 좀처럼 일본에 정착할 수 없었다.
그 후 러시아 혁명의 혼란을 피해 1919년에 망명하는 엘리아나 파블로바(Eliana Pavlova)가 요코하마 괴테좌에서 공연, 1927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발레 교실을 개설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 후 발레단을 결성, 아시아 투어를 하던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na Pavlova)도 1922년 일본 각지 10개 극장에서〈빈사의 백조>를 48회 추었는데 이 아름다운 자태에 많은 일본인들이 감명을 받았으며, 대표적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도 절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1936년에는 올가 사파이아(본명: 올가 파블로바, Olga Ivanovna Pavlova)가 일본 극장에서 발레를 가르치면서 자주 공연을 개최했다. 일본에서는 러시아 발레리나들인 이 ‘세 명의 파블로바’가 일본 발레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Naoshi HATORI (사진제공=아이치켄예술극장)
내가 본 첫 작품은 미하일 포킨(Mikhail Mikhailovich Fokin)의〈빈사의 백조>였다. 첼로 연주자가 걸어 나와 무대 한켠에 앉으면 연주를 시작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발레리나인 사카이 하나(酒井はな)가 그 섬세한 등의 움직임을 보이면서 춤추는 모습을 소극장에서 가까이 보며 새삼 감탄했다. 안나 파블로바가 앞모습을 보이며 등장했던 것과 달리 점점 변화를 거듭해 뒷모습을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예쁘게 인사를 끝내고 나가는가 싶더니, 두 명의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 나와 건네준 텀블러의 물을 마시고, 거울을 보면서 의상을 수정하는 등 다음 작품의 준비가 무대에서 보여진다. 다시 춤을 추는가 했으나 이번에는 워밍업을 시작한다. 일본에서 주목 받고 있는 극작가/소설가 오카다 도시키(岡田利規)의 연출/안무인〈빈사의 백조 그 죽음의 진상>은 이미 시작됐다. 드디어 콧노래로 곡을 흥얼거리면서 연주자에게 다가가 동작과 설명을 하는데 자신은 이미 이 부분에서 죽음을 예감했다, 혹은 죽는 장면은 자신은 이 포즈를 선호한다 등으로 원형과 신작들을 비교했다. 작품에는 자신의 배를 갈라 해부해 보면 사인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하였는데, 언어로 정확히는 밝히지 않았지만 바다에 버려진 폐기물인 것 같다. 클래식 발레를 컨템포러리화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 자신이 백조가 돼서 사고하고 춤추는 1인극 형식으로 된 이 작품, 상당히 신선했다.

©Naoshi HATORI (사진제공=아이치켄예술극장)
다음은 로잔 국제발레콩쿠르에서 프로페셔널 상을 수상(1988), NDT(1991-1999)에 소속됐던 나카무라 메구미(中村恩恵)는 신작 〈BLACK ROOM〉과 이르지 킬리안 이 그녀를 위해 안무한〈BLACK BIRD>(2001)를 선보였다.

©Naoshi HATORI (사진제공=아이치켄예술극장)
<BLACK ROOM>에는 조명으로 사각의 테두리가 길처럼 나 있다. 흰 마스크를 쓰고 검은 의상을 걸친 나카무라가 자신의 음성 내레이션을 음미하듯 사각 테두리를 천천히 걷는다. 그녀가 “나에게 있어 <검은 방>은 ‘발화하지 못한 채로 묻혀버린 단어들’의 무덤이며, 동시에 그 단어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깃들어 있는 자궁처럼 생각한다”고 했듯이 긴 독백과 긴 여정은 이를 대변한다. 그 후 음악이 흐르면서 처음에는 오른 손부터 시작하여 전신으로 움직임이 옮아간다. 이 작품에서 전체적인 움직임은 아주 조용하지만 손 끝 혹은 손가락이 먼저 방향이나 각도를 제시하고 그것에 리드되면서 동작들이 생성/연결되는 느낌이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못한 채로 묻혀지는 가슴 속 이야기의 애잔함이 블랙 아웃 조명과 함께 흐느낌 소리로 표현되었다.

©Naoshi HATORI (사진제공=아이치켄예술극장)
킬리안의 〈BLACK BIRD>는 원래 듀엣이나, 이번 공연에서는 솔로 버전이었다. 원작과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몸을 비트는 움직임이 그녀와 잘 어울리고 시원스럽고 큼직한 동작들에서 강렬함이 전해졌다.
마지막은 2001년 프랑크푸르트 발레단에 아시아인 최초로 입단, 그 후 포사이드무용단(The Forsythe Company)이 해산하는 2015년까지 15년간 중심 무용수로 활약한 안도 요코(安藤洋子)의 작품이었다. 번뇌에 시달리며 자아를 찾는 여행을 떠난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가 마음에 떠오른 느낌을 스케치하듯 기록한 구어시 <봄과 수라(春と修羅)>를 모티브로 한 신작 〈MOVING SHADOW>가 먼저였다.

©Naoshi HATORI (사진제공=아이치켄예술극장)
무대에는 상자들이 드문드문 배치되어 있다. 속삭임 소리(시의 서문을 영어로 번역)와 함께 아프로 머리(Afro-hair)와 모노톤의 격자무늬 원피스 차림을 한 그녀가 뿌옇고 커다란 원 속으로 무중력처럼 끈끈하게 너울거리면서 걸어 들어오는데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그 느낌이 가장 인상 깊었다. 분위기는 어느 자유분방한 도시의 습기 찬 밤, 뒷골목의 가로등 불빛이 만들어낸 잔영처럼 느껴졌다. 무용수는 발레가 베이스인 금발 머리 컷의 기노우치 노노(木ノ内乃々)와 힙합과 브레이크댄스를 베이스로 하는 야마구치 다이스케(山口泰侑)였는데, 80명의 오디션 응모자 중에서 선정되었다고 한다.
기노우치의 움직임은 정확하게 바닥에 꽂히는 듯 힘차면서도 칼날처럼 예리했다. 야마구치는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스미마셍(여기요)~” 하면서 갑자기 스트리트댄스가 가미된 춤을 반복하는 장면이 있다. 특히, 힙합이나 브레이크 댄스를 기반으로 한 몸이 뒤틀리거나 혹은 로봇 움직임이 삽입된 이 움직임들은,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적인 동작들이 함께하는 놀라운 균형감각이 발바닥에 본드를 붙인 것처럼 아마도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안 넘어질 것 같았다. 나는 공연 내내 그의 움직임과 동선을 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세련된 감각의 무대, 음악, 의상, 그리고 부드럽고 농후한 안도의 춤 색깔과 이 두 사람이 뿜어내는 개성 있고 시선을 앗아가는 젊은 열기가 별미였다.

©Naoshi HATORI (사진제공=Dance Base Yokohama)
포사이드 작품은〈The Loss of Small Detail>의 일부를 재구축한 솔로 버전이었다. 1992년 일본에서 상연된 포사이드의〈The Loss of Small Detail>(미시마 유키오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에 충격을 받았던 그녀가 10년 후 직접 이 작품에 출연했다고 한다. 내가 너무 기대했던 탓인지 발레단 안무가로서 날카로운 동작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발레의 탈구축’이나 ‘오프 밸런스’ 등으로 유명한 포사이드의 파격적 혁신성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쉬웠다.
‘안무의 원점’과 ‘안무의 계승/재구축’이라는 설정이 이번 3명의 안무가들에게 혹은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글로써 표방하는 설정과 작품들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무용의 계보학’이라는 타이틀의 프로그램에 쓰인 각 전문가들의 포킨, 킬리안, 포사이드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일본에서 대학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 열심히 외웠던 추억을 떠올렸다. 나는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았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세 무용예술가의 신작에는 거장들의 스타일과는 다른 무엇을 애써 찾으려고 노력한 감이 있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작품은 자기 자신만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리라.
DaBY 첫 어소시에이트 안무가 스즈키 류(鈴木竜)의 트리플빌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창출과 작품을 국내외 여러 극장에서 상연시키는 것을 목표로 DaBY와 아이치켄예술극장이 협력한 2개의 프로젝트는 ‘무용의 계보학’과 ‘스즈키 류 트리플빌’이었다. 이번에는 ‘스즈키 류 트리플빌’ 공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젊은 세대 일본 무용가들 중에서 스즈키 류는 안무가로서도 무용수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고 있는 예술가이다. 2020년부터 DaBY 어소시에이트 안무가로 취임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일본 안무가들이 그러하듯 이제까지는 안무도, 춤추는 것도, 의상 조달이나 미술을 운반하는 것도, 지원금을 신청하는 것도, 스태프들에게 연락하는 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당연한 일로 여기며 해 왔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코로나의 영향으로 공연이 연기되는 바람에 뜻밖에도 거의 2년이라는 창작 기간이 주어졌으며, 무대 미술, 조명, 의상에 있어서도 그 분야 전문가들과 협력해 단순히 감각적인 안무가 아닌, 설정한 테마에 대해 함께 깊이 고뇌하는 색다른 어프로치로 작품에 임할 수 있었다고 했다.

©Naoshi HATORI (사진제공=아이치켄예술극장)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솔로인〈never thought it would>였다. 이 작품은 괴테의 시〈Selige Sehnsucht>의 한 소절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는데, 스즈키는 이 빛을 향해 날기를 멈추지 않는 한 마리 나방과 끊임없이 춤추는 자신의 모습을 겹쳐 표현했다. 그 감정과 표현이 독창적으로 아주 잘 부각된 작품이었다.
무대 전체에 긴 일자등(一字燈, 일본식으로는 직관형광등 直管蛍光灯)들이 제각기 사선 방향으로 걸려 있다. 암전 후에는 무대 앞 사선 쪽 한 개만이 깜빡거린다. 그가 무대 뒤에서 사선 앞으로 달려 나와 바닥을 향해 쓰러진다. 비트가 들어가는 음악과 함께 엎드린 채로 뒤틀면서, 또는 움츠렸다 폈다 하면서 신체 부위에서 온몸으로 움직임이 퍼져 간다.
그 후 끈끈하면서도 천천히 돌아누운 채로 무대 앞을 가로질러 간다. 이때의 그는 나방이 아니라 한 마리 애벌레처럼 바닥과 밀착하면서 등을 중심으로 상하로 온몸을 구불거린다. 검푸른 조명 속에서 연한 핑크, 연두 등 색깔이 첨가되면서 각각의 일자등 속을 전기가 흐르듯 빛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이윽고 무대 앞 오른 쪽에 다다랐을 때 그는 몸을 일으켜 앉는다. 플로어를 중심으로 구성된 느리면서 끈끈한, 빠르면서 공간을 유연하게 휘젓는 움직임들은 지루해지거나 익숙해짐에 적절한 타이밍으로 변화를 주는 구성이었으며, 무대 중앙 쪽으로 서서히 이동해 간다. 거의 후반부에서 겨우 일어선 그는 마치 나방이 마지막을 불태우는 듯했다. 그러나 절정에 달했을 때도 남발하는 몸부림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힘, 완급조절, 반복, 정지, 스타카토 등이 절제된 몸짓으로 잘 구성되어 있었다.

©Naoshi HATORI (사진제공=아이치켄예술극장)
이 작품에서 가장 높이 사고 싶은 점은 그의 춤이 철저하게 하나의 오브제로서의 역할을 지켰다는 것이다. 무음, 강약의 비트가 함께하는 리드미컬한 음악의 변주, 설치 미술뿐만 아니라 깜빡거리며 때로는 충격적으로 환하게, 때로는 전기가 흐르는 듯한, 때로는 색깔의 변화로 비주얼적인 표현에 절대적으로 공헌한 긴 일자등들, 그 안에서 심플한 공간 패턴과 군더더기 없는 자태로 정면 승부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절한 춤이 잘 어울린 작품이었다.

©Naoshi HATORI (사진제공=Dance Base Yokohama)
두 번째 작품은 4인무인〈When will we ever learn?>. 이 작품에서 스즈키는 3명의 무용수와 함께 못 다한 한을 풀려는 듯 엄청난 기량과 속도감으로 무대를 제압했다. 그래서 이 작품의 테마가 무엇인가, 혹은 관객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등을 파헤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작품 자체가 주는 감각적인 느낌을 공유하면서 보았다.
무대에는 마름모꼴의 공간이 클로즈업되어 있고 마름모면의 좌우에는 세 대씩 조명기가 설치되어 있다. 각 무용수에게는 마름모 밖에 서 있는 장소를 고정시켰다. 검은 가죽 점퍼를 걸친 스즈키의 리드에 이끌려 들어와 마름모꼴 안에서 황색 정장 차림의 무용수들은 개성적인 춤을 춘다. 첫 부분이 각자의 솔로가 중심이었다면, 그 다음 장면을 알리듯 무용수들이 마름모 밖 조명기 부근에서 윗도리를 벗고, 그 다음은 바지를 벗고 등장해서 시간차로 솔로, 듀엣, 앙상블 등 다채로운 구성을 보여준다.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 닐 영(Neil Percival Young), 데이비드 보위(David Robert Jones), 밥 딜런(Bob Dylan), 피터 시거(Pete Seeger) 등의 록이나 팝음악이 부분부분 삽입되었다.

©Naoshi HATORI (사진제공=Dance Base Yokohama)
그가 영국 램버트 스쿨에서 수학, 아크람 칸(Akram Khan),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Sidi Larbi Cherkaoui), 필립 드쿠플레(Philippe Decouflé), 인발 핀토&압샬롬 폴락(Inbal Pinto & Avshalom Pollak) 등의 작품에서 경험을 쌓았듯, 3명의 무용수도 바체바무용단이나 NDT 등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다, 그만큼 그들의 춤 기량도 뛰어났지만 호흡을 맞추는 능력도 뛰어났다. 특히 군무는 스타카토나 강도가 있어서 박력 있는 혹은 역동적인 동작들이라기보다는 너무나 매끄럽고 너무나 빠르지만 항상 우아하고 안정감이 있었다. 이런 움직임들이 물 흐르듯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런 연결에 힘입어, 어느 각도에서 어느 타이밍에 사진을 찍는다 해도 세련된 공간 구성이 돋보이는 컷이 나왔을 것이다. 무용수들이 이동한 후에 어떤 형태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동하는 중에도 항상 그럴듯한 그림이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기대 이상으로 많은 연습시간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 완벽한 하모니는 또 다른 예상외의 결실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은, 일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Proxy>였다. 이 작품은 옛날 인간들에게 있어 유령이란 익명성을 획득하기 위한 장치로서 마음 속에서 침묵해버린 감정이나 단어들을, 유령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대변하는 것에 의해 자유로워진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현대에 있어서는 신체가 실체를 잃어버린 채 유령화하는 시대, 즉 가상세계의 아바타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이 무대에는 버려진 인형들을 해체하고 잇대어 새로운 캐릭터를 제작하는 인형작가 오데트 피코의 독특한 작품들이 6명의 무용수와 같이 출연한다. 검정 티셔츠에 치마 차림인 한 소녀가 느리고 부드럽게 그리고 돌발적인 정지를 반복하면, 남녀 무용수들이 각자 인형을 들고 나와 무대 앞 횡렬로 서서 고개를 숙인다. 괴상한 생김새를 한 이 인형들이 각자의 분신이기라도 한 듯, 자신 앞에 세워 놓고 무언가를 호소하는 제스처에도 가속도가 붙어 점점 격해진다. 작품 전체에서 이 장면은 변화를 주면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 작품의 핵심요소이다.
무용수들이 전부 검은 티셔츠에 바지 차림인 의상이 마치 가부키에서 보이지 않도록 검은 의상을 입고 배우를 돕는 구로코(黒子) 역할을 연상케 하며, 이들이 인형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군무가 이루어질 때는 격한 숨소리, 발소리 등 강렬하고 절도 있는 유니슨, 한 명이 춤추면서 인형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면 동시에 무용수들도 쓰러지는. 화려한 음악과 사이키 조명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는 집단적 표현 등도 독특했다. 중간에 인형을 들고 서서 엄청 화가 난 듯 격한 숨소리와 흐느낌을 동반하면서 한 동작만 반복하는 격렬한 제스처 등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여자 솔로와, 유연하면서 텀블링 등 바닥을 위주로 움직인 남자 솔로도 좋은 대비를 이뤘다.

호러 영화를 보는 듯 좀 으시시한 기분으로 감상했지만, 유령을 상징하는 인형들을 통해서 무용수들이 언어가 아닌 신체 표현으로 보여준 각각의 외침들은 정말 박진감 있고 흥미로웠다. 특히 10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들의 정형화되지 않은 솔직한 표현들은 어둠 속의 반딧불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스즈키 류는 이번 공연에서는 감각적인 안무가 아닌 각 분야 전문가들과 협력하는 색다른 어프로치로서 컬렉티브한 방법을 지향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첫 작품 <never thought it would>는 일자등의 설치미술 및 빛의 사용, 긴박감을 더해 주는 음악과 더불어 스즈키의 독창성이 가장 조화롭게 잘 나타났다. 두 번째 작품〈When will we ever learn?>은 무대 안에서도 마름모꼴 조명 안에서의 제한된 공간 사용을 고수하는 전개와 함께 무용수들의 화려한 기량이 가장 빛났다. 세 번째 작품〈Proxy>는 일본적인 사고관으로 전개해가면서도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이 시대의 갑갑함을 유령이라는 독특한 매개체를 이용해 순수하면서도 통쾌하게 잘 표현했다.
DaBY의 발족과 더불어 첫 단계로 기획된 두 프로젝트 ‘무용의 계보학’과 ‘스즈키 류 트리플빌’이 완성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고 인내의 시간을 감수해야 했을 아이치켄예술극장 총괄 프로듀서 겸 DaBY 예술감독 가라츠 에리(唐津絵里), 그녀와 함께 마지막까지 희망으로 참고 견뎌낸 안무가와 출연자, 그리고 모든 스태프와 관계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