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유희성 공연칼럼니스트 = 세상 눈치 보지 않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야기 놀이판 뮤지컬' <판>이 다섯 번째 판을 펼치고 있다. 뮤지컬 <판>은 지난 2015년 정은영 작가와 박윤솔 작곡가가 대학원 수업 과제로 만든 20분짜리 작품에서 시작되었다.
‘판’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그 어떤 역할과 규범, 권위에서도 벗어나 마음껏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징적 공간이다. 거기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늘 우리 주변에 있지만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자연스럽게 머물다 흩어지는 공기처럼, 때로는 흐르는 강물처럼, 알 듯 모를 듯 도도하게 흐르다 어느새 휘몰아치듯이, 거침없이 전기수의 입담을 통해 세상을 풍자한다. 그 이야기의 힘을 믿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시나브로 세상을 바꿔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의 힘'이라는 현상에 대한 믿음을 질펀한 풍자와 해학을 통해 시원하게 ‘판’에 드러낸다.
그들만의 판인 ‘매설방’에 은밀하게 모여들어 통쾌하고 호쾌하게 세상을 풍자하는 입담과 더불어 기지와 해학이 마치 연리지처럼 엉키고 버무려지니 결코 풀리거나 헤어날 수 없다. 이야기꾼 전기수(傳奇叟)의 이야기 재간과 질펀한 농의 향연의 마력에 빠져들어 결코 헤어날 수가 없다.
매설방의 안주인 춘섬의 안내로 시작해 산받이의 자연스런 재담의 전초전부터 다양한 꾸밈과 안내를 통해 생겨나는 호기심과 기대감은 여지없이 전기수의 청산유수 입담과 연극적이고 자연스럽고 흥겨운 가락의 옷을 입은, 적절하고 적합한 안무를 통해 각양각색 놀이판의 유쾌하고 통쾌하고 듣고 싶은 이야기 판을 속 시원하게 전개한다.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 무용, 다원예술 등 다양한 공연예술 장르 가운데 한국 유일의 공연장르라고 볼 수 있는 창극, 마당놀이와 더불어 이야기꾼을 앞세운 ‘전기수전’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을 통해 한국적 공연양식의 세계화를 꿈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서울예술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전기수 이야기였던 가무극 <금란방>을 제작한 적이 있었고, 당시 정동극장 손상원 대표이사와 의기투합해 정동극장에서 뮤지컬 <판>과 가무극 <금란방>을 연달아 올려 일종의 ’전기수 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전기수 음악극'이라는 새롭고 현대적인 공연양식을 발전시켜 보자고 했었으나, 두 사람 다 임기가 만료되어 실행하지 못했던 게 못내 아쉽다.
당시 두 작품 모두 변정주 연출가의 작품이기도 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진행되었었다.
마침 <판>과 <금란방>의 조연출로 함께 작업했던 박준영 연출이 이번 <판>의 본격적인 연출로 참여,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주 찰지게 동시대에 어울리는 해학과 질펀한 재담, 농을 되살려 가일층 뻐꾸기들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며 텍스트에 적합한 볼거리와 무대 미장센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확실하게 구축해 냈다.
이번에 제작사 아이엠컬쳐의 정인석 대표가 새롭게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해 제반 프러덕션을 새롭게 재정비, 대학로 대표 문화콘텐츠의 가능성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전기수 서사 작품의 무대미술 장인이기도 한 남경식의 무대 디자인은 기능성과 더불어 배우들의 동선을 고려한 적재적소의 도드라짐과 여백의 완급조절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구성을 실현, 조명과 배우들의 의상을 통한 세련된 무대 미장센을 구축했다, 조명 디자인 이현규의 공력과 고보를 활용한 빛의 강약 조절은 서사를 주도했으며 자칫 불편해질 수 있는 음향적 배치와 배우들 가창과의 음악적 블렌딩을 매끄럽고 세련되게 구현한 권지희 음향 디자이너를 새삼 주목하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여러 작품에서 인형과 퍼펫 디자이너로 활약해온 이지형의 인형은 상징과 비약을 넘나드는 구조와 틀을 통해 인형으로 하여금 제3의 배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게 만들었다.
배우들은 그야말로 뻐꾸기들의 호응에 화답하듯 무대에서 거의 날아다녔다.
달수 역의 김지철은 그동안 많은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음악적 안정감을 가일층 여지없이 드러내며 다양한 표정과 더불어 빈 곳을 메꾸고 음악적 블렌딩을 구축하는 데 큰 몫을 해냈다.
호태 역 원종환의 춤과 노래, 연기적 완숙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만약 전기수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장르가 독립적인 장르로 구체화된다면 당연히 인간문화재급으로 추대해도 될 것 같다. 그야말로 매 순간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지 않고 최고 수준의 장인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았고, 특유의 익살스런 재담과 해학, 질펀하지만 결코 야하거나 추하지 않은 농의 간극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그야말로 절대 장인의 경지에 올라, 배우들과 뻐꾸기들이 함께 한 무한 우주공간을 마냥 쥐락펴락했다.
춘섬 역의 김국희 또한 노련함과 친숙함으로 분위를 이끌고 압도해 가는 기운으로 판의 안주인 역할을 제대로 보여 주었으며 판의 시작과 진행, 마무리까지 자연스럽게 집중하고 호응하도록 유도하며 온몸으로 가락을 잉태한 산받이 역 최영석의 노련함과 정다움이 사뭇 보기에 좋았다.
전기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독립 장르로서의 이야기 판이, 한 사람이 한 권의 이야기책이 될 수 있듯이, 무궁무진 새로운 ’이야기 판‘에 온갖 새떼가 날아오듯이, 판의 이야기가 더 멀리 더 높이 훨훨 날아 올라가길 기대해 본다.
공연은 지난 9월 19일 시작해 오는 11월 26일까지 계속된다. 대학로 TOM 1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