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조일하 기자 = 국립극단이 올 한해 선보일 12편의 공연 라인업을 발표했다. 올해의 라인업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새로움'이다. 작품 분류로 보면 고전, 레퍼토리, 근현대극, 창작신작, 해외신작 등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고려해 균형감 있게 안배했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과 첫 선을 보이는 작품 모두가 '새로움'을 지니고 있다.
이와 함께 국립극단은 지난해 11월 김광보 단장 겸 예술감독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새로운 기관장 체제를 준비하고 있다.
<스카팽>은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객석'으로
2019년 초연 당시 주요 연극상을 휩쓸며 매 공연 매진을 기록했던 <스카팽>(몰리에르 원작, 임도완 각색·연출)이 전 회차 ‘열린 객석’으로 4월에 찾아온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만큼 장애인, 노약자, 어린이 등 보다 폭넓은 관객층이 열린 환경에서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취지다. ‘릴랙스트 퍼포먼스(relaxed performance)’라고도 불리는 ‘열린 객석’은 통상적인 공연과 달리 공연 중 관객이 자유롭게 입․퇴장할 수 있도록 객석을 열어 두며, 조도와 음향을 부드럽게 조절해 눈과 귀가 예민한 관객들을 보다 편안하게 해준다. 미동 없이 공연을 관람하는 ‘시체관극’이 매너로 여겨질 만큼 관극문화가 경직되고 있는 시대에,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보다 열린 마음으로 공연을 즐기는 ‘느슨한 관극문화’를 지향하겠다는 뜻이다.
<활화산> 5월 명동예술극장
5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하는 <활화산>은 1974년 국립극단 제 67회 정기공연으로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초연됐던 작품으로, 한국연극의 거인 고(故) 이해랑이 연출했다. 50년 만에 다시 올리는 <활화산> 연출은 극단 그린피그 상임연출이자 한예종 연극원 교수로 활동 중인 윤한솔이 맡았다. 윤 연출은 <두뇌수술> <안산순례길>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등 사회적 메시지와 미학적 완성도를 추구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을 더해 생동감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 왔다. 이번 작품에서 윤 연출은 과거 한국사회의 생활상과 더불어 시대착오적이었던 모습을 유머러스한 감각으로 풀어내고, 등장인물 중 원작에서는 일부로 다뤄졌던 아이들의 시선을 가미할 예정이다. 특히 2024년은 차범석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더욱 뜻깊은 무대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7월 <햄릿> 명동예술극장
7월에 개막하는 <햄릿>(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정진새 각색, 부새롬 윤색·연출)은 ‘관객이 애타게 부르던 그 이름’이다. 2020년 제작 당시 배우 이봉련을 햄릿에 전격 캐스팅해 화제가 됐으나, 코로나19로 관객과 만나지 못한 채 온라인 극장을 통해서만 몇 차례 공개됐었다. 화면 너머로 만난 무대임에도 관객들은 편견을 깨부수는 이봉련의 파격적인 연기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3년간 꾸준히 국립극단 SNS에 재공연 요청 DM(다이렉트 메시지)이 올라올 만큼 관객들의 관심과 갈증이 대단했던 작품이다. 이번에는 무대디자인과 의상 등 전체적인 비주얼 콘셉트를 변경, 새로운 미장센과 더 날카로운 시대성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창작공감: 연출]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4월, 천선란 SF소설 『천 개의 파랑』이 연극으로 찾아온다. 연출을 맡은 장한새는 2023년 국립극단 작품개발사업 [창작공감: 연출]을 통해 7개월 간 ‘과학기술과 예술’이라는 주제로 리서치, 스터디, 특강, 자문과 워크숍 과정을 거쳐 로봇 혹은 비인간의 개념이 무대에 존재할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장 연출은 모션 캡처와 입체음향 기술 등을 활용,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진 ‘연극적 메타버스’를 무대 위에 구현할 예정이다. 발달한 기술이 배제하고 지나쳐버리는 이들, 고도화된 자본 시스템에서 소외된 이들, 부서지고 상처 입은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이들을 내내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서사로 문학계에 돌풍을 일으킨 이 작품은 <왕서개 이야기> <붉은 낙엽> 등으로 대단한 저력을 과시하며 활발한 극작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김도영의 각색을 거쳐 무대 언어로 변모한다.
2023년 [창작공감: 연출]을 통해 개발된 또 하나의 작품인 김연민의 신작(김연민 작·연출/제목 미정)은 7월에 관객과 만난다. 장한새와 마찬가지로 7개월의 작품개발 과정을 거친 김연민은 과학기술을 어떻게 ‘이야기’와 접목시켜 드라마를 만들 것인가에 주목했다. 인구감소로 폐쇄조처가 내려진 소멸지역에 전기공급 중단이 시작된다는 설정 하에, 전기망으로 표현한 ‘소멸일기’를 소재로 기술문명의 이기가 사라져가는 마을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위해 공간기록센서 기술을 공연에 적용하여 ‘기억’과 ‘장소’라는 화두를 던진다.
명동예술극장 9월 첫 무대 <간과 강>, 연말 해외신작 <사일런트 스카이>
2020년 차범석희곡상을 수상한 <간과 강>(동이향 작, 이인수 연출)도 9월 무대에서 첫 선을 보인다. 일상에 지치고 무감각해진 주인공 'L'이 의학적으로 판명되지 않은 자신의 통증과 대면하는 이 작품은, 진화론을 통해 현대인의 인식을 지배하는 ‘공허’를 꺼내어 보여줘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짧은 대사들을 감각적으로 배치해 어딘가 익숙하지만 처음 경험하는 신선한 재미를 선사할 예정이다. 섬세한 인물 해석과 군더더기 없는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인수가 연출을 맡아 새로운 무대 미학을 선보인다.
연말의 명동예술극장은 해외신작 <사일런트 스카이>(로렌 군더슨 작, 김민정 연출)가 따뜻하게 채운다. 로렌 군더슨은 아메리칸 씨어터지가 선정하는 ‘미국에서 작품이 가장 많이 무대화된 극작가 TOP20’에 매 시즌 상위로 랭크될 만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극을 집필해 왔다. 여성은 투표조차 할 수 없었던 19세기, 하버드 천문대 소속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연극은 과학에 대한 열망과 개척정신으로 천문학을 바꿔버릴 만한 발견을 한 강인하고 총명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라이브 피아노 선율이 감미롭게 어우러진 매혹적인 무대를 통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슴 벅차는 이야기를 전한다.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창작공감: 작가], 청소년극 <슈퍼 파워>
하반기 소극장 무대는 [창작공감: 작가]가 책임진다. 8월 무대에 오르는 <은의 혀>(박지선 작, 윤혜숙 연출)는 ‘돌봄 연대’를 키워드로, 기댈 곳 없이 살아가는 정은과 은수가 만나 서로의 보호자가 되어주는 이야기를 통해 ‘돌봄’이 한 사람이나 가족의 희생을 통해 이뤄지는 낡은 가치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를 이어주는 적극적인 행동임을 이야기한다. 리듬이 살아 있는 맛깔난 대사와 랩 등 음악적 요소가 살아 있는 희곡은 서정적 터치와 명료한 연출로 두산연강예술상, 서울예술상 등을 수상하며 주목받고 있는 윤혜숙 연출이 맡았다.
10월에는 [창작공감: 작가] 두 번째 작품 <모든>(신효진 작, 김정 연출)이 무대에 오른다. 인류 인구가 20만여 명밖에 남지 않은 디스토피아적 근미래, 인간지성의 집대성인 AI가 전 가정에 보급된 세계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 방향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신효진 작가의 전작 <머핀과 치와와>에서 구축한 SF 세계관 안에서 또 다른 구역을 그리고 있는 후속작으로, 연출은 지난해 국립극단의 5시간짜리 역작 <이 불안한 집>을 통해 무르익은 연출력을 보여 준 김정이 맡는다.
청소년극 신작도 어김없이 준비되어 있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준비 중인 <슈퍼 파워>(가제)(박근형, 이미경 작, 윤혜진 연출)는 2022년 선보인 [트랙터]에 이은 두 번째 청소년극 단막극 연작으로, 청소년이 갖고 싶어 하는 힘과 초능력의 근원을 탐구하고, 우리 사회에 작동하는 힘의 원리와 위트 있게 연결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힘’의 실체를 풍자적으로 그릴 예정이다. 2012년 국립극단 청소년극 <빨간 버스>로 청소년극에 대한 인식을 넓힌 중견 작가 박근형과 <그게 아닌데> 등으로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은 극작가 이미경이 참여하고, <X의 비극> 등으로 주목받은 윤혜진이 연출을 맡는다.
오현실 국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 직무대행은 “국립극단은 2024년에도 다채로운 층위의 작품을 소개할 수 있도록 라인업의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사업적 측면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 3대 혁신 전략 중 ‘국민의 문화향유 환경 혁신’을 위해 지방 공연을 다각화하고 정부 기조와 발맞추고자 한다. ‘최고의 예술, 모두의 문화’ 위해 보다 폭넓은 국민 및 예술가와 함께 하는 국립극단이 되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