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조일하 기자 = 국립극단은 8월 15일부터 9월 8일까지 신작 <은의 혀>(박지선 작, 윤혜숙 연출)를 홍익대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선보인다.
선 긋기, 남에게 폐 끼치지 않기,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기를 이상적인 태도로 간주하는 '무해의 시대'에 사회적 연대와 돌봄의 가치를 말하는 작품이다.
자식과 부모에게 짐이 될까, 아는 사람들에게 폐가 될까 걱정하면서 내 한 몸은 내가 지켜야 한다가 선의의 순리가 된 오늘날, 이 작품은 "나를 돌봐달라"라고 마음 편히, 당당히 말한다. 돌봄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민폐가 아닌 당연한 삶의 활동임을 설파하는 <은의 혀>는 한국 사회가 한동안 주목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짚어야 하는 동시대성이 강하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은의 혀>는 <견고딕-걸> <누에> 등 뛰어난 연극적 상상력으로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2021년 대전창작희곡상 대상, 2021년 통영연극예술축제 희곡상을 받은 박지선 작가의 신작이다. 국립극단의 작품개발사업 [창작공감: 작가]를 발판으로 1년여의 집필 과정을 거쳐 탄생한 <은의 혀>는 치열한 고심 끝에 만들어 나간 한 줄 한 줄의 대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박 작가는 “박지선만 쓸 수 있는 희곡이라는 말을 듣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라며, 일상어로 쉽게 풀어쓴 스낵 콘텐츠들이 대세를 이루는 시대에 역행하는 세찬 문학성으로 언어의 미학적 정수를 보여주는 극본을 완성했다.
박지선 작가는 <은의 혀>에서 주로 주변 인물로 소화되거나 무대의 주역으로 만나기 힘든 중장년 여성들이 겪는 노동과 돌봄의 서사를 아름다운 문체로 써내려가며 그녀들의 ‘서로 폐 끼치는 삶’을 따뜻하게 조명한다. 중장년 여성들이 일하는 돌봄 노동의 현장을 다룬 신문의 짧은 기사에서 작가는 사회적 주류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지만 분명하고 또렷이 존재하는 인물들을 발견하고는 작품을 구상했다.
사고로 아들을 잃은 은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장에 조문하러 간다. 조문을 갈 때마다 은수는 아들의 장례를 치를 때 함께 했던 오지랖 넓은 상조 도우미 정은과 마주친다. 은수는 정은을 피하려 하지만 정은은 은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밥을 권하고, 술을 건네고, 마주 앉는다. 어느 날 정은은 자신은 반짝이는 '은의 혀'를 가졌다는 허랑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둘의 경계선은 점차 흐릿해지고 서로의 한편에 기댈 언덕이 마련된다.
연출을 맡은 윤혜숙은 “전쟁, 성차별, 인종주의 등 다양한 사회적 사안들은 개인마다 연관성에 따라 각자 다르게 거리감을 느끼겠지만 ‘돌봄’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예외 없이 주고받게 되는 것”이라며 “꼭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지역사회부터 반려동물까지 각자 경험하는 돌봄의 모습들은 다양하지만, 필수불가결한 생애주기의 사안이라는 점에서 모든 관객과의 공감대 형성이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윤혜숙 연출은 전작들에서도 꾸준히 돌봄의 문제와 가치를 다뤄왔다. 극 요소들을 균형적으로 안배하고 조화시키면서도 각각의 존재감과 개성을 잃지 않도록 감각적인 터치를 더하는 탁월한 연출력으로 서울예술상 연극부문 우수상, 두산연강예술상,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 3, 한국연극 공연 베스트 7 등 주요 연극상을 석권했다.
이번 <은의 혀>에서 윤 연출은 희곡이 가진 시각적 요소뿐만 아니라 청각적이고 공감각적인 재료들에도 집중해 무대를 명랑하고 따뜻하게 채운다. 죽음이나 장례, 돌봄이 어둡고 비극적인 소재로만 다뤄지지 않도록 유쾌한 라임의 노래, 통통 튀는 움직임 등을 더해 극장을 찾은 관객에게 생생하고 깊이 기억되는 위안을 전할 예정이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애끓는 모성애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배우 이지현이 정은 역을 맡는다. 이지현은 서울연극제 연기상, 동아연극상 신인연기상 등을 수상하며 <잘못된 성장의 사례> <킬 미 나우> 등 연극뿐 아니라 드라마 <경성크리처> <낭만닥터 김사부 2, 3> <슬기로운 의사생활> 등 브라운관과 무대를 넘나드는 활발한 연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은수 역으로는 연극 <마른대지> <우리는 이 도시에 함께 도착했다> 등에서 뛰어난 감정해석 능력으로 높은 몰입도를 안겨준 강혜련 배우가 함께한다. 국립극단 시즌단원 이경민, 이후징, 정다연도 합류할 예정이다.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으로 해체를 향해가는 한국사회에 담담하지만 활기차게 손을 내밀 <은의 혀>는 소외 없는 관람기회 제공과 장벽 없는 연극을 목표로 공연기간 접근성매니저가 상주한다. 한글자막해설, 접근성 테이블, 이동지원을 전 회차 운영하며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사흘간은 터치투어도 진행한다. 8월 25일에는 공연 종료 후 작가 박지선, 연출 윤혜숙, 배우 전원이 참석하는 예술가와의 대화도 진행할 예정이다.
입장권 예매는 국립극단 홈페이지와 인터파크. 가격은 전석 3만5천원이다. 문의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