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오는 8월 18일부터 25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로열오페라하우스 2017년 시즌 프러덕션의 <오텔로>가 올려진다.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요나스 카우프만 주연, 안토니오 파파노 지휘, 키스 워너 연출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던 역작이다. 브루노 포엣의 빛의 대비가 분명한 조명, 섬세한 디테일을 자랑하는 카스퍼 글라너의 의상, 모던하면서도 시대를 반영하는 보리스 쿠딜리카의 세트 디자인도 대작의 가치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예술의전당은 테너 이용훈과 테오도르 일린카이를 전면에 내세운다. 두 사람 다 세계 유수의 <오텔로> 무대에 서온 스핀토 테너들이다. 이용훈은 2021년부터 시드니 오페라극장과 바이에른 극장에서, 테오도르 일린카이는 2024년에만 조지아의 트빌리시 오페라극장과 루마니아 티미쇼아라에서 오텔로를 노래했다. 일린카이의 경우, 트빌리시에서 이번에 이아고를 맡는 니콜로즈 라그빌라바와 함께 연기했다. 이용훈 역시 코벤트가든의 이아고였던 마르코 브라토냐와 시드니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고 이번에도 함께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브라토냐의 건강 문제로 프랑코 바살로가 이아고를 하게 되었다. 데스데모나 역에 캐스팅된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프라노 흐라추히 바센츠는 2011년부터 무려 10회나 데스데모나를 불렀으며, 키스 워너의 로열오페라 프러덕션에도 2회 참여한 경력자다. 그리고 미미와 백작부인으로 국제 무대에서 활약을 펼쳐온 소프라노 홍주영이 데스데모나로 데뷔한다.
지난 8월 5일, <오텔로>의 주역들인 이용훈과 테오도르 일린카이, 니콜로즈 라그빌라바, 데스데모나 역의 흐라추히 바센츠와 홍주영, 그리고 마에스트로 카를로 리치를 만났다.
“고국에서 데뷔 무대를 갖는다면 꼭 <오텔로>로 관객 앞에 서고 싶었습니다. 저는 공연 스케줄상 2년 전에는 제안 받아야 제 일정을 운용해볼 수가 있는데, 한국은 오페라 제작이 임박해서 늘 연락이 온 탓에 데뷔무대 성사가 어려웠습니다.”
사실 이용훈은 지난해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로 국내 무대에 데뷔했다. 그때 역시 임박해서 제안을 받았지만, 마침 유럽에서의 공연들 사이 2주의 시간이 비어 가능했던 무대였다. 원래 <오텔로>가 그의 데뷔 예정작이었다. 2022년 예술의전당에 장형준 사장이 부임하자마자 시드니에서 공연 중인 이용훈에게 전화해 2년 뒤인 2024년 캐스팅을 제의하며 어떤 작품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고. 이용훈은 항상 마음에 품고 있던 <오텔로>를 이야기했고, 예술의전당은 2002년 로열오페라하우스 프러덕션 <오텔로>를 공연한 이래 긴 인연을 유지해온 로열오페라하우스의 새로운 <오텔로> 프러덕션을 선택했다.
이용훈에게 <오텔로>는 왜 특별한 것일까.
“<오텔로>라는 작품을 공부하면서 유럽 무대에서 동양인으로 활동하던 초창기가 떠올랐습니다. 선배들은 더 했겠지요. 유러피안들과 공연을 하고 어울리면서 오텔로와 같은 마음을 느꼈습니다. 라 스칼라 데뷔 시절, 분명 퍼스트 캐스트로 초청받아서 갔는데도 2주 동안 리허설에 참여를 안 시켰어요. 오히려 제 커버가 리허설을 했어요. 따지니까 ‘너는 이탈리아인이 아니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호텔방에서 홀로 연습하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5년 정도 지나자 저도 제법 알려져서 그런 일은 겪지 않게 됐지만... 베네치아의 장군이지만 무어인인 오텔로가 꼭 저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스핀토 테너들에게 <오텔로>는 꿈의 작품이자 캐릭터다. 이용훈과 테오도르 일린카이는 각자 어떤 오텔로를 보여줄 것인가.
“오텔로를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죠. 우리는 지금도 매일 누군가를 사랑하고 질투하고 배신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을 지닌 인간들이죠. 그러니까 진짜 이야기(True story)인 거죠, 복합적인 사건과 감정들이 실재하는. 베르디의 완벽한 음악을 트루 스토리로 표현해내는 일은 성악가에게 커다란 특권입니다. 오텔로는 굉장히 어두운 캐릭터죠. 그러나 각각의 오텔로는 다른 컬러의 어둠을 표현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나만의 컬러를 입히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다른 컬러의 오텔로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누리시기를.” (테오도르 일린카이)
“오텔로는 모든 테너들이 하고 싶어하지만, 모두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닙니다. 저도 오랫동안 꿈을 키웠어요. 마리오 델 모나코가 하는 오텔로의 노래를 들으면 엄청난 컬러 체인지를 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어가거든요. 아픔, 갈등, 사랑, 질투 같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소리의 컬러가 모두 달라서 정말 어려워요. 등산가가 에베레스트를 정복해가는 것처럼 거대한 도전이에요. 델 모나코조차 ‘오텔로를 부른다는 것은 마치 하룻밤에 세 편의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것 같은 모험’이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오텔로는 강한 인간이지만 소심하기 짝이 없죠. 숱한 공을 세운 전사이면서 동시에 연약함, 열등감, 지독한 사랑을 품고 있죠. 차마 표현하지 못하는 아기자기한 사랑의 감정도 있고. 목소리로 이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을 표현해내는 작업이 흥미롭습니다. 포르테, 피아노 같은 악상이 아니라 감정적, 음악적으로 언어를 뛰어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노력합니다. 인간 오텔로의 괴로움과 질투, 사랑과 분노를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한국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용훈)
베르디의 작품에 나오는 악역은 대부분 이유 있는 빌런들이다. 베르디는 다면성을 보여주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빌런에게 서사를 부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아고는 순수 악 그 자체로 보여진다. 이아고에 대한 이야기를 니콜로즈 라그빌라바에게 들어보았다.
“저는 본래 악역을 좋아합니다. 즐기고 있죠. 오페라에서 악역은 선명한 컬러를 드러낼 수 있거든요. 이아고라는 인물은 참 매력적입니다. 퍼스트맨이 되고 싶었으나 실패한, 운이 없는 2인자. 이아고를 연기할 때마다 원작을 보는 관점도, 셰익스피어가 쓴 대사의 느낌도, 작품의 색깔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위험한 빌런이지만 그가 지닌 복잡미묘한 심리를 음악에 담아내려 합니다. 카를로 리치와의 작업을 통해 많은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다들 악역을 심판하려 하지만, 이아고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다. 퍼스트맨의 신임을 얻기보다 퍼스트맨을 부숴버리는 욕망을 실천한다. 악행을 위해 그림자 속에 머물기로 결정하면서 차라리 빛을 없애버리는 길을 선택한 이아고. 라그빌라바는 이아고를 가리켜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베테랑 데스데모나, 흐라추히 바센츠는 이번 예술의전당에서 11번째 데스데모나를 노래한다. 여러 프러덕션을 경험한 입장에서 로열오페라 프러덕션의 강점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저는 오래전 처음 데스데모나를 할 때부터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대체 왜 카시오를 자꾸 도우려 하는지, 상황이 악화되는데 왜 자꾸 남편을 거스르며 부탁을 하는지...... 여러 연출가들의 프러덕션을 경험하면서 데스데모나의 동기를 점점 이해하게 되었죠. 그녀는 친구인 카시오를 위해 싸움에 나선 거에요. 키스 워너는 데스데모나를 희생자가 아닌 파이터로 설정했어요. 키스 워너 프러덕션은 디테일하고 설득력있는 심리묘사가 특징이에요. 데스데모나는 절대 악 이아고의 얼굴 앞을 날아가는 비둘기 같죠. 신이 보낸 사람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악을 분별하는 법이니까.”
데스데모나에 도전하는 홍주영은 “제가 많이 했던 미미는 살기 위해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 살고 싶어하는 여성이죠. 그에 비해 데스데모나의 사랑은 순정입니다. 질다와도 비슷한 것 같아요. 현대인들에게서 찾기 힘든 순정과 신뢰를 데스데모나를 통해 보여드리려 해요. 저는 카를로 리치와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일매일 흥분 가득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흐라추히 바센츠와 홍주영은 2013년 베르디 성악 콩쿠르에서 만났던 사이다. 오페라를 위한 첫 미팅에서 바센츠는 홍주영을 바로 알아보았다며, “베르디 콩쿠르에서 만났고 그때 둘 다 수상을 했었는데(당시 1위 없는 2위가 바센츠, 3위가 홍주영), 11년이 지나 베르디의 작품에서 만나다니 너무 반갑고 기대된다”고 말했다.
모두가 함께해서 영광이라고 입을 모으는 마에스트로 카를로 리치는 이탈리아에서 만났던 많은 한국인 성악가들의 고향에서 공연하게 되어 기쁘다고 내한 소감을 밝혔다. “역시 한국인 성악가들이 이탈리아에 많이 가는 것 같아요. 리허설 때 이탈리아어가 통해서 편안하답니다.”
마에스트로에게 <오텔로>를 준비하는 과정과 작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를 물었다.
“오텔로가 테너들의 드림 롤(Dream Role)이라고 했듯이, 지휘자로서도 <오텔로>는 꿈의 작품입니다. 다른 작품들보다 훨씬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크거든요. 베르디는 위대한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악보에서 음표 하나하나가 드라마에 딱 맞게 기표되어 있는 것을 보면 놀랍다니까요. 베르디 음악의 드라마와 아름다움을 잘 살리는 것이 저의 역할입니다.”
카를로 리치는 1막의 첫 20분을 주목해달라고 말했다. 터키 함대를 무찌른 베네치아 장군 오텔로가 폭풍우를 뚫고 키프로스 섬에 귀환하며 ‘에술타테(Esultate)!’를 부르는 장면이다. 80명의 웅장한 합창, 폭풍과 번개를 묘사하는 브루노 포엣의 조명, 아크로바틱한 전투 장면, 영웅의 서사를 시작하는 음악의 회오리로 관객의 혼을 쏙 빼놓을 예정이다. 헐리우드 영화 '초반 10분의 법칙'처럼.
“마치 빠르게 달리는 페라리를 타고 시속 100마일로 질주하는 음악을 들으실 겁니다.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폭풍 같은 전개이지요. 베르디 오페라의 드라마와 아름다움을 잘 살리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마에스트로가 <오텔로>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인물이 아니라 그 인물이 지닌 순수하고 원초적인 힘이다. 셰익스피어와 베르디가 완성한 거대한 비극의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죄의 본성, 그리고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