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잡문집-2] 푸치니와 아르헨티나 ①
[이종호잡문집-2] 푸치니와 아르헨티나 ①
  • 이종호 기자
  • 승인 2025.03.02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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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부에노스아이레스] 작년(2024년) 10월, 난생 처음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봤다. 중남미에는 몇몇 나라에 가봤지만 아르헨티나는 아직이었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축제(FIBA, Festival Internacional de Buenos Aires)와 그 기간에 함께 열리는 공연예술마켓(Mercado FIBA)에 초대받은 덕분에 그렇게도 가보고 싶었던 도시에 마침내 입성했던 것이다.

축제의 공연들도 나쁘지 않았고 오랜만에 다시 만나거나 새로 알게 된 각국의 동료들도 반가웠지만, 가장 나를 흥분시킨 것은 카를로스 가르델의 묘소에 가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오, 드디어, 마침내!

그런데 그보다는 덜 흥분되지만 또 하나의 예상 밖 수확이 있었다. 푸치니가 아르헨티나와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뭐, 오페라 전문가들이야 이미 다 아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수준의 일반 애호가들을 위해 거기서 본 자료를 번역, 정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FIBA 마지막 날 저녁 공연이 여러 개 있어서 뭘 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공연차 함께 왔던 아트프로젝트보라와 고블린파티 친구들은 아르헨티나-이탈리아 합동팀의 무용공연을 보러 간다고 하길래 잘 됐다, 작품 좋으면 나중에 얘기해줘, 그럼 난 음악으로 빠질 게 하고 극장으로 향했다.

'Centenario Puccini 푸치니 서거 100주년' 갈라공연 (사진=이종호)

2024년은 푸치니 서거 100주년이어서 세계 도처에서 그를 기리는 축제와 공연, 행사들이 넘쳐났었다. 한국도 물론이었고. 10월 27일 저녁 7시 30분 마요가(Avenida de Mayo) 575 문화의 집(Casa de la Cultura)에서 열린 <Centenario Puccini 푸치니 100주년> 갈라 공연은 그다지 크지 않은, 음향효과도 썩 좋지 않은 공간에서 열렸다. 테너와 소프라노, 둘이서 푸치니의 유명 아리아들을 번갈아 혹은 함께 부르는 자리였는데 노래보다도 나는 홀 입구 좁은 로비에 설치된 <푸치니와 아르헨티나>라는 게시물(배너)에 더 눈길이 갔다. 푸치니가 아르헨티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거지? 아래 글은 원문을 번역하면서 필요한 경우 중간에 추가 내용을 삽입해 만든 것이다.

로비에 설치된 '푸치니와 아르헨티나' 배너 (사진=이종호)

푸치니와 아르헨티나

자코모 푸치니(1858-1924)와 아르헨티나의 인연은 강렬하고 독특하다. 그 인연은 그가 아직 무명에 가까운 작곡가였던 19세기 말에 시작된다. 그는 오페라 <에드가르 Edgar>(1889)의 실패를 맛본 후, 동생 미켈레와 함께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리오 데 라 플라타(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에 있는 강)는 1905년 그의 생애 첫 해외여행의 목적지가 되었다. 당시 푸치니라는 이름은 <라 보엠 La Bohème>(1896) <토스카 Tosca>(1900) <나비부인 Madama Butterfly>(1904) 덕분에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에서는 최근 도착한 이민자들과 이미 정착한 크리올(중남미의 유럽인들)을 포함해 수 많은 팬들이 떼를 지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목적지는 코리엔테스 거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열리는 세계 최초의 푸치니 페스티벌이었다.

이후 푸치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전화와 비행기가 등장하기 전, 편지와 대서양 횡단 정기선 시대에, 그의 오페라들이 이탈리아 초연 불과 수개월 후에 세계 초연된 도시가 되었다.

푸치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런 유대감은 지속적으로 고조되었다. 그의 미완성 유작인 <투란도트 Turandot>는 1926년 이탈리아에서 초연된 지 불과 두 달 만에 부에노스아이레스 콜론 극장에 도착했다. 마리아 칼라스는 1949년 아르헨티나에서 이 작품의 주연을 맡았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1987년 아르헨티나에서 <라 보엠>을 선택했다. 콜론 극장이 길고 복잡한 복원작업을 거쳐 2010년 재개관했을 때 오페라 프로그램으로 <라 보엠>이 선택되었다. 이러한 인연들과 또 다른 많은 사례들은 지구의 끝 편에 있는 이 나라 사람들과 푸치니의 인연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르헨티나인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열렬히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푸치니와 아르헨티나 (사진=이종호)

1> 미켈레(Michele)

미켈레는 푸치니 부부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다. 그는 그가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아버지의 이름(미켈레)을 물려받았다.

(여기서 잠깐, 자코모 푸치니의 아버지는 미켈레 푸치니(1813-1864)였고, 동생의 이름도 미켈레였다. 게다가 자코모 자신도 미켈레라는 중간이름을 포함하고 있었다. Giacomo Antonio Domenico Michele Secondo Maria Puccini. 그런가 하면 자코모의 고조부도 자코모였다. 푸치니 형제는 아홉이었는데 자코모가 여섯째, 미켈레가 일곱째였다).

푸치니의 집안은 고조부 때부터 교회음악 일을 했는데, 자코모와 미켈레 주니어도 5대째 가업을 물려받아 교회음악 일을 하고 있었다. 시작은 둘 다 어려웠다. 1884년 그들의 어머니가 타계했고 그들은 루카(Lucca)에 있는 그들의 생가를 팔아야 했다. 미켈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하기로 결심, 1890년의 위기 직전에 그곳에 도착한다(1890년의 위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도밍고 테오필로 페레스(Domingo Teófilo Pérez) 상원의원은 그에게 그의 주의 수도인 산 살바도르 데 후후이(San Salvador de Jujuy)의 음악교사 자리를 제안한다.

미켈레의 편지에는 기차, 수레, 노새를 타고 가면서 때로는 원주민의 공격을 받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 많았던 여행 이야기가 담겨 있다. 미켈레는 산 살바도르 데 후후이에 정착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철도행진곡을 작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장 총애했던 학생, 다름아닌 자신을 초대한 상원의원의 아내를 유혹해 연애행각을 벌였다. 상원의원은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의원에게 상처를 입힌 미켈레는 도망쳐야 했다. 처음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어서 리우데자네이루로 도망친 그는 거기서 1891년 3월 12일 황열병으로 사망한다. 미켈레의 생애는 해피엔딩 없는 오페라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자코모의 명성이 이미 전 세계로 퍼지고 있던 몇 년 후, 그가 리오 데 라 플라타의 초대를 수락하기로 한 데에는 미켈레에 대한 기억도 아마 영향을 미쳤을 터이다.

미켈레(Michele)

2> 1905년의 여행

1905년 푸치니는 그의 가장 성공적인 세 작품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덕분에 이미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이들 작품을 통해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존경받고, 널리 알려지고, 사진 찍히는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푸치니를 아르헨티나로 끌어들인 것은 아주 좋은 보수 제안이었다. 나르디와 보네티(Nardi y Bonetti) 회사가 그에게 선불한 5만 프랑은 나중에 <나비부인> 한 회 공연의 입장권 수입으로 회수할 수 있었다. 일간지 라 프렌사(La Prensa)는 마요가(Avenida de Mayo) 575 사옥의 영빈관에 푸치니를 머물게 함으로써 초청에 힘을 보탰다. 신문사는 그에게 갖가지 명예를 안기면서 매일 저녁 최다 20명까지 만찬에 초대해 줄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푸치니는 이를 거절했다. (이 곳이 현 문화의 집 Casa de la Cultura와 주소가 동일하니, 100주년 갈라가 열린 방이 푸치니가 머물던 곳일지도...)

자코모와 그의 아내 엘비라(Elvira)는 1905년 6월 23일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내려 8월 8일까지 그곳에 체류했다. 그 47일 동안 그들은 무려 72회의 연회에 초대받았다. 푸치니는 매우 기뻤지만 이내 피곤해져서 토스카나 중심부에 있는, 자신이 선택한 작은 마을 토레 델 라고(Torre del Lago)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1905년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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