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부에노스아이레스]
3>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머무는 동안
푸치니의 방문은 분명 사교적 측면이 있었다. 그는 마누엘 킨타나(Manuel Quintana) 당시 대통령의 영접을 받았고, 이탈리아 여행 중 자신과 만났던 바르톨로메 미트레(Bartolomé Mitre, 아르헨티나 전 대통령)를 답방했다. 국립교도소, 중앙경찰국, 소방서, 동물원에 초대받아 둘러보고 기념촬영도 했다. 트램을 타고 플로레스(Flores), 레콜레타(Recoleta), 벨그라노(Belgrano)까지 여행했고, 소시에다드 이피카 아르헨티나(Sociedad Hípica Argentina)에서 열리는 축구경기를 보러 갔으며, 호아킨 곤살레스(Joaquín V. González, 정치인 겸 학자)와 함께 기차를 타고 티그레(Tigre)까지 갔다. 밴드, 소녀합창단, 일반 대중은 아침부터 밤까지, 거리에서, 매 공연이 끝난 후, 그의 숙소에서, 그를 포위했다.
그는 또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인 사냥을 할 수 있도록 여러 번 초대 받았다. 킨(Keen) 가족은 5월 25일에 그를 자신들의 들판과 라 에르네스티나(La Ernestina) 별장으로 데려갔다. 그는 또한 베디아(Vedia)에 있는 탈라르 데 파체코(Talar de Pacheco) 숲과 엘 도라도 데 베니토 비야누에바(El Dorado de Benito Villanueva) 목장을 방문한 뒤 부에노스아이레스-태평양 고속열차를 타기도 했다.
푸치니의 방문은 당시의 마케팅에 이용되었다. 로이터(Reuter 비누), 라 에반드리나(La Evandrina 주류), 노세라 움브라(Nocera Umbra 미네랄 워터) 등 몇몇 기업은 광고를 위해 그의 이미지와 말들을 사용하기로 계약했다. 한편 그는 리토랄(Litoral) 지역과 오스피탈 이탈리아노(Hospital Italiano)의 홍수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기부금의 대가로 엽서에 서명하는 데 긴 시간을 바치기도 했다.

4> 최초의 푸치니 축제
푸치니가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주요 동기는 물론 그의 오페라들에게 헌정되는 축제였다. 이를 위해 지휘자 레오폴도 무뇨네(Leopoldo Mugnone)를 비롯해 로지나 스토르키오(Rosina Storchio), 에우제니오 지랄도니(Eugenio Giraldoni), 아담 디두르(Adam Didur), 조반니 쩨나텔로(Giovanni Zenatello) 같은 최고 가수들과의 계약이 이루어졌다. 오페라 극장(Teatro de la Ópera)을 중심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여러 극장에서, 첫 작품인 <빌리들 Le Villi>를 제외하고는, 그때까지 작곡됐던 푸치니의 모든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푸치니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무는 동안 오페라 극장에서 약 20회 공연이 열렸으며, 폴리테아마(Politeama), 산 마르틴(San Martín), 오데온(Odeón), 빅토리아(Victoria), 마르코니(Marconi) 등 다른 극장들에서도 공연이 있었다. 6월 25일 그는 <라 보엠>에서 박수갈채를 받았고, 커튼콜에 스무 번이나 나와야 했으며, 그 후 관중은 그를 그의 거처에까지 동행했다. 7월 8일에는 <에드가르 Edgar> 최종 버전의 초연이 있었다. 이 작품에 포함된 짧은 진혼곡(레퀴엠)은 후일 밀라노에서 열린 푸치니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다. 지휘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맡고, 노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주 푸안(Puán) 출신인 이나 스파니(Hina Spani, 본명 이히니아 투뇬 Higinia Tuñón)가 불렀다.

5> 신과 조국
그가 떠나기 전에 라 프렌사는 푸치니에게 교가를 작곡해 달라고 의뢰했다. 이 제안은 라 프렌사 편집진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 교육자 마티아스 칼란드렐리(Matías Calandrelli, 1845년 살레르노 출생)에게서 나왔다. 그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왔으며 당시 라 프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칼란드렐리가 제공한, 민족주의적 성격이 뚜렷한 <신과 조국 Dios y Patria>이라는 제목의 가사를 바탕으로, 푸치니는 단순한 노래를 작곡했다. 동기발전(動機發展) 없이 마디(節)와 후렴의 아이디어에만 근거해 만든 곡이었다. 그가 떠난 후 라 프렌사는 ‘1905년 8월 3일 부에노스아이레스’라고 기재된 원고 일부의 복사본과 인쇄된 전체 악보를 게재했다. <신과 조국>은 푸치니가 작곡한 유일한 교가이자, 유일한 스페인어 노래이다.
라 프렌사는 국가교육위원회에 이 교가를 보냈지만 위원회는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따라서 실제로 학교들에서 이 노래가 불린 경우는 거의 없었다. 푸치니의 아르헨티나 방문 100주년을 기념하여 수행된 연구를 계기로 구스타보 가브리엘 오테로(Gustavo Gabriel Otero)와 다니엘 바라카이 코스타스(Daniel Varacalli Costas)가 재발견한 이 작품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리고 이어 토레 델 라고와 루카에서 '재초연'되었다. 이 곡은 디터 쉬클링(Dieter Schickling)의 국제 카탈로그(푸치니 작품목록)에 포함되어 있으며, 찰스 카스트로노보와 안젤라 게오르규 같은 일급 가수들의 노래로 여러 오케스트레이션과 녹음본이 나와 있다.

6> 작별과 그 후
푸치니는 라 프렌사의 황금살롱(Salón Dorado)에서 열린 성대한 송별연에 초대받았다. 120명의 손님이 참석한 그곳에서 그의 오페라 음악들과 밴드 음악이 연주되었으며, 사이렌과 불빛들이 그를 몬테비데오로 데려갈 증기선이 기다리고 있는 항구까지 함께했다. 그는 8월 9일부터 17일까지 우루과이의 수도에 체류했고 그의 오페라 몇 편이 솔리스극장(Teatro Solís)에서 공연되었다. 귀국 길에는 동생 미켈레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는 브라질 상파울루주 산토스 항구에 들렀다.
이후 푸치니는 남미에 다시 오지는 못했지만 아르헨티나와는 지울 수 없는 유대를 남겼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엔리코 카루소, 클라우디오 무찌오, 베냐미노 질리, 마리아 칼라스, 플라시도 도밍고, 루이스 리마, 미렐라 프레니, 루치아노 파바로치, 마리오 페루소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미 이 곳에서 푸치니의 이상을 환기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가하면, 아르헨티나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애국 노래의 하나인 <깃발의 노래 La canción de la bandera>가 엑토르 파니사(Héctor Panizza)의 오페라 <아우로라 Aurora>에 나오는 아리아인데, 당초 이 아리아의 원본은 푸치니가 가장 좋아했던 대본가 중 하나인 루이지 일리카가 이탈리아어로 썼던 것이다.
이탈리아 이외 지역에서 푸치니 작품이 초연된 곳으로는 아르헨티나가 절대적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위해 쓴 두 작품, <서부의 아가씨 La fanciulla del West)와 <일 트리티코 Il Trittico>를 제외한 다른 모든 오페라는 세계의 어떤 극장보다 먼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연되었다. 리오 데 라 플라타와 우울한 토스카나 작곡가 사이의 강렬한 로맨스를 확실하게 각인해주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