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최찬열 무용평론가 = 어두컴컴한 무대 바닥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다. 좁다란 조명 아래 한 발이 드러난다. 발가락이 꼼지락꼼지락하더니 두 발이 무대 바닥을 꾹꾹 밟듯 신중하게 디딘다. 땅 혹은 대지와 조심스레 접촉하는 모양새다. 만물의 모태인 대지 혹은 자연 자체인 땅과 맨발로 교감하는 것이리라. 곧이어 조명 빛이 둥글게 퍼지면서 조금 밝아지면, 빛 가장자리를 따라 정좌하고 앉은 예닐곱 명의 춤꾼들이 보인다. 긴장감이 느껴지는 저음의 배경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차분하고 단정하게 앉은 춤꾼들은 상체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다가 돌리기도 하고, 허리를 깊이 숙인 채 엎드려 두 손으로 대지를 쓰다듬듯 앞으로 쭉 뻗기도 한다. 또 일제히 뒤로 누우며 두 발을 치켜올리고, 발과 등을 바닥에 맞붙인 채로 땅의 숨결을 느끼고 기운을 받아들이는 듯한 움직임을 이어간다. 춤추는 몸이 대지와 접촉하며 감각을 확장하고, 자연과 합일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들은 두 팔을 옆으로 벌려 서로 손을 잡고 하나가 된다.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하나의 소공동체 혹은 집합적 신체를 이룬 한 무리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로 빠져드는 모습이다. 마치 북방의 유목민족이 거주하는 좁은 주거공간 안에서 종교의식이라도 거행하는 듯,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이다. 다른 한편, 몸통을 돌리면서 손을 휘젓고 두 팔을 벌려 너울거리다가 위로 올리기도 하는 그들의 움직임이 거친 들판에서 하늘거리는 나뭇가지처럼 보이기도 하고, 땅의 영양분을 빨아들이며 자라는 야생식물의 펄럭임 같기도 하다. 곧 자연의 일부인 식물의 생장과 활력을 표현하는 춤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물소리, 바람소리 등 자연의 소리가 연상되는 음향을 배경음으로 삼아 생기있게 운동하는 몸은 대지 혹은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하고, 이는 대지와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넌지시 알려 준다.
요컨대 권혁이 안무하고, 춤단체 시나브로가슴에와 라오스의 팡라오(Fanglao) 댄스 컴퍼니가 협업해 만든 <어씽>(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2023년 10월 6~8일)은 인간신체와 대지가 하나가 되는 모티브를 통해 만물의 근원인 자연의 힘과 생명력을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춤으로 형상화한다. 기실 자연 혹은 대지는 단순한 환경이나 토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는 힘을 가진 존재이다. 또 인간은 자연 속의 왕국이 아니라 그 안에서 거주하며 살아가는 존재자들이다. 그러기에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듯한 부드럽고 유연한 춤은 그러한 존재자들이 강력하고 거대한 자연과 친밀하게 소통하고 조화를 이루는 한 방식일 것이다.

춤은 위아래로, 다시 말해 하늘과 땅을 향한 시선을 반복한다. 한 명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더니 몸을 비스듬히 눕힌 채 발을 들어 올린다. 몸을 뒤척이며 다시 일어나 앉는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인다. 다른 무용수들도 이 움직임을 반복한다. 그들은 누운 채 팔과 다리를 들고 몸을 꿈틀거리며, 옆으로 비틀고 뒹굴다가 다시 살며시 일어나 등을 보인 채 앉는다. 그리고 몸을 좌우로 흔들고 팔을 회전하며 재차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러한 반복적인 움직임 속에서 춤꾼들은 원형을 이룬 채, 마치 하나의 신체처럼 운동한다. 위아래를 반복해서 바라보는 집합적 신체는 엄숙하게 의식을 주재하는 샤먼처럼 하늘과 땅을 잇고 우주 전체를 하나로 연결하듯 춤춘다.
이른바 인간은 자연 속에서 존재하며, 자연의 힘은 인간을 통해 드러난다. 그래서 이 공연에서 춤은 자연현상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자연의 힘을 체현한다. 또 무대 위에서 춤꾼들은 특정한 개별적 정체성을 지우며 하나의 흐름이 되고, 이는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원초적 방식임을 상기시킨다. 말하자면 여기서 춤은 자연이 가진 무한한 역량을 드러내는 한 방식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전자는 산출된 자연이고, 후자는 산출하는 자연인 것이다. 그리고 춤은 산출하는 자연의 잠재된 역량을 열어 보이며 우리와 자연의 일체감을 다시금 환기하는 것이다. 요컨대 <어씽>에서 춤은 인간과 자연이 한통속을 이룬 채 서로를 느끼고 소통하는 은유적인 형식이 된다. 춤은 와무(臥舞)와 좌무(坐舞)를 거쳐 입무(立舞)로 이어진다. 생명력의 상승운동과 생의 약동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원형을 이루고 선 이들은 이제 상체를 출렁이며 오른쪽으로 돌고, 두 손을 위로 들었다가 옆으로 벌리기를 되풀이한다. 앙리 마티스의 그림 <춤>이 연상된다.

그래서 춤은 단순하게 유희적이거나 낭만적인 형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순환과 리듬을 닮아 있으며, 확장과 수축을 반복하며 하나의 자연적 흐름을 형성한다. 운무가 가득한 야생의 들판처럼 연기가 잔뜩 깔린 무대에서 춤꾼들은 대지의 에너지를 끌어안듯, 혹은 자연의 기운을 머금듯, 허리를 숙여 두 팔을 벌렸다가 모으는 동작을 반복한다. 땅이나 대지 혹은 자연의 힘을 구성하고 표현하는 거침없이 미끈하고 아름다운 춤이다. 그리고 이러한 춤을 통해 표현되는 힘은 아마도 원인으로서의 역량, 곧 우주만물을 만들고 생산하는 힘, 증여의 힘이자 창조의 힘이고 생성의 힘일 것이다. 달리 말해서 자연과 별개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일부로서 작동하는 춤추는 몸은 자연 자체의 힘, 세상 만물을 산출하는 힘을 경험하게 한다.

집합적 신체의 리드미컬한 춤이 이어진다. 잔잔하면서도 경쾌한 선율의 피아노 음이 극장 전체에 울려 퍼지고, 일곱 명의 춤꾼이 한 덩어리로 뭉쳐 수려하게 움직인다. 개별적 신체들이 유기적인 집합을 이루어 하나의 집합체로서 운동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군무를 추는 집합적 신체는 하나의 몸으로 보인다. 이어서 그들은 곡선의 웨이브 동작을 구사하며 몸통을 출렁이고, 두 팔의 울렁거림과 굴신이 돋보는 일사불란한 춤을 지속한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체에서 시작해 스케일(scale)이 다른 여러 개체를 형성했다가 다시 해체하기를 반복한다. 춤꾼들은 개별자로 존재하면서도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복합체를 형성한다. 곧 무대 위 신체들은 고정적인 물리적 존재자가 아니라, 역량을 지닌 가변적 존재자로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형되는 과정에 놓여 있다. 요컨대 춤은 운동과 정지의 특정한 관계에 따라서 정의되는 스피노자적인 개체의 내적 통일성과 형상을 잘 현시한다.
스피노자는 개체를 ‘나누어질 수 없는’ 원자와 같은 어떤 것이 아니라, 합성체 또는 복합체로 정의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체(體, body)’는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복합체이다. 이는 모든 ‘체’의 각 부분 역시 하위의 ‘체’의 결합체, 즉 어떤 기관들로 이루어져 있고, 다시 이 기관들 역시 하위의 ‘체’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이 무한히 계속되는 구조를 갖는다. 가령 인간의 신체는 심장, 뇌, 허파, 위, 창자, 근육, 신경계 등등 수많은 기관이 하나로 결합하여 개체화된 것이다. 허파는 수많은 허파꽈리가 결합하여 개체화된 것이고, 허파꽈리는 수많은 혈관과 근섬유 등이 결합하여 개체화된 것이며, 근섬유는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지고, 세포 또한 마찬가지로 하위의 ‘체’들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뒤집어 말하면 다수의 물체로 합성된 개체는 또한 다른 개체들과 연합하여 자신보다 상위의 개체를 구성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서로 연합한 개체들 사이에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일정한 관계가 유지된다면, 그것들은 동일한 개체에 속하는 부분들로서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상위의 개체가 다른 개체들과 합성하여 더 상위의 또 다른 개체를 형성할 수 있다.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자연 전체가 단 하나의 개체이며, 그 부분들, 곧 모든 ‘체’는 전체 개체의 변화 없이도 무한한 방식으로 변이한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를테면 이 공연에서 춤추는 몸들은 자연의 일부로서 작용하면서도 서로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조직되고 다시 해체되는 변주를 거듭한다. 동작은 빠르고 커지며 역동성을 더해간다. 두 팔을 뿌리치며 사선으로 일렬을 이루었다가 모이고 퍼지기를 반복한다. 자연에 내재하는 활력적인 에너지가 분출하고 순환하는 듯한 춤이다. 음악의 반복과 변주에 조응하며 하나의 집단적 신체를 이룬 춤꾼들은 서로 의지하고 운동을 전달하며, 마치 한 몸처럼 수렴과 확산, 강약과 고저, 정지와 이동을 조율하며 부단하게 운동한다. 곧 춤추는 몸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비율과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역동적 구조이며, 또한 춤은 운동 속에서 수시로 탈구축되는 이러한 몸, 즉 ‘체’의 본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퍼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는 원형, 출렁이거나 일렁이는 파동과 파장, 이합집산하면서 유기적으로 엮이는 신체들의 흐름 등은 우리에게 알려 준다. 우리는 실체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서로 변용하고 변용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적인 존재자일 뿐이라고. 곧 이 무대에서 춤꾼들은 단순한 개체가 아니라 운동하는 관계 자체가 되는 것이다.

문득 단절이 발생한다. 춤꾼들은 깊은 호흡을 내쉬며 숨 고르기를 하듯 한동안 멈춘다. 그리고 퇴장한다. 연속적인 시간을 따라 진행되던 공연에 단락이 생긴다. 빗소리와 천둥소리도 들려온다. 그러다 무대에 남겨진 한 명이 무대 중앙에서 등을 보이고 선 채 두 팔을 서서히 들어 올리면 양옆에서 춤꾼들이 다시 등장한다. 공연이 다시 시작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자연의 큰 순환주기(cycle)가 바뀌는 것일까. 이 시점을 기점으로 공연은 전과 후로 나뉘고, 두 번째 춤은 이제 점진적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질료적인 에너지 혹은 기(氣)가 이글거리다가 펄펄 끓는 듯한 춤이다.

그들은 원형을 이루고 손을 맞잡은 채 춤춘다. 동작은 점점 커지고 빨라진다. 활기 있고 생동적인 춤이다. ‘쿵쿵’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긴장감이 감돌고 비장미가 느껴진다. 샤먼의 북소리같이 주술적인 힘이 깃들어 있는 음악이다. 북소리는 점점 우렁차게 울리고, 움직임도 점차 빨라지고 힘차게 변해간다. 서로 다른 각각의 몸들이 조화와 일치를 이루며 같이 두 손을 높이 올렸다가 일순간 아래로 떨구고, 허리를 숙인 채 두 팔은 뻗었다가 밑으로 뿌리면서 돌기도 한다. 활달하고 활력이 넘친다. 제자리에 서서 어깨를 들썩이며 거칠게 몸을 튕기다가 다시 발을 구르며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리더니 거세게 펼친다. 수축과 이완, 원심력과 구심력, 반복과 변주가 돋보이는 매우 역동적인 원무이다. 이윽고 뛰고 도약하면서 점점 기세를 올리던 그들은 두 팔을 휘젓고, 몸통을 뒤틀면서 퍼졌다가 모이고, 펄쩍펄쩍 뛰며 집단 황홀경에 이른다. 도약무와 원무를 추며 접신(接神) 상태로 빠져드는 현대판 샤먼의 춤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덩달아 무대와 객석, 관객과 춤꾼도 하나가 된다. 그러다 무대 중앙에 다시 모인 그들이, 마침내 자연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듯, 살며시 앉아 바닥을 어루만지던 두 손으로 웅크린 몸을 감싸며 공연은 마무리된다. 자연과 인간은 다시 엮여 하나의 큰 순환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전염성이 강한 강렬한 춤이다. 또 시나브로 시작해 기세를 올리다가 잠시 물러나고, 또다시 치고 오르다 멈칫하고, 급기야 여세를 몰아 거침없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는 진행방식과 구성도 독특하다. 단순하고 간결한 몸짓이지만,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하며 춤의 밀도를 더해가고 에너지를 모으고 응축하다가 절정에 이르러 분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씽>은 권혁의 안무 특성과 메소드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공연이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전통춤이나 전통 연행에서 신명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나. 무당이 망아(忘我) 상태에 이르는 방식과 흡사하다. 한국춤에서는 비교적 익숙한 창작문법이라는 말이다. 곧 권혁의 안무는 동시대적 감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으며, 보편성과 지역성이 결합한 현대춤을 구현한다. 이른바 그의 춤은 로컬리티를 품은 현대춤인 것이다. 결국 춤 공연 <어씽>은 꾸준한 움직임의 축적과 점진적으로 펼쳐지는 전개방식, 그리고 대지와 하나 되는 몸, 자연과 공명하는 춤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과 자연의 상호 연결성과 생명의 순환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altai21@hanmail.net 한국춤 전공 후 모스크바대 인류학 석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인류학 박사과정 및 미학 박사학위 취득.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