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성경에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고전문학 속 캐릭터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쏟아지고, 많은 예술 장르에서도 끊임없이 고전 재해석의 시도가 이어진다.
지난 1월 11-12일 국립극장 하늘에서 올려진 울산문수오페라단의 창작오페라 <3과 2분의 1 A>도 이러한 시도들의 일환이다. 샤를 페로의 동화 <신데렐라>에 등장하는, 신데렐라가 아닌 못된 언니들이 주인공이다.
국립극장 하늘은 사방에 객석이 있고 가운데 무대가 자리한 공연장이다. 그리스 시대 연극이나 마당놀이가 이런 공간에서 관중과의 소통 아래 공연되었으리라. 소규모로 편성된 오케스트라, 검은 의상을 입은 성악 앙상블이 무대 양옆으로 함께했다.
공연 시작 전 지휘자가 나와 “시리야” “하이 빅스비” 등을 외쳤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의 핸드폰이 반응을 했는데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사람들이 핸드폰을 끄게 만든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신데렐라’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민담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다. 우리나라의 <콩쥐팥쥐> 역시 그 맥락을 따른다. 중국, 일본, 러시아에서 신데렐라는 예셴, 스미요시, 바실리사로 불린다. BC 1세기 로마 지리학자의 기록에도 독수리가 물어가 궁전에 떨어뜨린 로도피스의 신발을 보고 파라오가 주인을 찾아내 결혼했다는 설화가 있다고 하니 정말 오래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로시니의 오페라 <체네렌톨라>도 신데렐라 스토리를 각색한 오페라다. 요정 대신 왕자의 가정교사가 등장해 보다 현실적이고, 유리구두 대신 팔찌를 떨어뜨리지만.
3과 1/2 A는 신데렐라의 발 사이즈라고 한다. 즉 유리구두의 크기. 약 215 mm라고 하는데, 사실 전족을 하지 않은 이상 성인 여성이 이런 발 사이즈가 가능한가. 이 발 사이즈 자체가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온 나라를 다 뒤져도 신데렐라 한 명만 유리구두가 맞음) 그만큼 신데렐라의 비현실적인 가냘픈 외모를 연상하게 한다.
신데렐라의 언니들은 ‘발이 큰 자매’다. ‘몸도 크고 손도 크고 입도 크고 발도 큰’ 자매다. 발이 크다는 말에는 ‘예쁘지 않은’이라는 말이 숨겨져 있다. 보편적인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자매는 유리구두를 신으려 애쓰다가 여러 고민을 토로한다.
왜 왕자님은 발이 작은 여자를 좋아할까. 왜 남자들은 아름답지 않은 여자와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까. 자매는 왕자 없이 둘이서 행복하게 살면 되지 않냐고 외친다. 그러나 곧 안 된다며 고개를 젓는다. “나는 다른 사람이 필요해. 나를 부러워할 사람이 필요하니까”가 그 이유다. 남들이 부러워하고 추앙하는 삶을 살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을 굳이 억누르고 싶지 않다.
다시 그들이 고민할 때, 엄마가 나타나 도끼를 던지며 발을 자르라고 한다. 분수에 맞게 발이 큰 여자로 늙어 죽겠냐고 딸들에게 호통치며, 엄마는 ‘욕망에 충실하라’고 노래한다. 메조소프라노 서미선이 엄마 역을 맡아, 자매들의 우스꽝스럽고 짠한 분위기를 단번에 그로테스크하게 뒤집었다.
독일 '재투성이 민담'에서는 새 언니들이 유리구두를 신기 위해 엄지발가락과 발뒤꿈치를 각각 자른다. 그래서 발을 자르는 이야기가 새롭지는 않다고 생각했으나, 발이 큰 자매들의 이야기는 반전이 있었다.
자매는 도끼로 발을 자르려다가 문득 깨닫는다. 발가락을 잘라 유리구두를 신는 데 성공해 왕자님과 결혼한다 해도, 발가락이 없는 채로는 왕자와 무도회에서 춤을 출 수 없다는 사실을. 결국 다른 여자, 신데렐라가 왕자님과 춤추는 모습을 무도회장의 높은 의자에 앉아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남들의 부러운 시선을 누리지 못하는데, 발을 잘라도 소용이 없구나. 그들은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자매는 내가 못 가질 바에는 아무도 가질 수 없게 유리구두를 깨뜨리자고 결의한다. 그러나 유리구두를 도끼로 내려치기 직전, 그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도사린 욕망 때문에 도저히 그 유리구두를 포기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왜곡된 욕망은 황홀하고, 이룰 수 없을지라도 상상의 여지를 완전히 박살내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앙상블은 “멋진 꿈을 꾸려면 대가를 치러야 해. 부러움을 사려면 영혼을 팔아야 해. 욕망은 행복. 살아가는 이유. 죽은 자만이 욕망하지 않는다”며 자매를 부추기고, 자매는 왕자와 신데렐라가 행복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하며 괴로워하던 끝에 마침내... 신데렐라의 발을 잘라 버린다. 욕망은 남겨두되, 다른 이가 차지할 수 없도록. 신데렐라의 비명 섞인 긴 울음소리와, 붉은 천을 질질 끌고 무대를 가로질러 쓰러지는 신데렐라의 참혹한 모습이 작품의 엔딩이었다.
자매를 덜 떨어진 캐릭터로 희화화시킨 점이 아쉬웠으나 대본이 상당히 탄탄했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준 내용이다. 왕자의 전령이 노래하는 “모든 기회는 공평하다. 공평하다고 결과도 같을 수는 없다. 사람이 다 평등하다고 해서 다 잘 살 수는 없다.”는 가사에 공감이 갔다. 물론 발이 큰 자매의 욕망이란 너무나 허황된 것이라 그야말로 ‘미친 자매 이야기’일 수밖에 없으나, 과연 말도 안 되게 작은 구두를 신어보는 것이 공평한 기회라고 할 수 있을까. 세상이 공평하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또 내가 못 가지면 상대방도 가질 수 없게 망쳐버리는 일은 세상 살면서 비일비재하게 보지 않는가. 왕자는 신데렐라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자매는 욕망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음악적으로는 상당히 대중에게 다가가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앙상블의 합창은 오페라의 내레이션으로 적절했지만 아리아들은 대중가요 혹은 뮤지컬스러웠다. 민간 오페라단으로서 대중과의 소통을 꾀한 결과물로 보였다. 그러나 공연 후 기억에 남는 노래들은 주로 합창이었다. 대부분의 창작오페라가 귓가에 맴도는 아리아들을 내놓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이 작품은 다른 이유인 것. 작곡자의 의도처럼 ‘대중적으로 편안하게’만 흘렀을 뿐이다. 대중적일지라도 '한 방'이 필요하다.
하늘극장의 울림이 좋지 않다고는 들었으나 성악가들이 모두 헤드마이크를 쓴 무대는 처음이어서 조금 놀랐다. 마이크의 에코가 오페라를 오페라로 인식하는 데 방해가 된 것 같다. 오케스트라의 합도 정교하지 않고 소리도 빈약하여 아쉬웠다.
신데렐라와 왕자를 발레 댄서들로 내세워 이미지화한 연출이 돋보였고, 앙상블을 그리스 극의 코러스처럼 활용한 점도 좋았다. 다만 무대 가운데 있던 커다란 곰 인형의 정체성은 잘 모르겠다. 자매가 툭하면 그 곰 인형을 껴안으니 애정결핍 상태의 어린아이로 보였다. 그것을 유도했다면 성공이다.
전령 역의 바리톤 이병웅, 엄마 역의 메조 소프라노 서미선의 표현력도 좋았다. 주인공인 자매는 메조 소프라노 강연희와 소프라노 김미실이 맡았다. 무대는 대부분 이 두 사람이 주고받는 식의 노래로 전개되었는데 합을 많이 맞춘 듯 자연스러운 호흡을 보여주었다.
<3과 2분의 1 A>는 2023년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된 작품이다. 울산의 민간단체가 이룬 쾌거다.
지난 몇 년 동안 본 창작 오페라 중 손꼽을 정도로 재미있게 보았다. 여러 아쉬운 면이 있으나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좋은 대본, 좋은 가창력을 지닌 성악가들이 자산이다. 단순한 캐릭터를 좀더 보완하고 대중적이든 현대음악이든 관객의 귓가에 꽂히는 아리아가 있다면, <3과 2분의 1 A>는 울산문수오페라단의 대표작이자 스테디 셀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