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풍물굿은 사람과 생명과 자연과 우주와 신과 소통한다
풍물굿은 이들을 이어주는 매체다
그 중심과 울타리를 드나드는 자리에 잡색이 있다
[더프리뷰=전주] 조춘영 풍물굿담론가(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 2024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 <잡색X>가 8월 14일 저녁 7시 30분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모악당에서 초연되었다. 풍물굿연구자인 필자는 음악감독과 연출자의 팬으로 풍물굿을 어떻게 풀어낼지 기대를 품으며 전주를 찾았다.
이 작품은 풍물굿을 해체하여 풍물굿의 세계관과 상징, 코드 등을 적극 수용해 창조적으로 재구성했다. 다면-다차원으로 열린 풍물굿과 잡색에 대한 주체적이며 현대적인 해석이 돋보였다. 공연에 등장하는 수많은 오브제와 구조물은 존재하는 모든 범주에 속하는 대상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넓은 포용성과 열린 개방성을 가진 풍물굿 세계관의 연장으로 이해된다.
<잡색X>를 보기 전 내 관심사는 지역민들의 반응과 젊은이들이 얼마나 힙하다고 느낄 것인가였다. 풍물굿 연행자나 관계자들의 시선이 아니라....... 필자는 이 작품이 한민족공동체에 깊이 스며들었던 풍물굿을 해체, 재구성하여 낯설게 보기라는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었고, 지금 여기의 새로운 풍물굿을 제시하여 대중에게 지역과 뿌리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확인시켜주었다고 본다.
2024 전주세계소리축제의 대주제는 '로컬 프리즘: 시선의 확장'이다. 여러 면에서 시의적절하다 여겼는데, <잡색X>란 작품은 개막공연답게 축제의 주제의식, 문제의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프리즘의 사전적 의미는 '광학에서 빛을 굴절, 분산, 반사시키는 데 쓰이는 부품'이다)
<잡색X>의 시선은 공연 내내 다양-다면으로 분산시키고 있다. 무대 천장에서 내려온 자막창이 있고 가운데 무대공간이 있다. 여기에 본무대 공연을 실시간으로 찍은 영상을 객석 양면 벽으로 거대하게 재생한다. 간혹 공연자의 시선이 관객을 향하는 영상도 있고 우주인의 눈인 양 무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도 있다. 공연 대상이 의도적으로 분산되며 동시에 굴절, 왜곡되는 장면이 영상으로 재생된다.
공연은 무대 천장에서 내려온 자막에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와 글귀로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자막 속 언어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 같았다. 커서로 말 지우는 단순한 장면도 신박했고 이야기의 주제와 내용을 소개하며 공연의 호흡을 여유있게 따라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도 했다.
- 제 1막 당산굿
‘적장의 영혼이 우리마을 당산나무가 된다’
제목부터 도발적이고 흥미롭다. 내용은 밝음과 하늘을 상징하는 새 부족과 어두움, 침체를 상징하는 곰 부족이 싸운 후 시점이다. 곰 부족이 침체한다는 내용을 배 구조물이 침몰했다가 당산나무가 되어 다시 일어서는 것으로 형상화했다. 적장의 영혼을 위무하는 상쇠의 상여소리가 잔잔하게 울린다. 새 부족장, 곰 부족장 잡색이 등장하지만 배 구조물이 너무 크고 무대연출이 과감하여 관객을 압도하는 분위기에 상여소리는 무겁고 아득하게 멀다.
당산굿의 모티브는 호남지역 잡색놀음 중 도둑잽이굿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판굿의 도둑잽이굿은 앞치배(악기 치는 사람)가 아군이 되고 잡색(뒷치배)은 적군이 되어 가상으로 노는 일종의 군사놀이다. 지역에 따라 대포수는 대장군으로도 불리는데, 대포수가 태양을 상징하는 상쇠의 꽹과리를 훔쳤다가 참수되고 다시 살아나는(재생하는) 일광놀이가 호남지역 풍물굿에 보편적으로 전승되어 왔다.
- 제 2막 샘굿
‘우물에서 얼굴 없는 아이들이 태어나다’
삼신을 뜻하는 연주자 3명이 거문고, 가야금, 해금을 각각 자유로운 듯 오묘한 선율로 생명을 맞이한다. 슬며시 중량감 있는 하얀 구조물이 무대 중앙에 자리하고, 연주가 끝날 즈음 해금연주자가 곰 머리를 하얀 드럼세탁기에 넣는다. 세탁기가 돌아가다 멈추자 온통 하얀 옷을 입고 얼굴 없는 아이들이 세탁기에서 하나둘, 셋, 넷... 스무 명의 아이가 기어 나온다. 굴러 나와 꿈틀대며 일어나려 애쓰는 장면이 땅에 뿌린 씨앗들이 땅을 뚫고 새싹을 내며 자라나는 생명활동처럼 느껴졌다.
첫 번째 등장한 아이는 머리에 카메라를 쓰고 세탁기 안에서 바깥 세상으로 나오는 광경을 아이의 눈으로 양 벽면에 비춘다. 아이들은 서서히 일어서고 걸으며 각자 동작을 하고 강강술래 같은 원무로 이어간다. 자연스럽게 무대 위에서 카메라를 든 스태프가 공연자들과 섞여 찍은 영상이 실시간으로 양쪽 벽면에 재생된다.
- 제 3막 마을굿
‘별자리를 따라가고 별자리를 예언하다’
아이들이 성장하여 자기 얼굴을 찾아 별자리를 따라다니는 내용은 풍물굿과 기악 연주가 어우러진다. 뼈대가 삼각이고 앉은판이 원형인 구조물에서 연주자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아이들은 소고와 악기를 들고 굿거리, 자진모리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구조물은 거문고, 가야금, 해금과 아쟁 연주자의 것을 포함해 여섯 개가 무대를 채운다.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구조물 위에는 얼굴이 살짝 분리된 그림들이 올려져 있었다. 기악 연주 중심의 음악에서 풍물굿 악기 중심의 휘모리 연주로 일단락되며 무대 위에서 우주선이 내려오고 무대 바닥에는 천문도 영상이 돌아간다. 별들이 돌아가듯이...
돌아가는 하늘길 위로 풍물굿의 열두발상모잽이가 서서히 등장한다. 마치 우주선에서 우주인이 바라보는 양 카메라는 아래를 향해, 위에서 상모가 돌아가는 모습과 바닥의 천문도와 겹쳐지는 모습을 양쪽 벽면의 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 공연 자체도, 관객도 다양한 시점을 가지게 되며 여러 시선들이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우주 공간에서 태양과 지구와 달이 공전과 자전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처럼...
인상적인 것은 열두발상모가 돌아가는 소리를 잡아내 전달해준 것이었다. 상모의 긴 종이피지가 땅을 스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관객에게 전달되었다.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를 인간은 감지할 수 없지만 본래 소리가 나는 것처럼, 열두발상모 돌리는 행위가 하늘과 땅을 돌리는 상징이 있다는 걸 상기시키고 있다. 마지막엔 객석 반대편에서 밝은 조명 하나가 열두발상모잽이와 관객을 비추는데 무대 바닥이 돌아가며 긴 그림자가 서서히, 천천히 지는 것 같았다.
- 제 4막 판굿
“현대의 다양한 커뮤니티를 암시하는 ‘시민 잡색’들이 의상과 소품, 퍼포먼스로 무대를 넘나드는 일종의 퍼레이드 현장을 만들어낸다. 퍼레이드 현장에는 무대에 오르지 못한 더 많은 시민 잡색들을 대신하여, 나아가 이 극장에 오지 못한 더 많은 시민 잡색들을 대신하여, 아나가 이 극장에 오지 못한 이들을 대신하여, 또한 ‘인간’을 넘어 다양한 ‘비인간’ 생명체들까지 포함하여, 온갖 오브제들이 잡색이 되어 무대 위를 가득 채운다.” (연출의 글에서)
<잡색X> 연출가의 연출의도 그대로다. 오만 군상의 인간, 커뮤니티, 비인간 구조물까지 잡색의 향연을 펼쳐낸다. 무대 뒤로는 엄청난 크기의 사물, 동물, 사람 그림판이 양 옆에서 들어와 가운데 길만 남기고 배경 역할을 한다. 관객석 가까이 양 옆으로는 악기 연주자 6명이 자리하여 흥겨운 리듬의 가벼운 선율을 연주하여 각양각색 잡색을 맞이한다. 처음에는 해병대 3명이 나와 어색한 동작을 보여주며 즐기는 잡색들이다. 이들과 연주자들은 함께 “호호~ 호이~, 호호~ 호이~”를 외치며 다음 잡색들과 바톤 터치를 하는 것 같다.
이어서 의사, 간호사 커뮤니티가 나오고 해녀, 스쿠버 잡색들이 나와 역시 평소 하는 동작을 어색하게 연기한다. 재밌게 웃으면서 즐기는 눈치다. 그리곤 장구잽이 3명이 나와 짧은 설장구 연주를 맛깔나게 보여준다. 이렇게 축구, 베드민턴 선수들, 신부들, 채상소고들, 반려견들, 교복과 가방을 멘 학생들 그리고 할로윈 가장을 한 잡색들이 나와 전형적인 그들의 동작과 놀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마무리는 “호호~ 호이 x 2”를 외치는데 끝소리를 길게 올리면서 신나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필봉풍물굿 판굿에는 호허굿이라는 굿거리가 있는데 “호호” “호허이”를 외치는 부분이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도 흔하게 보여 군사점호, 진풀이굿 등으로 이해되는데, 여기서는 4막 전체에 등장하는 잡색과 연주자, 관객들을 모두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따분하게 나열되는 여러 잡색들의 동작에 구호라는 약속으로 통일성을 부여하였고, 중반부 이후에는 관객들도 함께 따라하는 중독성 있는 호응을 이끌어내었다. 간단하지만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이다.
4막의 마지막 잡색은 어린 아이 우주인이다. 무대 반대편 위에서 그림 우주인이 등장하고 어린 우주인은 빛으로 이어져 있다. 어두워진다.
- 제 5막 대동굿
지금까지 쌓아 온 무대공연의 세계에서 5막은 실제 필봉풍물굿패가 기굿, 호허굿, 노래굿, 품앗이굿(짝두름) 등 대동굿을 연행했다. 사람이 관계를 맺고 엮어 왔으면 풀기도 해야지. 필봉풍물굿쟁이들이 공연 내내 안 허든 짓을 했으면, 해 오던 굿도 풀어내야 관객들의 마음도 풀어지겠지. 대동굿은 굿쟁이들과 공연자들과 관객들이 어우러지는 풍물대동굿이다. 용기, 농기, 단기와 앞치배 그리고 필봉풍물굿보존회의 실제 잡색들이 등장한다. 양진성 상쇠는 유유자적하듯 여유롭게 굿을 이끌고 노래굿으로 노래를 부른다. “세상은 금 섬척이요, 생애는 주일배라” 노래굿도 온 치배들과 함께 부르는 노래다. 관객도 함께 한다.
공연 전체 흐름은 필봉풍물굿 판굿의 '반복, 축적, 순환의 원리'를 어느 정도 수용하여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필봉풍물굿을 포함한 호남좌도굿 판굿이 앞굿과 뒷굿으로 나눠지듯이 공연도 후반으로 갈수록 음악적 요소에서 연극적, 놀이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어 간다. 서서히 내고 달고 쌓아가다가 메시지(맺고)를 보여주고 본래 풍물대동굿으로 풀어주는 구조로 풍물굿의 원리를 따라가고 있다.
<잡색X>의 중요한 미덕 중 하나는 지금 이 공간에서 현장감 있게 실시간으로 오감을 자극하고 만족시켜준다는 데 있다. 실시간 타자를 치는 자막을 통해 이야기를 나에게 직접 전달하는데, 보이지 않지만 주변 어딘가에서 말을 거는 느낌이다. 다각적인 시점에서 찍혀진 실시간 영상이 양 벽면에 재생되는 것도 강조하는 감각과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풍물굿 장르의 이야기에 안정적이고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던 악기 파트의 연주에서도 즉흥음악의 현장성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초중반까지 무겁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우리 악기의 울림과 숨결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구조물이 잡색으로 등장한다는 작품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 연주자가 앉은 판, 세탁기와 우주선, 얼굴 분리된 피라미드, 자연과 인간 군상의 거대한 그림판 등등...
복잡하고 생경하게만 보이는 이 작품의 숨은 미덕은 탄탄한 풍물굿적 세계관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바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와 삼즉일(三卽一)의 세계관이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들... 셋이 곧 하나요, 하나가 곧 셋인 삼즉일의 세계관은 숫자 3을 좋아하는 한민족의 DNA 자체다.
풍물굿의 삼지창, 삼색띠, 고깔과 수많은 3박자 장단을 기반으로, 무대 위에서는 각종 삼각형의 피라미드 형상, 삼신의 연주자, 3명 잡색, 삼색 조명이 주를 이룬다. 이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초중종성) 세계관과도 통하는데, <잡색X> 포스터는 이를 잘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풍물굿의 앞치배와 뒤치배(잡색) 사이에 존재하는 구경꾼(커뮤니티 잡색과 관객)을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전복이 이 작품의 핵심 내용이다.
이런 많은 의도, 상징과 장치들이 있었음에도 작품이 어려웠냐? 재미가 있었느냐? 충분히 대중적이었냐? 나는 일단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잡색X>에는 흥미롭고 재밌는 그리고 적당히 사회성 있는 현대의 잡색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스태프와 여러 구조물도 잡색이다. 치밀하고 짜임새 있게 연출된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춤 추고 노는 잡색들, 즐거운 표정과 몸짓의 커뮤니티 잡색(지역의 일반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생생히 재미졌다.
모든 존재들은 정체성을 찾아가며 자기 증명을 하고 있다. 지금 여기 풍물굿도, 잡색도 그러하다. 누구든 잡색이 될 수 있고, 누구든 풍물굿쟁이가 될 수 있고, 누구든 자기의 굿판을 벌일 수 있으니까 '잡색 X'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