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저돌적으로 성의 의문을 주저없이 제기한 문제작
[공연리뷰] 저돌적으로 성의 의문을 주저없이 제기한 문제작
  • 김혜라 무용평론가
  • 승인 2024.09.0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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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댄스2024,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의 '2122.21222'

[더프리뷰=서울] 김혜라 무용평론가 =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 국내 초청작인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SAL)의  <2122.21222>(9월 3일, 서강대메리홀)는 화제성이 다분하다. 숱한 공연물을 국내외에서 접해왔으나 한 시간 내내 노골적으로 성적 행위의 양태를 파헤친 작품은 본 적이 없다. 안무자 배진호는 섹시한 몸을 정면에 내세우고 섹슈얼리티의 다양한 모습을 전시하며 본능적인 욕구가 난발하는 상황을 펼쳐보인다. 몸을 통해 감각적 사유의 여러 양상을 탐색하는 춤작업에서 성(性)과 연관된 주제는 국내 춤계에서 소극적으로 다뤄져 왔다. 아니 거의 거론되지 않아왔다. 어쩌면 몸과 성이 밀접하게 교착된 용암 덩어리 같은 육체적 감각은 음지로 미뤄 둔 채 고고한 정신만을 추앙해 온 건 아닌지 이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다. 전통적인 결혼관이 붕괴되고 연애와 성적인 윤리관이 급격하게 변한 오늘에 젊은이들이 직면하고 고민해 봄 직한 논쟁을 공공의 무대에서 과감하게 펼친 단체의 도전이  흥미롭다. 배진호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본능(본질)적인 육체적 관계가 가볍게 치부되는 문제를 짚어보며 정신적인 교감만이 사랑의 방식이 아님을 말하는 듯하다. 

'2122.21222' ©김하몽

체액인 Body fluid를 숫자 획수로 표기한 제목 같이 도입부 씬(scene)부터 성을 둘러싼 논쟁 거리로 눈의 흥분을 조장하는 공기가 조성된다. 붉은 무대 내림 막 커튼 사이로 꿈틀거리는 요염한 하반신부터 작품이 상당히 자극적이고 감각을 촉발시킬 거라 예감하게 했다. 세 쌍(명)의 다리가 얽혀가며 그 수위는 높아지고 누가 봐도 집단적인 성행위임을 상상할 수 있다. 막이 걷히고 근사하게 차려 입은 남녀들이 사교클럽에서 서로 교태를 부리며 눈이 맞아가는 상황이지만, 서사를 중심으로 이끄는 극적 흐름은 아니다. 적어도 이 공간은 윤리라는 메스가 소용없는 자유분방함을 조장하는 장소로 설정돼 있다. 어쩌면 성적 자극들이 범람하는 사회를 함축하며 쾌락의 진위와 경중을 따지기 전 무의식적인 욕구가 용인되는 공간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성적 경험과 성적 환희가 보수적인 사회적 틀과 관계에서만 인정되는 장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욕이 사랑과만 결부된 것으로 고결한 인간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인지 반문하려 작품에서는 선정적인 묘사로 초지일관 다종의 성적 관계가 펼쳐진다. 작품은 순간적으로 증발해 버리나 가장 역동적인 상호 완성의 행위인 관계를 포착해 가려운 곳을 씬마다 직격하여 파고든다.  

'2122.21222' ©김하몽
'2122.21222' ©김하몽

동성애이건 양성애이건 무대는 하등의 문제가 없는 설정으로 무용수들의 몸적 교접은 구체적으로 심화되어 간다. 이성, 동성, 자위 같은 여러 양상의 성적 체감 상황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재현되고 이를 관조하는 관음적 설정까지 층위가 높다. 절정의 순간과 과정을 포괄한 그야말로 성이 그때 그때 즐기는 스포츠 같기도 하다. 순간적으로 스파크가 일어난 몸의 이끌림으로 도달한 웨이트리스와 남자의 관계는 일방적이고 가학적인 측면도 드러낸다. 연인과 파트너를 바꿔가는 다소 도발적이고 논쟁적인 관계도 그려진다. 그러나 여성의 대상화나 성적 폭력, 무질서한 성적 취향에 대한 비판적 진단으로까진 관점이 닿지 못했고 안무가의 젊은 혈기로 감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주저없이 묘사했지 싶다. 출렁거리는 몸으로 설정된 일련의 관계에서 무용수들(최호종, 윤혁중, 서미진, 유재성, 민경원, 이지수, 안유진, 배진호)의 집중력과 에너지 못지 않게 관객들도 몰입감 있게 눈으로 만져지는 시공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2122.21222' ©김하몽
'2122.21222' ©김하몽

차려 입은 껍질(옷)을 벗고 거의 누드 상태로 무용수들은 집단적 에너지 교류의 상황을 형상화한다. 온몸으로 체득한 무엇인가의 흐름을 수용하며 이들은 느리게 유영하듯 개별적이나 공동체적 움직임으로 합일된다. 체액과 피 같은 액체의 교류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성적 관계와 행위가 담지된 원초적 감각 속에서 리듬을 발견해 내고, 리듬과 감각의 관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힘, 즉 에너지를 춤적 움직임으로 변형해 군무로 치환해 낸다. 우리가 상상이든 실제로든 일상에서 경험하는 다소 민감한 사안인 성적 행위의 역동성을 추적해 역으로 인간 관계성을 탐구한 작품은 솔직하고 꾸밈없어 좋다. 몸을 떠난 마음은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심지어 무의식적 선택에 의한 본능적 행위라 해도 존중되어야 함과 이 또한 또다른 방식의 사랑이자 관계임을 안무자는 의도했으나 이 부분이 선연하게 드러나진 않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제를 과감하게 선택하고 자신의 의문을 감각적으로 무대화한 결기는 높이 살만하다. 쾌락으로만 치부되는 관계 같은 기존의 성윤리에 대한 신념과 선택은 각자의 몫이니 말이다. 

'2122.21222' ©김하몽

배진호의 전작 <88>도 육감적이면서도 수행적인 면모가 뒤섞인 오묘한 몸성(몸의 성격)을 경험하게 한 작업이었다. 이를테면 영과 속의 이질적인 결합으로 품어내는 움직임이나 장면의 뉘앙스가 좀처럼 한국춤을 기반으로 한 창작작업에서는 쉬이 만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신체 효용능력의 범주를 과감하게 과시하는 세속적이고 노골적인 표현의 기저에 영성을 추구하는 이 둘의 접속지점이 매력적이었다. 

아직은 돌발적인 부분이 많아 비판적인 관점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내지 못한 점도 있다. SAL은 2021년 창단된 신생단체로 이제 막 작품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으니 작가적 비판의식이나 사회적 메시지 같은 부분을 거론하긴 아직 무리이다. 스스로의 감각을 믿고 무대에서 돌파하려는 거침없는 표현에 필자는 주목하고 싶다. 이 단체의 이름(전복된 해부학적 풍경)같이 몸의 육체적 특성과 정체성을 탐구하며 안무로 새로운 충격을 주려는 방향성을 응원한다. 치기 어린 파격과 전위도 때가 있는 법이고 이러한 저돌성도 춤계에서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배진호를 주축으로 기량이 뛰어난 무용수들과 함께 관습과 관성적인 생각과 형식에 대한 이유 있는 해체로 메스를 들이대며 육체적 탐미로 해부하는 작업을 보이길 기대한다. 예술(춤)은 지각(percept)의 가장 원초적이고 역동적인 감각을 파헤치는 것이 존재의 한 이유가 아닌가. 전통적인 도식인 이성의 우위를 뒤집는 감각(aisthēsis)으로 신선한 돌풍을 예고한 배진호의 작업을 앞으로 지켜볼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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