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들여다보기-3]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 여자로 태어나 춤춘다는 것
[춤, 들여다보기-3]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 여자로 태어나 춤춘다는 것
  • 박성혜 무용평론가
  • 승인 2024.10.1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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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추고, 한번 보면 그만일까? 여기 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자 한다. 이 휘발성 강한 춤을 놓고 무슨 이야기가 가능할까? 그래서 과거에 춤을 추었고 지금은 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춤을 통해 가능한 것들을 풀어 본다. 그들은 좁게는 댄스&미디어연구소 회원인 동시에 무용수, 무용교육자, 안무가, 비평가, 기획자, 과학자, 전문연구원 등 다양한 직업과 배경을 가지고 있다. 춤추고 연구한 수십 년의 경험과 전문성을 가진 그들이 지난 2022/23 시즌 연재에 이어 2024년에 다시 글을 연재한다. 춤으로 논의할 수 있는 다양한 논의와 시선들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춤과 기술, 대중문화, 문화예술정책, 교육, 무용인의 경력전환, 북한문화와 예술, 그리고 역사 등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들이 각자의 전문성을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다채롭게 진행하는지를 기대해 주시기 바란다.  - 편집자

(사진제공=조진호)
윤상은의 공연 모습 (사진제공=조진호)

[더프리뷰=서울] 박성혜 무용평론가 = 일찍 시작해 빨리 그만두는 것이 당연한가?

최근 신촌극장에서 공연된 <춤출 때 웃고 있지만>이란 작품에서 조진호와 윤상은 두 여성 무용수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네 살 때부터 춤을 시작했어.”(조진호) 윤상은은 “저는 일곱 살 때부터 시작했죠.”라고 말한다.

이들은 모두 명문대 무용학과를 졸업했다. 그러니까 전문무용수로 활동한 이력까지 합하면 이제 30대 여성 무용가들 대부분의 이력에서 춤 경력 20년은 그리 특별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마흔 전에 대부분의 여성 무용수들은 은퇴를 넘어 아예 무용계를 떠나거나 전혀 다른 삶에 대하여 고민을 한다. 그야말로 예술계를 떠나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현실적 자각에 직면하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춤을 부정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이  상황은 그 누가 봐도 암울하고 타당하지 않다. 나름의 전문 인력인데, 그리고 너무 젊은 나이에 자신의 경력을 살리지 못하고, 심지어 대부분 아직도 춤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그만두어야 한다는 현실을 마주한다. 이는 개인의 불행을 넘어 국가적 손실이 아닌가 싶다. 일반 사회에서는 한창 활동하는 마흔도 안 된 나이에 20년 이상을 투자한 특화된 기량과 전문성을 그냥 썩히고 마는 것은 단순히 비효율을 넘어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렇다면 여성으로서 춤을 춘다는 것, 그리고 지속성을 보장받는 것은 가능할까? 얼핏 봐도 아름다운 신체 활동을 근간으로 하는 춤 분야에서 예술 활동을 계속하고, 게다가 생계가 보장되거나 관련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어렵다. 가장 쉬운 분야가 자신이 배운 것을 가르치는 직업, 교육자로 나서는 것인데 말이 교육자이지 그 분포도가 매우 넓고 모호하다. 최고 정점인 대학교수부터 시간강사, 예술강사, 학원강사 등 소속과 직함이 다양하다. 그중 4대 보험이 적용되는 직종은 정식 교육기관인 대학이나 중고등학교 정규직 교사가 유일한데 그 수가 매우 적다는 것이 문제다. 그외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은 말이 교사이지 시급이나 처우가 매우 열악하다. 따라서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한다는 전략으로 많은 무용전공자들이 유사 분야로 넘어가면서 가르칠 수 있는 범위를 확대하는 전략을 쓴다. 예를 들어 필라테스나 요가, 일반인 대상 춤교실 강사 등으로 진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현재에는 과포화 상태라 수입은 20년 전과 비교해 봐도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면 교육활동 외의 다른 수입 방안으로 예술활동을 생각할 수 있지만 순수예술 분야의 무용공연은 경제성이 취약하기에 의미 있는 수입구조를 기대하기 어렵다. 문체부가 2년마다 정기적으로 조사 발표한 ‘2023년 문화예술인실태조사’에 의하면 무용인이 예술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연 550만원이다. 월이 아니라 연 단위이니까 한 달 수입이 50만원도 안되었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교육활동이든, 예술창작 활동이든 무용인의 수입은 매우 적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너무나도 좁은 정규직은 당연한가?

그렇다면 정규직은 어떤가? 수입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되지만 문제는 숫자다. 공공기관 소속 무용단원이 아니고는 무용계에서의 정규직은 거의 전무하다고 보면 되는데 그나마 공공기관 무용단의 정규직 모집 인원은 잘해야 1년에 한 명 정도로 보면 된다. 그나마 여성은 남성보다 기회가 적다. 대부분의 무용단이 여성보다 남성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무용 관련 활동에서도 남성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는 상황을 보면 여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무용분야에서 또 다른 이중차별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최근 공공 무용단의 대표, 각종 협회장, 심지어 여자대학의 무용과 교수 임용까지 남성이 주로 포진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이야기의 처음으로 가보자. 춤추는 여성은 엄청난 숙련 기간과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춤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가장 왕성한 사회생활을 영유하고 있을 30-40대에 직시하고는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몸은 그대로 실존한다는 문제가 남았다. 물론 30-40대 남성 무용수들도 무용을 그만두는 경우가 상당하다. 일례로 무용특기로 군면제 혜택을 누린 남성 무용수들 중 현재까지 지속적인 예술활동을 유지하는 슷자를 예전에 모 언론사에서 전수조사한 결과 10% 내외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무용 관련 학회나 여러 좌담이나 토론회에서 다룬 적은 있지만 그 해결책이라는 것이 교육 강화, 직업전환을 위한 개인적 노력, 정부의 대응 촉구 정도에 그친다. 무용활동을 하다가 사라지는 모습과 비율은 비슷하다고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연차가 올라갈수록 치열해지는 생존경쟁에서 여성에게는 또 다른 문턱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드가 드거 ‘발레 수업’
에드가르 드가 ‘발레 수업’

남성들이 주도하는 정책결정은 당연한가?

바로 무용계의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위치와 역할에서의 소외이다. 사실 작금의 무용계 모습을 살펴보면 남성, 교수, 정규직과 여성, 비정규직, 독립무용가로 나누어져 권력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활동하는 인력과 역량은 비슷하거나 심지어 여성의 수가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임명과 임용에 남성중심 카르텔이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국내에 인적 네트워크가 취약한 해외 유학생들과 활동 경력자들이 대학을 중심으로 비교적 탄탄한 인맥을 가진 기존의 무용인들보다 불리해지는 경우들이 발생한다. 이는 단순히 공공기금 지원에서의 탈락을 넘어 그들이 제안하는 예술적, 미학적 몰이해와 오해가 더욱 큰 문제이기도 하다. 새로운 작업과 제안에 대한 검토보다는, 기존의 작업 방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상한 작업, 장난 같은 시도, 춤이 없거나 사라진 예술, 본연에 충실하지 않은 무용작업으로 취급한다. 그 모호함과 당혹스러움이 이해는 가지만 해석의 어려움과 곤혹스러움을 패거리를 형성해 힘의 논리로 몰고 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백번 양보해 역량과 경험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최근 남성 무용가들의 작업, 공공기관과 사업 운영의 성과를 살펴보면 압도적 우월성을 발견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올해 진행된 어느 남성 대학교수가 대표로 있는 국제무용페스티벌은 수억 단위의 국고지원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단 하나의 해외단체만  참가하였고, 심지어 연례적으로 해오던 기자회견을 하루 전에 취소하는 미숙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학회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학회장은 남자인데 최고의 발표자와 성과자는 여성이라는 점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조금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춤추었던 여자들은 사라지고 남성들만 남아 정규직과 교수직에 우선권을 차지하면서 그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과연 건강한 것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또한 이렇게 이상한 구조에서 산출되는 무용예술이 과연 얼마나 예술적 성과를 달성하고 있는지도 동시에 논의되어야 한다. 남성성과 테크닉 제일주의가 강조되고 편중되어 있지는 않은지, 혹은 유독 여성 서사가 적은 무용작품에서 더더욱 소외되고 있지는 않은지를 말이다. 이는 어느 한쪽으로만 편중된 모습을 단순히 나누는 위험에서 벗어나 미학적 담론 생산의 기여도와 작업들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누가 작품을 만들든, 정책을 결정하든 그 모든 것들이 보다 미래지향적이고 국제적 감수성과 경향을 지향하며 발전적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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