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 홀 프로그램은 대부분 아래로부터 발생하였다. 노래와 춤, 코메디, 아크 로바틱, 서커스, 저글링, 마술 등은 모두 예술이나 고급문화와는 거리가 먼 대중오락이었다. 관객이 대부분 노동자나 하층민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급예술이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초기에 찰스 모튼이 캔터버리 홀에서 오페라를 공연하기도 했지만 바로 폐지하였다. 많은 제작비에 비해 관객이 적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중적 춤은 뮤직 홀의 중요한 프로그램이었고, 보드빌과 유럽의 대중오락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인조 바나나로 만든 스커트를 입고 춤을 춘 , 검은 비너스라 불린 흑인댄서 조세핀 베이커는 파리의 폴리 베르제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클로그(clog) 댄싱, 스텝 댄싱, 지그 댄스(영국민속춤), 혼파이프 댄싱, 서펀타인 댄스, 스커트 댄스 등이 뮤직 홀 춤의 주류를 이루었다.
반면, 귀족과 돈많은 중산층의 예술이었던 발레는 뮤직 홀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뮤직 홀 발레는 이를 잘 견뎌내고 뮤직 홀의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자리잡는다. 대중의 취향에 맞는 스펙터클과 여성 신체에 대한 남성관객의 관음증, 그리고 오페라 극장의 예술발레 공백을 파고든 결과였다. 뮤직 홀 발레는 침체해 있던 영국발레의 명맥을 이어 20세기 ‘영국적 발레’를 개척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발레가 꽃을 피운 건 낭만발레가 융성했던 19세기였다. 새로운 기술개발, <라 실피드>나 <지젤>과 같은 명작의 탄생, 마리 탈리오니와 같은 국제적 스타의 등장으로 발레는 전성기를 맞는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주제와 표현양식도 점점 인간적으로 변한다. 신화와 알레고리에서 삶의 실제적 모습을 표현하는 춤으로 변하고, 이는 의상에도 영향을 주어 복장도 더 자유롭게 변한다. 발레의 중심지는 그 발상지인 이탈리아, 이를 중흥시킨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발레를 수입한 러시아와 덴마크였다. 영국에서도 19세기 초중반에는 발레공연이 활발했다. 당시의 발레공연의 중심지는 허 마제스티 극장으로, 1830년대 초반부터 1840년대 후반까지 많은 낭만발레 작품이 공연되었다. 그러나 작품제작은 영국인이 아니라 프랑스의 쥴 페로, 이탈리아의 파울 탈리오니 등 저명한 안무가와 이탈리아의 작곡가 세자레 푸그니 등 외국인들이 주도했다. 아직 토착적 영국발레가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발레는 1850년경이 되면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육체와 성을 상징하는 외설스런 예술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나면서 허 마제스티 극장과 코벤트 가든의 발레는 침체기를 맞는다. 여기에 1867년에 발생한 허 마제스티 극장의 화재는 발레에 큰 타격을 주고, 이로 인해 외국 무용인들은 대부분 러시아 피터스버그의 제국극장으로 떠나고 만다. 고급예술 관객들의 취향이 발레에서 오페라로 이동한다. 간헐적으로 허 마제스티와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하기는 했지만 예전같지 않았다. 영국발레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침체상태에 있던 영국발레를 구한 건 뮤직 홀이었다. 그리고 발레를 처음 도입한 뮤직 홀은 1864년 알함브라였다. 이후 지방 뮤직 홀도 확산된다. 1866년 리즈에서 조셉 홉슨은 코르 드 발레를 기획하고 신문에 광고를 했다. 맨체스터와 브래드포드에서도 발레가 등장했고, 187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비용 때문에 대형홀에서만 간헐적으로 공연되는 정도였다. 발레는 1880년대에 들어와 음악이나 판토마임의 부수적 요소가 아니라 독립적 장르로, 스펙터클한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1884년부터 1915년까지 뮤직 홀에서는 하루 저녁에 적어도 한 편, 보통은 두 편, 많게는 세 편의 발레가 공연되었다. 그 중심은 알함브라와 엠파이어 홀이었고, 이 기간 동안 141편의 신작이 제작되었다. 이는 프랑스에도 영향을 주어 알함브라를 모방하여 파리의 폴리 베르제르 뮤직 홀도 발레를 도입하였다.
발레는 많은 고용유발효과가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연예인은 여배우를 포함하여 1881년에는 2368명, 1901년에 6443명, 1911년에는 9171명으로 급증한다( 『Dance and Dancers in Victorian and Edwardian Music Hall Ballet』, 29). 수천 명의 고용을 창출했던 것이다. 이들의 출연료는 많지 않았지만 가족의 생계에 큰 보탬이 되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이는 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단원이 출연하는 코르 드 발레는 런던의 꽃이었다. 경영자는 전부 남성이었고 출연자는 여성이었다.
관객은 전통적 뮤직 홀과 달리 상류사회의 귀족과 귀부인, 돈많은 중산층이었다. 2336석의 알함브라와 1726석의 엠파이어는 관객을 채우기가 쉽지 않은 대형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2-4개월씩 공연하였고 가끔씩 자선공연도 실시했다. 옥스포드와 켐브리지의 보트경주가 있는 날이면 엠파이어 홀은 젊은이들로 만원을 이루었고 때로는 큰 소란이 일었다. 귀족들은 발레리나들을 초대해서 자신의 저택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스타였던 아델라인 제네, 리디아 키야쉬트, 필리스 베델스 등이 귀족들의 사저에서 공연했다. 1897년 알함브라에서 6개월 동안 공연한 <빅토리아와 즐거운 영국>이라는 작품은 20여 회에 걸쳐 왕실의 방문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발레가 더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은 1911년 발레 뤼스의 런던공연 이후였다.
그러나 외설오락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발레는 공연허가가 필요했고, 허가가 만료되면 재허가를 받아야 했다. 가끔 불허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1894년에는 엠파이어 홀의 재허가를 놓고 여성계와 남성지식인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알함브라와 엠파이어의 프롬나드( 관객들이 모이던 객석 뒤쪽의 별도의 사회적 공간)는 매춘부들의 집결지라는 비판과 발레가 이를 조장한다는 사회적 비난이 있었다. 또한 연극계로부터는 발레에 스토리가 담겨있어서 공연법 위반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이는 영국 뮤직 홀과 파리 뮤직 홀의 큰 차이를 낳는 요인이 된다. 즉 파리 뮤직 홀은 1880년대부터 이야기가 있는 판토마임 발레가 많이 제작되었지만 영국에서는 판토 발레를 자유롭게 만들 수 없었고, 만들어도 연극계와의 갈등의 요인이 되었다. 뮤직 홀 발레는 1910년대 초반부터 침체에 빠진다. 대중의 취향이 레뷔와 러시아 발레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엠파이어에서 뮤직 홀 발레는 1915년에 마지막 공연을 하였고, 1916년에는 프롬나드가 철거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뮤직 홀에서 발레 공연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뮤직 홀 발레는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뤼스에 바톤을 넘겨주었다. 발레 뤼스는 1911년 첫 런던 공연을 했고, 1930년까지 영국발레시장을 지배했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많은 지식인들은 발레 뤼스의 열렬한 팬이 되었고, 그 중에는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즈도 있었다. 케인즈는 원래 발레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영국 발레에 다양한 형태로 관여한 지식인이었지만 동성애자이기도 했다. 발레 뤼스의 공연과 프리마 발레리나 로포코바(Lydia Lopokova)는 그의 삶을 바꿔놓는다. 그는 1921년에 발레 뤼스의 공연을 본 이후 로포코바에 빠져 매일 밤 극장에 가서 넋을 잃고 그녀의 공연을 보았다. 그들은 1925년에 결혼하기에 이른다.
본격적인 영국발레는 1930년대에 탄생한다. 뮤직 홀 발레는 예술발레가 침체해 있는 동안 이들을 흡수하여 새로운 영국적 발레로 재탄생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낸다. 클래식 발레의 역사에서 뮤직 홀 발레를 누락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뮤직 홀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알함브라와 엠파이어 홀
뮤직 홀 발레의 본산은 알함브라 홀과 엠파이어 홀이었다. 그리고 두 홀은 경쟁자였다. 서로 상대를 무시했고 자신이 상대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알함브라의 댄서들은 우두커니 장식처럼 서 있는 엠파이어 댄서들을 얕보았고, 엠파이어의 댄서들은 알함브라에는 아델라인 제네같은 실력있는 스타가 없다고 깔보았다.
알함브라는 1854년 왕립 과학과 예술 판옵티콘으로 개관하였고, 1858년에 알함브라 서커스장으로, 1864년에 뮤직 홀로 바뀐다. 1882년에 화재가 발생했지만 1883년 재개관하여 알함브라 시어터 로열로 바꾸어 음악과 춤공연허가를 받은 뒤 다시 뮤직 홀로 변신하였다. 알함브라는 뮤직 홀로 변신한 1864년부터 발레를 중요프로그램으로 내세웠다. 1864년부터 70년 사이에 45 편의 발레를 제작하였는데, 대부분 디베르티스망이었다. 극장장 프레데릭 스트레인지는 ‘큰 밴드, 큰 코러스, 큰 발레’를 모토로 스펙터클한 발레제작에 나섰다. 스트레인지의 전략은 성공했다. 그러자 메트로폴리탄, 루스비, 옥스포드 등 여러 뮤직 홀들이 이를 모방한다. 알함브라 발레는 1880년대에 들어와 더욱 활성화된다. 1884년부터 1912년까지 80편을 제작하였는데, 라 스칼라 발레 마스터 출신의 카를로 코피(Carlo Coppi)가 1891년부터 1902년까지 이끌었고 발레리나 에마 팔라디노가 활약했다.
엠파이어 극장은 1884년 웨스트 엔드의 레스터 광장에 개관한다. 알함브라의 발레감독 버트란드가 <칠페릭(Chilperic)>이라는 오페레타에 세 편의 발레를 제작하여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에 <지젤>, <코펠리아> 등 세 편을 제작하였지만 대중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발레, 벌레스크, 오페레타 등을 시도해 보았지만 성공공식을 찾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음악과 춤 공연허가가 좌절되면서 1887년에 새 경영진을 영입하고 엠파이어 버라이어티 극장으로 이름을 바꾼다.
엠파이어를 구한 건 스타였다. 1897년부터 1907년 사이, 엠파이어 홀의 중요한 자산은 아델라인 제네(Adeline Genee, 1878-1970)였다. 덴마크 출신의 제네는 1897년부터 10년 동안 엠파이어 홀에 출연한 발레리나로 17세에 덴마크 왕립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가 된 탁월한 댄서였다.
덴마크 발레는 오귀스트 부르농빌(August Bournonville, 1805-1879)이 닦아놓은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부르농빌은 빈과 파리에서 훈련을 받았고 귀국하여 덴마크 왕립발레단의 발레 마스터가 된다. 전문적인 무용수의 육성뿐만 아니라 발레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어린 학생들의 교육에도 힘써 발레를 덴마크의 국민예술로 만든 덴마크 발레의 아버지였다. 제네 역시 부르농빌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를 지도한 삼촌, 알렉산더가 부르농빌의 지도를 받은 크리스티안 요한슨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제네는 엠파이어로부터 6개월 출연제안을 받고 건너갔지만, 그 6개월이 10년이 되었다. 제네는 탁월한 기술과 매우 우아한 동작을 구사했다. 언론에서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던 탁월한 발레리나라고 칭송했다. 전설적인 댄서 파니 엘슬러와 마리 탈리오니에 비견될 정도였다. 이런 평판은 영국은 물론 유럽 전대륙과 미국에까지 전파되었다. 190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지그펠드 폴리스에 출연하였는데, 폴리스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레리나’로 불렀다.
스펙터클
알함브라와 엠파이어는 관객 확보를 위해 심한 경쟁을 했다. 이들이 택한 방법은 스펙터클이었고, 출연자의 규모와 특수효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악한 코미디와 슬랩스틱도 동원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스펙터클은 많은 인원을 동원한 인적 스펙터클이었다.
안무가들은 이런 방식이 예술성을 해친다고 반발하였다. 아더 시몬스는 발레를 감상하는 이유를 1) 댄서에 대한 구체적 관심 2) 스펙터클에 대한 일반적 선호경향 3) 움직임의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발레는 뮤직 홀 프로그램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스펙터클이었다. 거기에는 젊고 아름다운 발레리나가 있었고, 그들의 아름다운 움직임과 화려한 세트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 발레리나들은 한 두 사람이 아닌 150명에서 250여명의 대규모의 군무단원들이었고, 이들이 창출하는 집단적 동작과 아름다움은 발레의 빼놓을 수 없는 스펙터클이었다.
- 코르 드 발레
뮤직 홀 발레의 큰 특징은 대규모의 군무단원과 어린이로 구성되는 출연진이었다. 군무가 되는 나이는 오늘날보다 어렸다. 1900 년경 청소년의 취업나이는 12살이었다. 베델스는 13살에, 유니티 모어(Unity More)는 15살에 엠파이어에 데뷔했다. 이들은 어릴 때 극장부설 발레학교에서 교육받은 뒤 데뷔했기 때문에 어릴 수밖에 없었다. 은퇴나이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반드시 젊어야 되는 건 아니었고, 단원으로서의 역량이 있으면 가능했다. 그래서 엄마와 딸이 같이 출연하는 경우도 있었다. 베델스의 회고에 의하면 많은 여성들이 무대에서 인생을 보냈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출연하는 여성도 있었고, 이런 일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어린이들도 많이 캐스팅되었다. 이들은 새(鳥) 등의 역할을 맡았다. 출연단원을 늘리기 위해 백스테이지의 스탭들이나 제작자들의 친구, 가족 등을 부르기도 했다. 많게는 250명까지 출연하였고 보통은 150명 정도였다. 이는 모두 무대의 스펙터클을 위해서였다.
군무단원들은 포르 드 브라(팔의 움직임)가 없었기 때문에 시각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손에 도구를 들고 출연했다. 긴 줄 역시 특별한 색채감을 주었다. 기술도 점점 향상되어 갔다. 알렉산더 제네는 <코펠리아(1906, 엠파이어)>를 준비하면서 군무단원들에게 푸앵트(pointe- 발끝으로 서는 기술)를 가르쳐 주었다. 군무는 내러티브보다 동작이 더 중요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정교한 군대처럼 군무 역시 정확한 동작으로 하나처럼 움직였다. 움직이는 만화경이었다. 군무의 중요기능은 스스로를 낮추어 주역을 높이는 것이었다. 주역을 가운데에 두고 자신들의 개인성보다는 집단성을 중시해야 했다. 단원들은 무대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장식품이었고, 탈개인화된 소녀군단이었다.
색채감, 화려한 의상, 전기라는 신기술을 이용한 조명 등이 이를 뒷받침했다. 과거에는 이야기에 중점을 두었지만 점점 스펙터클이 중요해졌고, 이는 국제적인 흐름이었다. 비평가들은 스펙터클을 예술을 희생한 댓가라고 비판하였다. 조악한 형식이 높은 예술을 구축한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실제로 손에 든 도구는 동작을 방해했고 의상과 머리에 쓴 두건 역시 연기에 지장을 주었다. 무대도 거대한 세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동작에 방해가 되었고 춤을 추지 않고 서있기만 하던 댄서들 역시 춤에 방해가 되었다. 그러나 댄서는 중요한 스펙터클이었다. 대규모의 단원이 주는 스펙터클은 그 크기만으로도 장관이었다. 춤이 주기능이었던 발레 댄서들은 코러스로 변신하여 무대를 장식하는 역할을 하였다.
- 스타
가장 중요한 댄서는 아델라인 제네(Adeline Genee)였다. 어릴 때 삼촌 알렉산더에게 훈련을 받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발레를 혼합한 춤을 추었다. 그녀가 특히 칭찬을 받은 것은 1897년부터 1909년까지 장기간 활약했다는 점이 아니라 탁월한 표현력과 기량 때문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안나 파블로바보다는 덜 신격화되었다. 만약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 입단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댄스 테크닉, 발레에 대한 헌신, 깨끗한 사생활 등으로 좋은 이미지를 구축했고 발레를 품위있는 예술로 격상시켰다. 1920년에 조직된 <오페라 댄싱협회 >( 1936년에 로열 댄싱 아카데미로 개칭, 지금은 로열 댄스 아카데미)와 카마르고 협회를 통해 뮤직 홀 발레와 ‘영국적’ 발레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교량역할을 하였다.
런던의 뮤직 홀에서는 많은 주역무용수들을 이탈리아에서 수입하였다. 에마 베소네(Emma Besone, 알함브라 1885-86, 88-89)는 라 스칼라에서 훈련을 받고 마린스키와 볼쇼이 발레의 주역으로 활동했는데, 1884년 프티파가 <지젤>에 주역으로 발탁하였다. 칼로타 브리안자(Carlotta Brianza, 엠파이어 1888, 1893-94)는 밀라노 출신의 주역무용수로 프티파가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오로라 공주로 발탁하였다. 피에리나 레냐니(Pierina Legnani, 간헐적으로 알함브라 1882-1897)는 라 스칼라의 유명한 발레지도자 카테리나 베레트의 지도를 받았고, 러시아 제국발레의 프리마가 되었다. 1892년 알함브라의 <알라딘>에서 32번의 푸에테(발끝으로 도는 기술)를 성공시킨 첫 발레리나였는데, 그 공은 이탈리아산 토 슈즈 덕분이라고 하였다.
이탈리아 댄서들의 전성기는 1910 년경에 끝난다. 뮤직 홀에서는 이들 대신 러시아 발레리나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하여 러시아 제국극장에 에이전트를 파견한다. 그렇게 찾아낸 댄서가 리디아 키야쉬트(Lydia Kyasht, 1885-1959)였다. 러시아의 차르는 그녀의 뮤직 홀 출연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는데, 러시아 발레를 계속 출 것이라는 소식에 안도하였다고 한다. 키야쉬트는 첫 영국인 프리마 발레리나 필리스 베델스(Phyllis Bedells)가 등장하기까지 엠파이어에서 활약(1908-13)하면서 러시아 발레와 엠파이어의 명성을 높였다. 그녀의 별명은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댄서’였다. 러시아에서 주급 7파운드를 받던 그녀는 런던에서는 70파운드를 받았다. 런던데뷔는 당연한 일이었다. 러시아 발레는 프랑스 발레가 주춤하는 동안 세계 최고의 발레국가가 된다. 거기서 탄생한 발레리나들은 다시 유럽으로 진출하는데, 영국 발레에도 많은 러시아 발레리나들이 진출하였다. 이들은 뮤직 홀과 오페라 극장에 같이 출연하였지만, 일부의 발레리나들은 뮤직 홀에는 출연하지 않는 댄서들도 있었다.
이들 발레리나들이 발레만 춘 것은 아니었다. 제네와 레냐니는 스커트 댄스도 추었다. 무용비평가들은 이를 발레의 전통에서 일탈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외국인 발레리나들은 뮤직 홀만이 아니라 허 마제스티, 라이세움, 콜리세움, 드루리 레인, 로열 오페라 하우스 등에서도 춤을 추었다. 발레는 국제적인 문법과 공통언어가 있어서 국제적인 교류에 적합했다. 서로 다른 환경과 맥락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발레의 전통에서는 공통적인 성격을 공유하고 있었다. 반면에 지나치게 기술적 탁월함만을 추구하는 나머지 개성을 상실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 의상
댄서들은 반쯤 가리고 반쯤 노출한 의상과, 살이 훤히 비치는 살색 타이츠를 입었다. 여성계가 비판한 것은 마치 아무 것도 입지 않은 것같은, 누드에 가까운 이 야한 의상이었다. 홍보용 포스터에는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한 야한 의상사진들이 실리기도 하였다.
댄서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키도 크고 풍만했다. 당시의 유행은 풍만한 여성이 인기가 있었고 미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여성들은 패드를 덧대어 몸을 부풀리기도 했다. 외모의 기준이 바뀐 건 러시아의 파블로바와 키야쉬트가 오면서부터였다. 발레리나들에게는 무대에서나 실제 삶에서 연기보다 외모가 중요했다. 아름다운 여성은 기량이 떨어져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댄서들의 최고의 덕목은 젊음, 우아함, 아름다움 등 신체적 매력이었다.
스탭과 단원
알함브라와 엠파이어는 모두 전속 발레 마스터를 두어 제작전반에 관한 사항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엠파이어에는 9명의 감독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발레리나 겸 안무가 카티 라너(Kattie Lanner)였다. 그녀는 비엔나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약하다가 영국으로 와 20여 년간 체재하면서 엠파이어에서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파울 탈리오니(Taglioni), 부르농빌 (Bournonville)등의 저명한 안무가와도 같이 작업을 하였다. 영국발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중의 하나로 꼽히는 카너는 낭만발레와 아델라인 제네시대를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라너의 후계자 프레드 파렌은 댄서로서의 기량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기획에서 큰 기여를 한 인물이었다. 아델라인 제네의 삼촌인 알렉산더 제네, 키야쉬트, 레몬 에스피노자, 에두아르드 에스피노자 등도 모두 고전발레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알함브라에는 17명의 발레 마스터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카를로 코피(Carlo Coppi)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카사티, 프라테시오 등의 무용인도 모두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이들은 영국만이 아니라 프랑스 뮤직 홀에서도 활약했다. 전속 음악감독도 있어서 이들은 신곡의 작곡, 기존곡의 선곡과 편곡, 오케스트라에 맞춘 리허설과 지휘를 담당했다.
디자이너는 오늘날의 디자이너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발레의 성공은 스펙터클에 있었기 때문에 디자인의 세련미와 장중함, 색채감, 의상, 특수효과 등은 공연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가장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디자이너는 알함브라와 엠파이어에서 같이 활약한 C. 빌헬름(본명은 윌리엄 피처)으로 1889년부터 1915년까지 엠파이어 홀의 대부분의 작품제작에 관여했다. 그는 디자인만이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 제작감독도 겸하였다. 한 사람이 제작의 총체적 관리를 함으로써 작품의 통일성이 강해진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었다. 기술스탭과 미술스탭은 의상, 세트, 소품, 목공 등 무대에서 벌어지는 기술적 사항과 미술분야를 맡은 스탭이었다. 이 밖에 가발 담당도 별도로 고용했다.
- 교육훈련
1880년대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무용교육기관이 없었다. 러시아 등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열악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무용학교가 있기는 했지만 극장에서 활약할 전문배우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니네트 드 발르와와 유니티 모어를 가르친 워즈워드 부인은 인디언들의 춤인 팬시 춤(fancy dance)과 예절을 가르쳤다. 드 발르와는 워즈워드 부인이 직업으로서의 춤에 대해 청교도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사회적 기술로서의 무용을 교육하는 사람조차도 극장에서의 경력을 도우려는 의지가 부족했던 것이다. 무용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젊은이들에게 열려진 교육기회는 알함브라와 엠파이어 홀 부속 무용학원이었다. 여기서는 뮤직 홀에 출연할 단원들을 교육하였다. 1876년에 라너가 설립한 전국무용학교는 1906년까지 1천여 명의 교육생을 배출하였다. 10세부터 입교가 가능했고 20세경이 되면 데뷔했다. 아델라인 제네의 삼촌인 알렉산더 제네는 1900년에 국제무용아카데미를 열고 주로 발레기술을 많이 가르쳤다. <코펠리아, 1906>에서는 푸앵트를 가르쳤다. 제네는 이탈리아식 교육시스템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엠파이어 경영진도 베델스가 이탈리식 교육에 경도되어 있다고 보고 제네와 협업할 것을 제안하였다. 카발라치도 무용학교를 운영했다. 당시의 교육은 1920년대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기술위주, 앵무새와 같은 모방교육에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 계급과 처우
뮤직 홀 발레는 엄격한 계급성을 가진 예술이었다. 군무단원들은 철저하게 위계적 조직을 형성했다. 이들을 구분하는 건 줄이었다. 첫 줄에는 기량이 우수한 댄서가 위치했고, 둘째 줄에는 기량보다는 나이와 외모에 따라 배치되었으며 뒷줄에는 초심자나 기량이 떨어지는 단원이 위치했다. 위계가 너무 엄격해서 군무단원들은 신분상승기회가 거의 없었다. 주역과 군무단원 사이에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키야쉬트는 단원과 같이 춤을 추라는 프레드 파렌의 지시에 격분했다. ‘ 코러스는 경험도 없을뿐더러 스텝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주역댄서는 전부 외국인이었고, 단원 훈련프로그램은 부족했으며 단원들은 대부분 노동자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역무용수와 엑스트라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지만 군무단원들 사이의 위계도 매우 엄격했다. 단원들의 주급은 서열에 따라 달랐다. 앞줄의 댄서들은 주급 35-38실링, 중간줄은 15-30실링, 뒷줄은 10-15 실링이었고 타이츠와 토슈즈는 본인 부담이었는데, 그 비용이 2실링 6페니였다. 반면 스타들의 주급은 매우 높았다. 댄서들은 로이 퓔러나 모드 알란, 아델라인 제네같은 스타가 되기 전에는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댄서들의 근로조건은 댄서의 지위와 홀에 따라 달랐다. 분장실에서도 스타는 개인 분장실과 좋은 서비스가 제공되었지만 군무단원들에게는 부족한 위생시설과 쥐가 들락거리는 컴컴한 방이 제공되었다.
그래도 알함브라와 엠파이어는 다른 직종보다 댄서에 대한 대우가 좋았다. 리허설 도중에 간식을 제공하였고 주역에게는 호텔식사를 제공했다. 그러나 주역들은 고된 스케쥴에 시달려야 했다. 모든 공연에 출연해야 했고 한 공연에서 두 번의 변신을 해야 했으며 15분 간격으로 세 개의 넘버를 소화해야 했다. 이런 스케쥴은 여러 주역무용수들이 번갈아가면서 출연하고 한 공연에서 두 개의 넘버만 추고 1시간 가량을 쉴 수 있었던 러시아의 제국극장에 비해서는 매우 고된 일이었다. 지각이나 결근, 게으름에 대해서는 벌금이 부과되었다. 댄서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꽉 짜인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아침 일직 출근해서 연습, 리허설, 공연을 했고 저녁 11시경이나 돼야 귀가할 수 있었다. 공장노동자들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다.
엠파이어 홀의 댄서 카라 트랜더서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다. ‘ 12명이 같이 쓰는 분장실에서 누가 누구의 타이츠를 입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독한 냄새가 나고 찌는 듯이 덥고 환기가 되지 않아,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웃어야 했다. 왜냐하면 관리자가 그렇게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첫 째줄로 승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티 라너는 지각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나 라너는 50살이 넘은 지금도 춤을 추고 있다. 우리는 남자역으로 출연할 때가 많다. 이번엔 군인으로 분장한다. 관객들은 우리의 다리를 보고 좋아한다. 가슴이 드러나지 않도록 잘 가려야 했다. 나중에는 황금가발을 쓰고 천사역을 했다. 백스테이지의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꼭대기에 앉아서, 머리를 구멍속에 넣고 하늘의 천사처럼 보이게 해야 했다. 그러나 사다리는 출렁거리고 너무 높아서 겁이 났다. 전혀 천사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습기찬 분장실과 차가운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 갑자기 뜨거운 무대로 들어간다. 기침과 감기가 악화되는 건 당연했다.... 하루 저녁에 두 개의 발레를 공연해야 하기 때문에 싫증날 때도 있었다.(『 Dance and Dancers in Victorian and Edwardian Music Hall Ballet』,130-140)
그렇게 힘든 일이었지만 고용의 안정성이 있었다. 결혼하고도 근무할 수 있었고, 오랜 기간 교류해온 동료들과의 우정은 돈독했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 앙 트라베스티
남성댄서는 인기도 없었고 언론의 관심도 약했다. 남성댄서들은 19세기 초 낭만주의 시대부터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1870년경이 되면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보조금을 지급하던 러시아나 덴마크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남성 댄서의 부족은 뮤직 홀 발레의 특징이었다. 여성이 이를 대신해야 했다. 이를 앙 트라베스티(en travestie 또는 travesty)라고 하였다. 관객들은 여성의 남성역할을 자연스런 일로 여겼다. 앙 트라베스티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남성 주역을 맡는 경우와 군무단원중의 남자소년 역을 맡는 경우였다 . 앙 트라베스티 댄서는 댄싱 역할과 마임역할로 나뉘어졌다.
제네는 남성 파트너를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01년에 가서야 아마데오 산티니라는 이탈리아 댄서를 파트너로 맞을 수 있었고, 1907년에는 폴 선드버그, 이어서 엔리코 체케티, 에두아르드 에스피노자 등이 등장했다. 체케티(Cecchetti)는 1888년부터 92년까지 엠파이어에서 공연하면서 지도자로도 명성을 떨쳤다. 남성 주역무용수들의 개런티는 프리마 발레리나보다 훨씬 적었다. 폴 선드버그는 제네가 주급 20파운드를 받을 때 5파운드를 받았다. 앙 트라베스티는 19세기에 유행했지만 16세기 중엽, 발레를 피렌체에서 프랑스로 전파한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 때에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그 역사는 매우 길다.
유명한 앙 트라베스티 댄서로는 말비나 카발라치(Malvina Cavallazzi), 프란체스카 잔프레타, 칼로타 모제티 등이 있었다. 카발라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프리마 발레리나로 1888년에 엠파이어의 <다이아나>에서 댄싱역할로 출연하였다. 프란체스카 잔프레타(Francesca Zanfretta)는 1895년부터 12년간 엠파이어에서 마임으로만 출연하였다. 그녀는 유능한 발레지도자였다. 우르술라 모레톤을 지도하였고 모레톤은 드 발루와 학교에 발레기법을 전수한다. 뮤직 홀 발레와 예술발레에 모두 영향을 준 것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이름을 가진 칼로타 모제티는 10살 때 알함브라 무용학교에서 공부하고 18살에 데뷔하였다. 제네와 베델스의 파트너로 활약하였다.
보통 남성이 여성역을 하는 것보다 여성이 남성역을 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에너지의 차이, 힘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건데, 그런 면에서 뮤직 홀 발레에서 앙 트라베스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두 여성 사이에 벌어지는 로맨스에 대한 감정처리도 쉽지 않을 것이다. 연극과 달리 발레에서는 자신의 목소리가 없고 몸으로만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1901년 엠파이어에서 제네의 파트너로 무대에 선 산티니, 1903년에 알함브라에서 <카르멘>의 산 호세역으로 출연한 볼베르트가 나오면서 앙 트라베스티는 약화되기 시작한다.
주제
뮤직 홀 발레역사에서 주제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계속 변해왔다. 주제는 당시 노동자 계층의 관심사, 사회적 사건, 시사문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등이었다. 징고이즘도 등장했다. 독일함대의 확장에 눌려 영국해군의 위상이 추락하자 뮤직 홀 발레는 영국해군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이런 작품들은 스펙터클을 추구하던 발레와 잘 맞아 떨어졌다. 뮤직 홀 발레는 현상타파보다 현상유지에 기울어져 있었고, 사회적 계급을 인정하면서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반영했다.
자연의 모습을 다룬 전통적 주제들도 있었다. 엠파이어의 <다이아나(1888)>, <실비아(1911)>, <물의 요정(1912)>과 알함브라의 <나르시스(1908)> 등인데, 이들은 낭만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신화나 동화, 전설 등을 다룬 초자연적 주제들도 있었다. 빅토리아 후기에는 영혼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이는 19세기 후반의 문화적 풍토였다. 알라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신데렐라 등이 인기있는 작품이었다. 또한 프랑스 , 스페인, 일본, 아프리카 등을 다룬 시사문제나 이국적 주제도 많았고, 로맨스나 선악의 대립같은 인간들의 갈등을 다룬 주제들도 있었다.
뮤직 홀 발레, 영국 발레를 지켜내다
1930년대 초반의 영국 발레계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1929년에 큰 빚을 남긴 채 디아길레프가 사망하면서 발레 뤼스는 해체되었고, 안나 파블로바도 1931년에 사망했다. 디아길레프의 막대한 빚의 도화선은 사고와 디아길레프의 고집이었다. 디아길레프와 발레 뤼스는 파리에서 출발했지만 런던에서 가장 많은 공연을 했다. 45% 이상이었다. 디아길레프를 곤경에 빠뜨린 것은 1921년 알함브라에서 공연한 <잠자는 숲속의 공주, Sleeping Princess)>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이름만 바꾼 작품이었다. 디아길레프는 늘 예술적 성취를 돈벌이보다 중시해 왔지만 이 작품은 상업적 목적을 위해 제작한 작품이었고, 이를 위해 여러 투자자들로부터 많은 제작비를 빌렸다. 그러나 공연 첫 날 장치봉이 떨어지면서 세트가 부서졌다. 공연은 중단되었고, 수리하는 동안 디아길레프는 오케스트라에게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하라고 하였다. 디아길레프는 작품의 이름을 미녀가 아니라 ‘공주’를 고집했고, 작품도 지나치게 지적이고 우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공연은 105 회만에 종료되었고 디아길레프는 큰 빚에 시달리게 된다(https://www.standard.co.uk). 나중에 빚을 갚기는 하였지만 이 사건 이후로 재정적 곤경에 빠진 것 같다. 1909년에 창단되어 20여 년간 유럽 발레계에 엄청난 영향을 준 발레 뤼스의 해체는 발레계로서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영국의 무용인들은 이 공백을 메꾸기 위해 나섰다. 영국의 첫 발레단은 1931년, 올드 빅 극장과 새들러즈 웰즈 극장이 연합하여 만든 빅 웰즈 발레단이다. 니네트 드 발르와(Ninette de Valois)가 단장을 맡았고 6명의 댄서로 출발하였다. 1930년대 초반에는 무용안무가와 평론가들은 발레발전을 목표로 카마르고 협회(Camargo Society - 18세기의 프랑스 댄서 마리 카마르고의 이름을 따서 만든 단체)가 창설되었다. 이들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영국적인 발레를 만들기 위한 작은 시도였고, 이후 영국 발레는 세계에 자랑할만큼 성장한다. 빅 웰즈는 영국의 첫 발레단이자 영국적 발레의 시초라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18880-1910년 사이의 30여 년간의 뮤직 홀 시대의 발레를 사장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빅 웰즈에 구현된 국립발레는 갑자기 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뮤직 홀 발레가 과거의 낭만발레를 흡수하고 보존해 왔기 때문에 탄생했다는 것이다 . 뮤직 홀 발레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뮤직 홀 발레가 예술적 가치가 부족한 가벼운 오락이기 때문에 이를 예술로 볼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필리스 베델스는 엠파이어의 <코펠리아>를 비롯한 몇몇 작품들은 높은 예술성을 보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영국발레의 기원을 엠파이어에서 키야쉬트가 은퇴하고 영국 최초의 프리마 발레리나 필리스 베델스가 이어받은 1914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188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의 30년간, 알함브라와 엠파이어 홀에서 제작되었던 많은 발레들도 엄연한 영국발레의 중요한 한 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갑론을박 속에는 무시할 수 없는 뮤직 홀 발레의 성과가 숨어 있다. 뮤직 홀 발레의 무용인들은 대중춤과 예술춤을 오가면서 발레의 맥을 이어온 것이었다.
1920-30년대에 아델라인 제네, 필리스 베델스, 에두아르드 에스피노자, 루이사 코르마니, 엔리코 체케티 등과 같은 무용인들은 뮤직 홀에서 일하면서 클래식 발레의 발전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이들은 1920년에 오페라 댄싱협회를 조직한다. 니네트 드 발르와의 빅 웰즈 발레단 창설은 뮤직 홀과 상업극장, 그리고 클래식 발레에서의 경험이 기초가 된 것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그녀는, 1907년 엠파이어에서 제네와 베델스를 보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뛰어들어 1913년부터 23년까지 상업극장에서 공연한다. 1923년부터는 발레 뤼스에서 활약(1923-26)하다가 1931년 빅 웰즈 발레를 창단한다. 그녀는 엔리코 체케티, 에두아르드 에스피노자 등에게서 배웠다. 드 발르와의 작품특징은 이야기의 가독성과 빠른 전개, 등장인물의 성격화, 강한 연극성 등인데 이들 특징들은 모두 뮤직 홀 발레의 특징이었다. 상업극장과 뮤직 홀, 레뷔 등에 출연하면서 상업발레의 특성들을 몸에 익힌 것이다. 프란체스카 잔프레타는 엠파이어에서 12년간 수석무용수로 일하면서 드 발르와와 우르술라 모레톤을 지도하였는데 ,모레톤은 빅 웰즈 학교에 잔프레타의 교육법을 도입한다.
이처럼 뮤직 홀 발레가 자연스럽게 클래식 발레로 이어졌고, 클래식 발레는 뮤직 홀 발레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덴마크 등 발레선진국들의 댄서와 안무가들은 뮤직 홀과 클래식 발레에서 같이 작업했다. 뮤직 홀 발레도 고전발레의 문법과 테크닉을 따랐다. 뮤직 홀 발레라는 이름이 주는 인상 때문에 대중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기반은 고전발레였고 여기서 활약한 댄서, 안무가들도 모두 고전발레를 익힌 사람들이었다. 영국인 발레댄서가 등장하기 시작한 건 1930년대부터였고, 1930년 이전까지 뮤직 홀 발레는 침체해 있던 영국발레의 명맥을 이어 20세기 ‘영국적 발레’를 개척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뮤직 홀 발레는 오페라 극장에서 외면하던 발레를 흡수하여, 이를 보존하고 더 큰 바다로 내보낸 저수지였다. 이렇게 로열 발레(새들러즈 웰즈 발레가 이름을 바꾼)가 태어났고, 로열 발레는 니네트 드 발르와, 프레데릭 애슈톤, 마고트 폰테인 등 재능있는 무용인들의 노력으로 세계적인 발레단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