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의 시선은 현재진행형이다.
[더프리뷰=서울] 김윤지 무용이론가 = 화관무에 관한 원고를 쓰기 전에 포털사이트 검색 창에 ‘화관’ 그리고 ‘화관무’를 입력했다. 검색 결과, 화관은 ‘꽃으로 장식한 관(crown)’으로, 그리고 화관무는 ‘화관을 쓰고 추는 춤’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이 춤의 분류명은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어떤 검색분류 페이지에선 궁중무용으로, 또 다른 곳에선 민속무용으로 분류하고 있고 분류에 ‘어려움’을 겪는 몇몇 페이지들은 두루뭉술한 설명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 춤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범주부터 확인하고 싶었던 나로선 다소 당황스러웠다.
이것이 우리가 ‘신무용’이라고 명명하는 춤의 현주소이자, 아이로니컬하게도 내가 이 원고의 청탁을 수락한 이유이기도 하다.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무용’이라는 뜻의 근대 신무용이 100년 역사를 앞두고 있다. 50년 이상이 지난 근·현대 시기 문화유산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보전하고자 하는 정부와 관계부처, 그리고 국회의 의지와 실행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그 때 그 시대, 신무용과 그 이후의 춤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자 한다. 이리저리 엉켜있는 이 춤들의 갈래를 지어보고 가다듬어 보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원고의 기획 취지와 일맥상통하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화관무’란 주제는 매우 매력적이다. 춤의 분류 작업은 결코 간단치 않고, 이 지면을 통해 완벽하게 설명하기는 더욱 어렵다. 무형(無形)적 예술을 굳이 유형(有形)적 지식 체계에 적용해 해석할 필요가 있냐는 반문도 있을 것이다.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무형적 예술 작업들이 자칫 ‘고착’의 위험을 동반할 수도 있다. 분명 그런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 춤’이 걸어온 갈래의 운명, 그리고 그 운명이 그려온 이 춤의 생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화관무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 춤이 걸어온 시대별 표상을 거슬러 오르며 그 맥을 짚음으로써 현존하는 춤들을 모두 안을 수 있는 분류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과거에 멈춰진 분류 체계와 주요 분류명은 참고하되, 현존하는 춤들의 갈래를 지을 수 있고, 시대별로 요구되는 분류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또한 앞으로 이 춤은 더 많은 갈래로 뻗어나갈 것이라는 발전적 진화란 이름의 미래 가능성을 염두하며 이 춤을 대하고자 한다.
‘춤’은 순수 우리말이다. 상체 중심의 한자어 ‘무(舞)’로 표기되어 왔으며, 근대를 기점으로 뛸 ‘용(踊)’이 들어와 ‘무용(舞踊)’이 되었다. 무용(舞踊)은 지금까지도 교육과 예술, 사회 분야 등에서 공식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급변과 혁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근대에 유입된 무용은, 시대적 특성에 걸맞게 한국의 춤판을 뒤흔들 정도의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외래 서양 춤을 동경하게 되고, 급기야 춤을 배우고자 유학을 떠나기에 이르다. 이때 선보였던 춤들은 한국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춤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춤을 구성하는 원리와 표현 양식, 구성과 의도 등 모든 측면에서 반대였다. 즉, ‘반전통의 춤’이었다. 그래서 그 춤에 ‘새로울 신(新)’이라는 한자를 덧대 ‘신무용’으로 불렀다. 하지만 이 춤의 인기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한 듯하다. 오히려 20세기 중반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춤과 동시대적인 근대 요소들을 접목한 ‘한국적 신무용’ 또는 ‘재래적 신무용’이 더 많은 관객층의 호응과 지속적인 관심을 받게 되면서 이런 부류의 춤들이 지금까지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본다. 세계적인 무희(舞姬) 최승희가 걸어온 춤의 역정을 살펴보자. 그녀는 일본으로 건너가 배운 외래적 춤을 1930년대 처음으로 선보였지만, 그 춤은 국내외적으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에 한국의 춤 문화를 배워보라는 스승의 조언에 따라 한성준 등과 같은 전통예인들로부터 전통춤의 방식과 요소들을 습득하게 된다. 이후 최승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바탕으로 외래적인 춤과 재래적인 춤을 접목한 한국적 신무용을 탄생시킨다. 무당춤, 장고춤, 부채춤, 보살춤, 한삼춤 등이 그것이다.
이에 우리가 흔히 명명했던 ‘신무용’은 근대의 외래적인 신무용과 재래적인 신무용으로 나눌 수 있으며, 세계적인 호응과 민족적 정신들이 맞물린 재래적 신무용은 반세기 넘도록 전통춤처럼 촘촘하게 다듬어져 오늘날 여러 갈래의 양상으로 발현되고 있다. 이것은 ‘전통 근대춤’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의 화관무는 두 갈래의 생김새를 보여준다. 이 춤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정재적인 느낌을 권번의 문화와 접목하여 전승해온 ‘민천식류(類) 화관무’와 재래적 신무용의 대표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인 ‘김백봉류(類) 화관무’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을 전통 근대춤이라는 현대적인 분류명에 담아본다.
먼저 ‘민천식류 화관무’는 1898년 태생인 민천식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이왕직 아악부에서 춤을 2년 정도 연수 받았고, 개성과 해주 근처 권번의 수장으로 활동하다가 6·25전쟁 이후 월남한다. 이 무렵 정부는 민족의식의 제고를 위해 전통문화 재건운동을 본격화한다. 민천식을 포함해 월남한 예인들을 중심으로 탈춤의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봉산탈춤(1967년), 강령탈춤(1970년), 은율탈춤(1978년) 순으로 국가무형문화재가 된다. 이 때 그는 봉산탈춤의 놀량창, 사자 마부역을 맡으면서 종목 지정의 공로를 인정받아 보유자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타계하였다.
그의 화관무는 제자들에 의해 전수되고 있으며, 2011년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4호로 종목 지정과 보유자 인정이 이뤄졌다. 이 춤은 궁중무용의 복식에 화관과 한삼을 착용하는데, 춤에서 풍기는 이미지 및 동작의 구성 등에서 정재와 유사하다. 우선 정재를 이루는 표현 양식들이 대거 등장하고, 춤 동작소의 유형이 간명하며 동선의 변화와 크기 또한 절제된 태양을 선보이고 있다.
확산과 모음의 변주곡, 김백봉류 화관무의 기운생동(氣韻生動)을 전하다.
김백봉류 화관무는 다르다. 필자는 몇 달 전, 국립극장의 레퍼토리 역사를 알기 위해 수십 년이 지난 무용공연 영상물을 어렵게 구해 시청했다. 그 중엔 1984년 공연된 무용극 <도미부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작품에 화관무가 등장한다. 총 6장으로 구성된 무용극 중 제 2장 ‘궁중에서 펼쳐지는 정재와 민속춤 그리고 왕의 분노’라는 무대였다. 무대연출은 전형적인 궁중의 내부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곤룡포를 입은 왕과 왕비가 무대 상수 쪽으로 점잖게 입장하면 곧바로 연희가 시작된다. 이어서 우리에게 익숙한 학춤과 처용무, 그리고 화관무 등이 재구성되어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다만 기존 정재양식과 동작구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강하고 빠르게, 그래서 한층 더 역동적인 무대가 펼쳐진다. 특히 한삼의 뿌리기 동작이 독특했는데, 대형 변화가 무쌍한 화관무를 보며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 춤의 역사를 추적하는 데 단초가 되었다.
이 춤의 역사는 1954년 '고전형식'이라는 제목으로 개인발표회를 연 김백봉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춤의 이칭(異稱)이 바로 ‘화관무’이다. 화관무는 궁중문화의 요소들을 착용했지만, 춤을 이루는 방식과 구성, 그리고 원리적 측면에서 전형적인 정재와 달랐다. 한삼을 들면서 손에 쥔 꽃의 오브제를 최대한 활용하여 춤에 접목시켰고, 전면 또는 일렬 중심으로 간명하게 보여주는 정재의 무대 패턴에서 원형, 사선형, 삼각형 등 다양한 대형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다. 강·약·고·저가 확실하게 보이는 동작들을 연결시키면서 변화가 분명한 장면들을 연출했다. 이 춤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에서 확장과 모음이, 강함과 약함이, 높음과 낮음이 적절한 기법으로 적용되며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에너지를 전해주는 변주곡을 탄생시켰다.
‘화관무’라는 이름, 그 외적인 형식만으로는 고요하고 정적이며 절제된 정재를 예상했는데 김백봉류 화관무는 그 예상을 뒤엎는 반전 드라마의 재미와 묘미를 선사함으로써 이슈가 된다. 그리고 1970년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여러 필름을 통해 이 춤이 국가를 대표하는 주요 행사에 고정 레퍼토리처럼 선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먼저는 1970년에 제작된 <한국의 민속무용 공연>에서 화관무·장고춤·부채춤·연가 등이 연희되는데, 예상외로 영상의 상태가 양호한 편이라 우리는 1970년대 화관무의 모습을 선명하게 만나 볼 수 있다. 1974년 미국 포드 대통령 방한 시 준비한 민속공연, 1975년 가봉공화국 봉고 대통령 방한 기념 리셉션과 만찬회의 민속공연, 1976년 멀둔 뉴질랜드 수상 방한 민속공연 및 국립합창단 공연에서도 이 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궁중아악-화관무-북춤-부채춤 순의 구성으로 계속 연희되었다.
이는 화관무가 국가를 대표하는 공연물로 자리매김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러한 화관무의 위상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공연을 통해 그 정점을 찍었다. 김백봉을 선두로 2천여 명이 연출한 화관무는, 이 춤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국내외적으로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춤이 궁중복식을 차려 입고, 국가를 대표하는 표상으로 자주 노출되고, 궁중아악과 함께 레퍼토리화됨에 따라 때로는 민속춤으로, 때로는 궁중춤으로 여겨지며 엇갈린 분류 프레임이 씌워졌다. 이로 인해 이 춤의 갈래가 혼돈되기 시작했다. 또한 반세기가 넘도록 전승되어온 이 춤은 김백봉의 스승인 최승희의 화관을 쓰고 추는 춤과도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승희가 구사하는 외래적인 것과 재래적인 것의 조화를 이룬 ‘한국적 신무용’의 춤태를 적용했으며, 오랫동안 김백봉이라는 솔리스트가 군무의 중심을 잡아줌으로써, 작품화된 예술성을 지속적으로 이어간 것이다.
김백봉류 화관무, 근대무형유산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
그런 결에서 보면 김백봉류 화관무는 가장 대표적인 근대무형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소재에 바탕해 지속적으로 연희되었고, 겹겹이 쌓여 있는 시간 속에서 진화되는 양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즉, 김백봉류 화관무는 전통적인 기법으로 근대라는 시대와 함께하면서 전승되어온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근대춤이자, 근대유산의 목록 중 핵심적인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어떤 목적이나 어떤 실리에 의해 맺는 마무리가 아니다. 필자는 한국의 전통적인 소재와 기법, 그리고 그 춤의 정신을 전하기 위해서 오로지 춤에 정진했던 ‘우리 춤 1세대’ 어른들의 춤 역사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을 뿐이다. 나아가 춤의 사실들을 통해 그 분들의 노고와 마음을 잠시나마 환기시켜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 춤 1세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 민천식은 한 번 뵌 적도 없는 분이다. 이번 원고를 준비하는 중에 김백봉 마저 우리 곁을 떠나셨다. 이제는 그분들의 춤을 가슴으로만, 글자로만 그리워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 분들이 남긴 춤을, 춤의 사실들을, 춤의 가치들을 제대로 그려내는 것이 남겨진 우리 세대의 소임일 것이다. 그 분들의 춤 문화를 우리답게 보여주는 것, 그리고 제대로 보여주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하나의 춤이 여러 갈래로 나눠져 쭉 뻗어나가는 것, 우리의 다양한 모습을 예술적으로 진화시켜 나가는 것, 그 진화의 표상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그 높은 단계의 이상까지 그려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