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김영희 전통춤이론가 = 20세기의 후반기에 한국 신무용을 이끌었던 무용가 김백봉(金白峰, 1927-2023)이 올해 4월 11일 향년 96세로 작고하셨다. 최승희의 춤에 감화했던 아버지 김병삼의 손에 이끌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최승희의 공연을 본 후, 1940년 13세에 최승희에게 춤을 배우고자 동경으로 향했고 그의 문하에서 무용을 수학했다. 그리고 최승희무용단의 무용수로서, 지도자로서 일본, 중국, 만주, 소련의 순회 공연에 참여하였다. 1951년 1‧4후퇴 시기에 월남하여 서울 정착 후에는 한국 신무용의 대명사라 할만큼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김백봉은 대한민국 무용계의 전방에서 스승 최승희의 춤과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고 공연하며 또한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으니, 우여곡절 깊으면서 찬란했던 예술인생을 마감하신 것이다.
김백봉 선생이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수행했던 70년이 넘는 무용여정은 단순히 예술가 개인의 인생이 아니었으니, 지난 세기 대한민국 무용사의 중요한 장면들에 그가 있었다. 1954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올린 무용발표회에서 <부채춤>과 <고전형식>(후에 <화관무>로 바뀜)은 이전 시기의 춤에서 맴돌고 있던 당시 무용계에 돌파구를 제시했고, 1962년에는 경향신문을 통해 제2공화국 최고회의에 무용계 발전을 위한 국립무용단 설립, 국립무용연구소 설치 운영, 해외 유학과 파견의 장려 등을 공개 건의했다. 1960-70년대 민속무용단의 해외공연에서 김백봉의 <부채춤>은 한국을 알리는 무용 사절의 대표가 되었고 전 국민이 즐기는 춤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1970년대 중반 해외공연에 나가는 민속무용단의 작품들이 한국의 민속춤이 아니라는 학계의 문제제기에 대해 무대춤으로서 무용양식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꿋꿋이 밝혔다. 또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2000명이 군무로 춘 <화관무>를 진두지휘하고 직접 춤추었다. 그리고 최승희가 해금된 후에는 최승희 작품의 재현에 힘을 기울여 의미 있는 공연도 성사시켰다. 이러한 장면들에 김백봉 선생이 우뚝 계시면서, 20세기 한국무용사에서 신무용을 현현시켰던 것이다. 이는 김백봉의 무용이 시작된 지점에서 그의 몸에 박힌 춤정신과 예술정신을 평생 동안 그대로 수행하고 실천한 결과였으며, 20세기 한국무용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김백봉 선생이 한국 무용계 안팎에 여러 의미를 남겼으며, 여러 분야에 성과들을 남겨 놓으셨기 때문이다.
우선 김백봉은 신무용을 양식화한 최승희의 직계 제자로서, 최승희의 신무용 양식을 토대로 한국에서 활동한 무용가였다. 일본에서 최승희 춤에 입문 후 1941년 스승의 일본 공연에서 <궁녀무>로 데뷔했고, 1943년부터 해방 시기까지 최승희의 다른 제자인 장추화, 이석예, 하리다 요코과 함께 일본, 중국, 만주 공연에 참가했다. 1944년 안제승(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동생)과 결혼함으로써 김백봉은 가족으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더욱 긴밀해졌다. 해방 후 최승희무용단이 해단되었을 때도 유일하게 북경의 동방무도연구소에서 최승희와 함께 활동했으며, 스승 최승희가 1946년부터 북한에서 활동할 때 김백봉도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 제1무용수이자 지도자로 활약했다. 결국 김백봉은 1950년까지 약 10년간 스승 최승희에게 춤 뿐만 아니라 의상, 무대, 조명 등 공연 준비과정을 철저하게 학습 받으며 무용가로서 성장했던 것이다. 최승희는 김백봉 무용예술의 뿌리이자 자산이었다.
그리고 김백봉은 최승희 신무용을 근간으로 하여 20세기 후반 한국의 신무용을 일구었다. 이미 평양에서 올린 개인공연에서 <농촌풍경> <녹음방초> <춘광> 등을 창작했으며, 1954년 서울에서 첫 발표회를 열었을 때 선보인 <부채춤>과 <화관무>는 신무용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당시 무용평론가 조동화는 “고전조(古典調)의 새로운 해석과 기법의 응용으로 민속무용의 근본문제를 파고들어 현대적인 표현으로 과거의 나열기교를 배격한 것이 그 특색이라 할 것이다. … 자칫하면 템포있는 현대 생리에 지각하기 쉬운 고전조를 품(品)을 잃지 않으면서 활달자재롭게 보여준 것은 원숙한 기교와 지성의 힘일 것이다. 특히 발레의 수법(꼬르드 발레의 효과)을 등장시켜 활기있는 대열변형의 기하학적인 유니존의 효과를 꾀한 것 그리고 군무의 대위법을 평면적인 고전조를 입체화하려는 시도 등 좋은 시범이라 할 것이다.” (동아일보 1954. 12. 9) 라고 평했다. 즉 김백봉의 작품이 현대적 감각으로 활기있게 대열을 변형하고 입체적으로 표현하면서 고전적(古典的)인 품격을 놓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1950년대 한국은 월북한 최승희를 거론할 수 없었으나, 그의 신무용의 아류들이 떠돌아다니던 시절에 발표회를 통해 첫 인사를 한 김백봉의 무대 구성이 당시 무용계에 새로운 면모를 제시하면서 자극을 던졌던 것이다.
이어서 1959년 김백봉신작발표회에서 <무녀도의 인상> <선의 유동> <섬광> 등을 창작했다. 그중 <선의 유동>은 화려한 다른 소품들과 달리 순백색(純白色)을 기조로 하여 흰 치마저고리에 짧은 손수건을 들고 추었던 군무였다. 눈송이의 움직임을 내재화하여 고요하면서 때로는 역동적인 원형윤회와 같은 이미지를 형상화함으로써 캐릭터나 소도구 중심의 소품들을 벗어나 대형 무대에 추상화된 이미지를 표현한 군무 작품이었다. 또 1972년 교통사고를 겪은 후 의욕을 상실한 상황에서 연습실에서 들려오는 가야금산조 소리에 춤추며 기운을 차리고, 1973년부터 산조의 곡조에 소품들을 발표했다고 한다. 이 소품들을 <청명심수(淸明心受)>라는 제목으로 엮어 1993년에 산조춤으로 발표했다. 35분 규모로 명상(瞑想) - 개안(開眼) - 법열(法悅) - 공(空) - 환생(還生)의 흐름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청명심수>는 전체를 춤출 수도 있고, 부분을 출 수도 있으며, 현재 여러 제자들에 의해 추어지고 있다. 그리고 1997년 김백봉 춤 60년을 기념해 김백봉춤보전회가 주최한 ‘아 김백봉!’에서 일흔 살의 나이로 <만다라>를 춤추었다. 최승희의 <보살춤>을 군무 구성으로 각색하여 23분의 대규모 작품으로 창작한 것이다. 그 외에 무용극도 지속적으로 창작했다. 1956년 김백봉무용발표회에서 무용극 <우리 마을 이야기>(2막)를, 국립무용단 정기공연에서 <심청>(1975), 서울시무용단 정기공연에서 <청계>(2005)를 안무했다.
김백봉 선생의 또 다른 주요 업적은 1965년 경희대학교 무용과가 개설되면서 교수로 부임한 후 1992년까지 제자를 양성하면서 무용계에 큰 예맥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그 예맥은 ‘경희대 스타일’이라고도 불리는데, 김백봉의 신무용 양식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이는 1963년에 개설된 이화여대 무용과의 예맥과 쌍벽을 이룬다고 하겠다. 이화여대 무용과가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장르에서 창작춤 중심으로 전개해갔다면, 경희대 무용과에서는 김백봉 선생이 교육하고 가꾼 신무용 스타일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들이 각 대학 무용과에 자리잡았으니, 경희대에 김말애, 성균관대에 전은자, 충남대에 정은혜, 강원대에 김경회, 경희대에 윤미라, 대진대에 신명숙, 그리고 장녀 안병주가 경희대, 차녀 안나경이 신한대에서 김백봉의 춤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외 많은 제자들이 전국의 학교와 무대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그처럼 많은 제자를 둔 무용가도 없을 것이며, 김백봉 선생의 큰 보람일 것이다. 더불어 사단법인 김백봉춤연구회(이사장 안나경)가 설립되어 김백봉 선생의 무용 가치를 확산하고 있다.
그리고 무용가 김백봉의 주요한 무용사적 의의가 또 있는데, 신무용의 유산을 2000년대 넘어서도 지속적으로 공연하며 남기고자 했다는 점이다. 1980년대 무용계에 한국 창작춤들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신무용 작품들에 대한 관심은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최승희가 해금되고, 북한춤과 중국 조선족의 춤에 대한 정보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96년 서울예술단이 창단 10주년 공연으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 ‘최승희: 어제와 오늘’을 기획했으며, 김백봉은 이 공연에서 최승희 작품의 재현을 위해 전체를 총괄했던 것이다. 최승희가 안무한 <천상 옥적곡> <천상 칠석의 밤> <초립동> <검무 격(格)> <장고춤> <에헤라 노아라> <보살춤> <낙천(樂天)> <세 가지 전통 리듬> 등을 재현했다. 그리고 2002년 광주시립미술관 주최로 열린 ‘춤꾼, 최승희 사진전’에도 참여했다. 개막공연에서 최승희 작품인 <옥적곡>과 <검무>를 자신의 딸인 안병주와 안나경이 추게 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김백봉 선생은 신무용을 근간으로 하면서 전통춤의 유산을 지속적으로 자기 소재로 작품화하고자 했다. 대구의 박지홍에게 승무를, 이동안에게 태평무와 진쇠무도 배웠으며, 봉산탈춤의 무보화를 시도하여 『봉산탈춤 무보』(1976)도 출간하였다. 또 한국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공적, 사적으로 조직된 예술단이나 무용단에서 무수히 많은 공연을 했다. 1958년부터 동남아지역 순회공연을 위한 한국친선예술사절단, 1962년 파리세계민속예술제 참가를 위한 한국민속예술단, 1964년 제12회 동경올림픽과 1968년 제13회 멕시코올림픽에 참가한 무용단 등에서 안무자 겸 주역 무용수로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이렇게 긴 여정에서 무용가 김백봉은 20세기 중후반 한국의 무용계에 중요한 족적들을 남겼으니 그의 이름이 한국무용의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김백봉 선생은 2000년에 진행한 문애령 평론가와의 좌담에서 다음과 같이 구술했었다. “최승희 춤의 계승에 대해 전통무용을 전수한다든가 이런 개념으로 보면 안돼요. (최승희) 선생님 춤을 보존했다고 그럴 수는 없고, 맥을 이어서 자기 예술활동을 한 것이지요. 아마 제가 어딘가에 (최승희) 선생님 같은 데가 있겠지요. 예술관이라든지 제가 무대에서 본 것을 머리에다 두고 저도 선생님같이 되겠다, 혹은 더 발전하겠다. 제 나름대로 열심히 한 것을 칭찬받고 싶어요. 선생님 춤을 그대로 춘 것은 하나도 없어요.”(문애령, 『한국현대무용사의 인물들』, 눈빛, 2001, 91p.) 라고 말했다.
이 답변에서 김백봉 스스로 자신의 무용이 넓은 의미에서 20세기 초에 들어온 신무용의 맥락에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의 무용이 최승희의 스타일을 따르고 있지만 그 무용을 그대로 추지 않았고, 창작자로서 자신의 예술로 승화시켰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김백봉 선생은 좁은 의미의 신무용으로서 고유한 신무용 스타일을 20세기 후반에 성취하고 남기셨다. 그러므로 대표작 <부채춤>을 포함하는 김백봉 선생의 예술적 성취를 무용계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자체로 가치로울 뿐 아니라. 그 속에 현재화할 수 있는 우리 무용의 자산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학으로서 무용가 김백봉을 다시 추모(追慕)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