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장승헌 공연기획자 = '공연기획자'란 꼬리표를 달고 지내온 지가 어쩌다 보니 40년을 훌쩍 넘겨 버리고 말았다. 1980년대 초반,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아르바이트 삼아 <까망>과 <스테이지 뉴스>란 공연정보 안내지 편집 일을 시작한 것이 결국 지금까지 나의 비정규직 전업으로 이어질 줄이야.... 참 세상사 모를 일이 한 평생 사람의 하는 일이라니... 그동안 나는 과연 스스로 행복했던 것일까? 불혹이란 바쁜 시간을 지나 지천명도 거치고 이순의 나이까지 한량처럼 철없이 넘긴 이즈음, 자꾸만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 그동안 참 많이도 변한 것 같다. 우리 사회 전체와 집단, 그 속 사람들, 아울러 춤계 주변 이웃들까지.
춤을 무작정 좋아하고 무용가들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죄로 이른바 '천형'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언제부터인가 자주 한다. 생각해보면 친애하는 거장 피나 바우쉬와의 만남(1994년), 1998년 제1회 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 무대를 통해 만난 지역의 춤 명인들을 찾아 다니다 알게 된 아버지 같은 이윤석 고성오광대 무형문화재 선생, 그들과 가족처럼 가까운 대화와 소통의 마음고리를 맺게 된 고마운 시간들 -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시절인연'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기대치 않았던 공연에서 춤을 눈물겹게 잘 추거나 기가 막힌 작품으로 존재의 무게감을 던져 주는 안무가를 발견한다든지, 혹은 정말 예쁘고 마음 착한 무용가들이 있어, 늘 다사다난하고 편치 많은 마음의 짐에도 불구하고 나름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음을 고백한다.
춤 언저리 40여년, 그 세월의 중심에서 한국무용가 배정혜 선생과 리을무용단은 내게 큰 기쁨과 존재의 의미를 확인시켜 준 소중한 보석 같은 존재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춘다’는 신념으로 탄생한 리을무용단은 지난 1984년 오은희의 춤 <대화>를 시작으로 1985년 황희연의 춤 <이 땅에 들꽃으로 살아> 등 연속적으로 중량감있는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면서 창작한국춤계에 큰 파도를 일으켰다. 마침내 1986년, 당시 문예회관 대극장 무대에서 공연된 배정혜 안무 <유리 도시>는 나에게 한국창작춤의 롤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후 리을무용단 공연이 있을 때마다 이런저런 뒤풀이 모임과 송년파티까지, 리을 가족들이 모인 곳은 곧 나의 힐링캠프와도 같은 쉼터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리을무용단은 대부분이 대학동문 단체들이던 당시 무용계의 상황에서 좀 독특한 데가 있었다. 첫 스승인 배정혜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선화예고 한국무용 전공생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지난 40년 동안 변함없이 단단한 팀워크를 과시하고 있다.
배정혜 선생은 원래는 강원도 지역으로 인식되던 현재의 함경남도 산방에서 1944년에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 피난을 떠나 강원도 원주에서 성장했다. 금년 80세를 맞은 배정혜 선생이 '신전통춤'을 화두로 <배정혜 춤 80년 기념공연>을 연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반갑고 뭉클한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선생은 지난 2014년 봄에도 이번 공연과 같은 공간인 세종문화회관 M극장에서 <배정혜 신전통춤>을 공연한 바 있다. 이틀간 작품 22편을 무려 4시간 20분 동안 무대에 올리는, 실로 어마어마한 기획력을 발휘를 해 당시 우리 무용계에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었다. 필자는 이번 <배정혜 춤 80년 기념공연> 나흘간의 공연 중 첫날 개막공연과 마지막 폐막공연을 관람했다. 두 차례 영상을 통해 선생의 치열했던 춤 여정을 바라보는 동안 먹먹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첫 날, 배 선생은 신전통춤 <심 살풀이춤>으로 관객과 만났다. 보랏빛 의상, 그리고 흰 명주수건을 대신해 핑크색 수건으로 이목을 끌며 담백한 즉흥적 춤사위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초반부, 다소 긴장해 보이기도 했지만, 소녀적 감성은 여전히 빛났다. 이후 사흘간 명작무 <풍류장고춤>으로 객석을 쥐락펴락했다. 장고 몸통보다 더 화사한 푸른 한복을 특유의 맵씨로 장착한 현역 원로 무용가의 춤 내공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열광적인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아울러 중진 한국무용가 윤미라<달구벌 입춤>, 정혜진<고풍> 및 중견 남성무용가 김용철, 김재득, 윤성철, 이정윤 뿐만 아니라 전진희, 정은숙, 김향, 김정민, 곽시내, 김지은 등과 현대무용가 김남진, 연출가 조정근까지 축하무대에 섰다.
배정혜 선생. 그간 누구도 실현하지 못한 국립국악원 무용단, 서울시 무용단, 그리고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직을 두 차례나 역임했다. 놀라운 행보가 아닐 수 없다. 그 뒤에는 한 평생 ‘무대 뒤 춤 조련사, 배 삼촌' - 배명균 선생이 계셨다. 그를 빼놓고는 배정혜 선생의 춤 인생을 섣부르게 논할 수 없다고 필자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배 삼촌‘에 대한 이야기는 훗날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한편 리을무용단 창단 멤버들인 황희연, 오은희, 문선희, 전유오, 김현숙 등의 모습이 공연 당일 무대와 객석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던 안타까운 현실풍경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선생은 이번 공연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 후반기를 갈무리하는, 진정성 가득한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수 차례 실내외 공간에서 사전 리허설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성과는 빛났다. 나흘 동안 매일 세종 M시어터에서 출연진을 바꾸어 가며 80분씩 공연, 우리 무용계에 또 다시 화제와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김수현, 김현미, 곽시내 등 오랜 리을무용단 창단단원들과 장혜림, 김지은, 김보연 ,이고은, 한지혜 등 국가대표급 무용수는 물론, 차세대 한국무용 스타들에 이르기까지 출연자들의 개성과 춤 맵씨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다시 보기 어려운 무대였다.
금년 봄, 우리 시대를 대표하던 ‘신무용의 산 증인’ 두 분이 귀천, 하늘 여행을 떠났다. 한 시대가 기어코 저물고 말았다. 현역 원로 무용가로 전설처럼 무용현장을 지켜오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김백봉(97세), 김문숙(96세) 선생이 노환으로 타계하셨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는 시기에 전해진 부고, 잠시 멍했던 그 기분. 물론 어느 정도 예견은 하고 있었지만 지난 3년여 모두가 힘든 시기를 어렵게 버텨왔던 만큼 황망함이 훅 가슴을 스쳤다.
이제 신무용의 한 시대가 저물었다. 최승희, 조택원이라는 개척자들, 이후 70년 이상 춤 현장을 지켜온 원로 무용가들이 있지만 노후 시기의 활동에서는 개인별로 차이가 극명하게 나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이 질곡의 한국춤 역사를 후대가 분명 기록하고 기억할 것이리라.
그런 가운데 노년에도 불구하고 계속 춤의 열정을 발산하는 배정혜 선생 같은 원로 무용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위안과 신뢰이다. 브라보! 천재 소녀 배숙자(배정혜) 선생, 다사다난한 80년 춤 인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