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신 카시모토와 에릭 르 사주 (사진제공=인아츠 프로덕션)
[더프리뷰=서울] 김광훈 바이올리니스트/음악칼럼니스트 = 필자가 다이신 카시모토(Daishin Kashimoto, 1979-)를 알게 된 것은 1999년에 녹음된, 그러니까 그의 나이 스무 살에 녹음된 <Debut(데뷔)> 음반(Sony Classical)을 통해서였다.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최고의 반주자인 이타마르 골란(Itamar Golan)과 함께 한 라이브 리사이틀 녹음을 듣고 당시 필자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랐는데, 첫째는 필자가 생각하는 일본인의 스테레오 타입 -정교하고 깨끗하지만 무언가 열정이 부족한- 에서 벗어난 에너지 넘치는 연주라는 점이었고, 둘째는, 사후 보정이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웬만한 스튜디오 녹음을 상회하는 탁월한 연주력과 높은 완성도의 연주였다는 점이다. 때문에 필자는 당시 약관(弱冠)의 젊은이가 2009년, 꿈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이 되었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그럴만한’ 연주자였기 때문이다.
다이신 카시모토는 학창 시절, 당시 독일 뤼벡 음대 교수였던 자카르 브론(Zakhar Bron)을 사사하며 주니어 메뉴인, 쾰른, 크라이슬러, 롱-티보 콩쿠르를 석권했고 이후 프라이부르크 음대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이었던 라이너 쿠스마울(Rainer Kussmaul)을 사사한다. 브론의 교수법 아래에 있으며 솔리스트의 입지를 다진 후, 쿠스마울 문하에서 앙상블리스트로서의 시간을 가진 것은 실로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는데, 그 결과 2년이 걸리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습 기간을 불과 6개월로 마치고 단원들의 전폭적 지지를 끌어낸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이날 듀오 리사이틀의 한 축을 지지한 피아니스트 에릭 르 사주(Éric Le Sage, 1964-)는 전형적인 프랑스 피아니즘 연주자다. 포르토, 로베르트 슈만, 그리고 리즈 콩쿠르에 입상하며 세계 음악계에 이름을 알린 르 사주는 특히 슈만 연주에서 탁월함을 드러내는데, 2010년 슈만 탄생 200주년을 맞아 발매한 <슈만 피아노 전집>(Alpha)은 독일 음반 비평가상을 받으며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슈만 연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긴 서론을 뒤로 하고 이날의 리사이틀에 대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쉬움’과 ‘의문’이 남는 연주였다.
아쉬움의 대부분은 ‘소리’에서 기인하는데, 이날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카시모토의 소리는 시종일관 막에 싸인 듯한 답답함을 드러냈다. 공연 당일 영하 10도를 넘나들었던 날씨 탓도 있겠으나 이날 공연에서 카시모토는 매 곡 혹은 매 악장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악기를 조율하는 모습을 보였다. 과르네리 델 제수 1744. ‘드 베리오(de Bériot)’는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시원한 사운드를 드러내지 못했는데, 필자의 자리 탓(1층 D열)인가 싶어 1층 C열에서 감상했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물어 보았으나 역시 비슷한 답을 들었다.
그리고 ‘의문’은 둘의 앙상블에 관한 것인데, 이는 카시모토 쪽보다는 르 사주의 앙상블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다. 보통 연주가 후반으로 갈수록 안정을 찾기 마련인데, (슈만의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르 사주는 인터미션 후에 더 잦은 미스 터치를 드러냈으며 특히 정교한 앙상블리스트의 면모를 선보이며 연주를 이어가는 카시모토의 리드에 반해 많은 경우 예민하게 화답하지 못했고 합을 맞추지 못했으며, 실내악 연주자로서보다는 내 갈 길만 뚜벅뚜벅 가는 외골수의 모습으로 바이올린에 응수했다.
첫 곡은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기악보다는 성악에 가까운 표현력과 끊임없는 노래가 점철된 곡으로, 들리는 것에 비해 절대 녹록지 않은 이 곡을 카시모토는 예의 노련한 운용과 유려한 레가토로 연주해 세계 일류 악단의 리더다운 면모를 드러냈다. 이 곡의 환상적인 순간들, 예컨대 1악장의 제2주제라든지, 2악장의 도입부, 그리고 3악장 최후의 코다 등에서 더욱 다채로운 음색의 변화가 아쉬웠으나 카시모토는 곡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문법’을 잘 알고 있는 연주를 펼쳤다. 르 사주 역시 순간순간 번뜩이는 터치를 들려줬으나 한편으로는 마치 프랑스 레퍼토리를 다루는 듯, 모호한 표정과 페달링으로 이 곡 특유의 독일 가곡적 면모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어진 슈만·브람스·디트리히 공동작곡의 <F.A.E.소나타>는 우리에게는 3악장을 맡아 작곡한 브람스의 스케르초만이 알려져 있어 전(全) 악장을 들을 기회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다.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제프 요아힘을 위해 작곡된 이 작품은 슈만의 제자인 디트리히가 1악장을, 슈만이 2악장과 4악장을, 그리고 브람스가 3악장을 작곡한 작품이다. 곡은 요아힘의 삶의 모토였던 'F.A.E.(자유롭지만 고독하게, Frei Aber Einsam)'를 가지고 만들어졌기에 악장마다 파(F)-라(A)-미(E)가 어떠한 형태로든 변주된다. 전체의 통일성이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기에, 어째서 연주자들이 소나타 전체를 잘 연주하지 않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카시모토는 극적인 1악장과 까다로운 대위법이 얽혀있는 4악장에서 ‘역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탁월한 연주를 펼쳤으며 곡에 대한 고도의 집중력을 드러냈다.
인터미션 후 연주된 두 곡에서 카시모토는 (악기 상태를 끊임없이 체크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더욱 자연스럽고 이완된 연주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첫 곡인 클라라 슈만의 <세 개의 로망스, Op.22>의 짧은 소품적 성격의 소곡들에서 설득력 넘치는 밀고 당기기를 선보이며 오케스트라 악장이기 이전에 솔리스트 카시모토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앞서 언급했듯 르 사주는 카시모토의 연주에 자연스레 밀착해 움직이지 못한 채 겉도는 피아니즘을 드러냈는데, 이러한 면모는 이날의 마지막 곡인 로베르트 슈만의 <바이올린 소나타 2번>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물론 까다로운 스케일이 즐비한 이 곡의 난이도를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나(이 어려움은 바이올린과 피아노 공히 마찬가지다), 리허설 부족 혹은 연습 부족을 의심할 정도로 르 사주의 연주력은 세계 무대의 수준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백미로 꼽는 이 곡의 3악장 ‘Leise, einfach(조용하고 단순하게)’에서 두 연주자는 찬란한 순간을 만들어 내며 곡의 동기로 인용된 코랄 <찬송 받으소서, 예수 그리스도(Gelobet seist du, Jesu Christ)>의 주제와 변주를 담담하지만 신실한 어조로 노래했다.
다이신 카시모토와 에릭 르 사주 (사진제공=인아츠 프로덕션)
몇 차례의 커튼콜 후 카시모토는 로베르트 슈만의 <3개의 로망스 Op.94> 중 두 번째 곡 ‘단순 하고 내적으로(Einfach, innig)’를 연주했다. 사운드는 유려했고 불꽃 같던 솔리스트 카시모토의 모습을 뒤로 한, 악장 카시모토의 정제된 모습은 곡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지만, 이날의 연주는 여러모로 아쉬운 연주일 수밖에 없었다.
38kdd@hanmail.net 바이올리니스트.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KCO) 단원이자 한양대 겸임교수. 월간 <스트라드>에 음악 칼럼니스트로 20년 이상 기고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