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김수인 무용이론가 = 동시대와 호흡하기 위한 전통예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7월 17일과 19일의 초연에 이어 8월 13일에 재공연된 <일무일악(一舞一樂)>은 과거에 박제되지 않고 살아있는 전통예술을 추구하려는 기획 의도가 돋보이는 공연이었다. 누구나 추구하지만 달성하기는 쉽지 않은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윤중강과 최해리 두 예술감독은 크게 두 가지 접근법을 선택했다. 하나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한 명의 무용가와 한 명의 음악가가 만나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의 색을 살리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전통예술, 특히 전통춤 실행관습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기존 질서를 쇄신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바람이 투영되었다.
지난 7월 초연은 이틀간 총 8팀으로 구성되었으나, 이번 재공연은 일정상 출연이 불가능한 두 팀을 제외하고 6팀으로 꾸려졌다. 공연에 앞서 사회를 맡은 윤중강 예술감독은 이번 6개 작품을 두 개씩 묶어 이야기, 움직임, 판타지라는 주제로 읽어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야기에는 정민근‧김준영의 <무동춘몽>, 박인수‧김소라의 <첫먹승춤>이 해당하고, 움직임에는 김현우‧김보미의 <정재 타령춤>, 윤종현‧이민형의 <군웅신무>가, 판타지에는 배민지‧정선겸의 <나르디>, 박기량‧김동근의 <춤, 만파식적>이 해당하였다. 출연진이 모두 각 분야에서 현재 주목받고 있는 쟁쟁한 예술가들이기 때문에 공연에 대한 기대는 더욱 높았다. ‘전통예술 분야에서 살아남기’라는 어려운 과제를 나름 훌륭하게 풀어내고 있는 예술가들은 동시대의 전통, 보존과 재창조라는 요구에 어떻게 답하였을까?
정민근‧김준영의 <무동춘몽>은 ‘조선의 마지막 무동’ 김천흥의 삶을 모티브로 하여 노인이 된 무동이 자신의 춤 역사를 회상하는 극적 구성을 보여주었다. 거문고와 춤은 번갈아 가며 아이에서부터 노인까지 변화하는 리듬과 에너지를 형상화하였다. 박인수‧김소라의 <첫먹승춤>은 탈춤의 배역인 목중의 춤사위, 황해도 탈춤의 제례성, 농악 가락의 탈춤 장단화 등 여러 키워드를 한꺼번에 시도하였다. 많은 것이 시도되었지만 중점적으로 남은 것은 익숙한 춤사위와 장단의 실험인 듯했다.
김현우‧김보미의 <정재 타령춤>은 정재 중 <무산향>과 <첩승무>에서 춤사위를 발췌하고, 김보미의 해금과 새롭게 창작한 창사를 전달하였다.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이 번갈아 나타나기는 했지만, 중심 주제가 뚜렷하지 않아 그러한 조합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윤종현‧이민형의 <군웅신무>는 경기 지역의 도당굿을 차용하여 춤사위 중 특히 발놀음의 개발과 경쾌한 음율을 선보였다.
배민지‧정선겸의 <나르디>는 동래권번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예기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곱지만 애환 어린 정서가 영남지역의 춤사위와 음률을 통해 전달되었다. 박기량‧김동근의 <춤, 만파식적>은 대나무 피리 만파식적을 모티브로 하여 쥘부채를 든 춤과 퉁소, 대나무 다발과 복개로 세상의 파란을 없애고 평안케 하는 기원과 정취를 전해주었다. 음악과 춤의 긴밀한 상호작용이 작품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약 한 시간 반 동안의 공연을 다 본 후 필자에게 남은 것은 전통의 보존과 재창조를 화해시키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되새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윤중강 예술감독의 설명에 의하면 이는 비아비아(非亞非我), 즉 전통의 아류(亞流)도 아니고, 개인의 아류(我流)도 아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류(流)를 만들어내야 한다. 최해리 공동 예술감독의 말로 표현하면 ‘우리 시대의 전통예술 명작’ 창출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통예술의 본(本)에 정통하면서도 이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동시에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가져야 한다. 한데 이날 무대에 오른 작품들은 시종일관 완벽하게 균형을 유지했다기보다는 어느 순간에는 좀더 아류(亞流)의 쪽으로, 다른 순간에는 좀더 아류(我流)의 쪽으로 기우는 모습들이 관찰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더해갔다. 전통의 보존과 재창조는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함께할 수 없는 것일까?
남도 아니고 나도 아닌 그 애매한 지점을 어떻게 뽑아낼 수 있을까? 이번 공연 기획은 이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공한다. 일무일악(一舞一樂), 바로 무용가와 음악가의 상호성이다.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 개념이 이를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간주관성은 현상학 등 서양철학에서 나온 용어지만, 사실 공동체적 자아를 중시하는 동양사상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념이다. 우리나라 전통예술이 악가무 일체로 발전되어 온 것도 비슷하게 생각될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선명하게 구별된 개체가 아니라 관계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공연의 작품들은 ‘안무자’나 ‘작곡가’라는 명칭을 통해 사적 소유를 주장하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다. 씨실과 날실을 엮듯 나의 장단과 너의 춤사위를 엮고,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을 엮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낼 때 나와 우리의 경계를 지우는 신묘한 지점을 뽑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야심차고 심도있는 기획에도 불구하고 이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전통예술이 '전통'이라는 이름에 갇히기 전에 당대 예술이었을 때와는 다른 사회적 조건에서 이를 실천하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문제들이 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는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그런 문제들을 자아낸다.
첫째는 효율성이다. 빨리빨리와 시장가치가 미덕인 사회에서 간주관성을 진득이 발전시킬 시간을 낼 수 있을까? 너의 소리와 나의 움직임을 하나로 녹여낼 만큼 공유된 상호인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일적월루(日積月累)하여 친히 몸으로 배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재공연은 출연자들이 다시 한번 함께할 시간을 벌었다는 점에서 유익했다고 느껴지지만, 여전히 제한된 시간 안에 성과를 내야 하는 구조 속에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이 작품들이 흐름(流)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흐름, 곧 류(流)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현상이다. 이 작품들이 류가 되기 위해서는 단발성 공연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능하면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도 연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과연 이 작품들이 류가 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지금 당장이 아닌, 시간이 흐른 뒤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무일악>은 전통예술이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기 위해 모색해야 할 시도들에 대해 나름의 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니까 문화예술은 아카이브 자료가 아니라 수행이자 과정인 레퍼토리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특히 전통춤 분야가 스승의 춤을 그대로 따라 추는 모방적 전수 방법에 크게 의지해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일무일악>의 시도는 문화유산에 대한 변화된 패러다임을 반영한다. 이런 새로움 때문에 공연 참여자들이 어떤 도전과 기쁨을 발견했는지 궁금하다.
한편으로는 기존에 익숙한 공연이나 창작 방식이 아닌 낯선 방식으로 작업해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으리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춤을 배울 때는 개인의 표현을 극히 억제하고 배운 대로만 추라고 하면서 무대에서는 자신의 표현을 하라고 하지만, 동시에 그랬다가는 그 춤이 아니라고 지적받는 혼란에 처하게 되는 전통춤 학습자들에게 하나의 숨통을 틔워주는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문화유산의 변화된 패러다임을 실천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전통예술의 새로운 지향점을 모색하는 <일무일악>의 기획이 지속되고 더욱 발전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