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들렌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 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마르셀 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더프리뷰=서울] 선나림 칼럼니스트 =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주인공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데, 오감의 자극을 통해 기억을 일깨워 주는 '프루스트 효과'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4,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은 집필에만 14년이 걸렸는데, 물질적이고 심리적인 현실을 고스란히 형상화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더러 논리에 맞지 않는 문장의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길이가 슈베르트 교향곡 <The Great> 만큼이나 길기로 유명하다.
'프루스트 효과'를 부른 세기말의 감성이 따뜻한 연말을 열어주고 있다. 2023년 12월 16일부터 2024년 3월 31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미셸 들라크루아, 파리의 벨 에포크展>은 90세의 작가가 마차를 타고 1930년대 파리를 여덟 개의 장으로 안내한다.
'벨 에포크'는 프랑스어 원어 그대로 '아름다운 시절'을 의미하는데 이는 당대의 사람들이 스스로 이 시기를 부른 표현은 아니며 훗날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란 끔찍한 불행을 지나 아름다운 시절을 잃어버렸음을 통감하며 지칭하게 되었다. 연말의 전시 중 '벨 에포크展'이 집중된 이유는 전시 포스터의 '물랭 루주'가 내포하는 벨 에포크의 어두운 이면이 아닌,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떠올리는 아름다운 설경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그의 작품 <포르트 데 릴라 역(Porte des Lilas)>에서는 '새로운 예술'이란 의미로 근대화 열풍을 이끈 사조 '아르 누보'(Art nouveau)의 대표적 양식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화의 대표적 이미지로 인식되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저는 과거의 파리를
다시 재현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 그림은 과거에 대한 사진이나
문서가 아닙니다.
인상에 대한 기록들이지요,
'인상주의자들'처럼,
또 모네의 <인상, 해돋이>처럼,
그것은 파리에 대한 인상입니다."
-미셀 들라크루아
이번 전시 포스터를 처음 보았을 때,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를 BGM으로 풍차 뒤에서 '벨 에포크'를 떠올리는 인상주의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과 알폰스 무하가 등장할 것 같은 서정을 강하게 느꼈다. 드뷔시 음악과 인상주의 회화의 공통점은 모호성으로 요약된다.
"시원한 바람의 일진,
여름의 쾌락이 전나무 숲에서 일어,
거의 들릴까 말까 하게,
애무하는 듯한 굽이로, 변덕스러운 소요로,
숲의 가벼운 소야곡을 시작하고 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산업혁명 이후 19세기 말은 계속되는 경기침체 가운데 노동자들의 시위와 무정부주의자들의 유혈 사태들로 파리 역시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민중의 참된 냄새를 지닌 보통 사람들에 관한 최초의 소설'이라고 쓴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과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레 미제라블>에서 우리는 시대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레 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로 우리나라에서는 '장발장'으로 소개되었다.
도시의 산업화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도시 환경을 변화시켰는데, 특히 스모그로 인한 피해가 매우 컸다. 자본과 인프라가 모두 도시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로 인해 폭발적인 인구팽창이 일어났으며 넘쳐나는 상품의 시대임에도 정작 일을 하는 노동자들은 빈곤에 시달렸다. 자본가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두려워했고 막다른 지경에 이른 노동자들은 급진적인 정치 행동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참담한 이면이 공존하는 가운데서도 훗날 벨 에포크, 즉 '아름다운 시대' 라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창조성의 근간이 되어 준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과 통념을 깨는 세기말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절망과 허무의 역설'이라는 세기말의 감성은 현시대까지 강한 긍정의 아이콘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시대가 화려하면 할수록 그 이면에는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암울한 현실을 잊으려 퇴폐한 생활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암울한 현실을 잊기 위해 자극적인 감정의 쾌락을 추구하다 오히려 더 큰 우울에 빠져버리는가 하면, 동시에 매우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특징을 지닌 예술에 매혹 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들이 집착하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 바로 '데카당스'(decadence)이다. 데카당스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전파된 퇴폐적인 경향 또는 예술운동을 가리키는 용어로, 영국에서는 오스카 와일드를 중심으로 한 '세기말 문학'으로 계승된다. 미술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가, 건축에서는 유겐트 스틸 건축의 걸작을 남긴 오토, 클래식 음악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2세, 요하네스 브람스,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이 유명하다.
"절망과 맞서는 것은 행복에 대한 의지이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미셸 들라크루아의 잃어버린 시간을 보고 있노라면 행복해지는 기분이 든다. 팬데믹을 먼저 겪은 카뮈의 말처럼 우리를 암흑 속에서 구출해 주는 것은, 암흑의 이면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저마다의 '행복에 대한 의지'가 아닐까?
팬데믹에서 벗어난 엔데믹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과 속수무책의 전쟁과 경기침체가 공존하는 또 다른 세기말의 느낌이다. 미셸 들라크루아의 마들렌이 떠올려 주는 벨 에포크의 메시지는 이 시절을 잘 지나가게 도와주는 지혜로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겨울 깊은 날, 90세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세상이 마냥 산타의 선물 같았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벨 에포크'를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시절을 '잃어버린 시간'이라 부를지, '바로 지금'이라고 부를지 스스로에게 묻는 뜻깊은 시간 여행에 당신을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