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Alvin Ailey American Dance Theater
[공연리뷰] Alvin Ailey American Dance Theater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4.06.22 11: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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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히 꺼지지 않는 춤의 전설

[더프리뷰=뉴욕] 하영신 무용평론가 = 뉴욕 아방가르드 예술 역사의 주요 거점이었던 브루클린 아카데미 오브 뮤직(Brooklyn Academy of Music, BAM: 1983년부터 매해 가을 BAM‘Next Wave Festival’을 통해 전위적인 춤·연극·음악·오페라 등을 선보여왔다. 이 무대를 통해 피나 바우쉬(Pina Bausch),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등 공연예술계의 선구적이고 방점적인 이름들이 세계적 명망을 얻기 시작했다. 다만 2019년부터 ‘Next Wave Festival’ 자체는 축소 진행되고 있다.)2024년 시즌의 일환으로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Alvin Ailey American Dance Theater, AAADT)의 무대를 마련했다. 64일부터 9일까지 펼쳐진 AAADT의 공연은 동시대 춤으로 엮은 ‘Contemporary Visions’와 무용단 레퍼토리 유산으로 엮은 ‘All Ailey’ 두 편의 프로그램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2023-2024 시즌 포스터. photo by Dario Calmese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2023-2024 시즌 포스터. photo by Dario Calmese

어느 계절에 뉴욕에 오든 언제고 AAADT의 공연은 있다. 나는 링컨센터(Lincoln Center)에서, 뉴욕시티센터(New York City Center)에서, 조이스씨어터(Joyce Theater)에서, 그들의 창립 60주년 기념공연(2018)을 포함한 정기공연들과 그들의 두 번째 무용단인 Ailey II의 공연을 보아왔다. 항시 무용단 레퍼토리 프로그램의 마지막을 장식하곤 하는 단체의 대표적 유산 <Revelations>(1960)는 공연기간 중 어느 하루 링컨센터 분수대 옆 가설무대에서 혹은 브루클린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단체의 오래된 무용수들 또는 은퇴한 무용수들에 의해 대중의 몸에 심어지기도 한다. 단지 현장을 참관할 생각으로 갔다가 특유의 그루브(groove)에 겨워져서는 사진찍기를 관두고 춤을 추다 온 기억도 있다.

당시 나는 소위 예술적’(엄밀히 말하자면 예술이기를 지향했으나 예술적 성취에는 딱히 모자라고 그러느라 진정성도 놓쳐 난해하고 애매해져버린)인 춤들에 지쳐 있었고, 춤 말고 나를 홀려줄 무언가를 기도하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날, 인종·국적·나이·성별 모든 차이를 불문한 사람들과 섞여 몸으로써 공유했던 그 춤은 치유의 능력을 발휘했다. 몸을 관통하는 춤(관람)의 체험은 사랑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경험임을 새삼 확인한 나는 또, 그로부터 꽤 오래 춤과 동반하여 살고 있다. “춤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춤이 사람들로부터 왔고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다시 되돌려져야 한다고 믿는다. Dance is for everybody. I believe dance came from the people and it should always be delivered back to the people.앨빈 에일리가 남긴 이 말은 그날 이후 나에게도 금언이 되었다.

앨빈 에일리 사후(그는 1989년에 영면하였다) 숱한 세월이 흘렀으나 단체는 여전히 그의 금언을 섬긴다. 2005년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신축한 조앤 웨일 댄스센터(Joan Weill Dance Center)에는 AAADT를 비롯하여 Ailey II 무용단(1974년 창단, 창단 당시 명칭은 Alvin Ailey Repertory Ensemble)The Ailey School(1969년 설립) 그리고 Ailey Extension Ailey's Arts In Education and Community Programs(AIE) 등 산하 부속기관이 상주한다. 스튜디오·공연장·도서관·물리치료실이 결합한 공동체 공간에서 학교와 단계별 무용단은 앨빈 에일리의 유작들을 존속시키고 후예들의 신작들을 발생시키고 있다. 1958년 설립 이래 AAADT의 레퍼토리로 축적된 작품군은 90명 안무가들의 235편에 달한다.

The Joan Weill Center for Dance © Archphoto
The Joan Weill Center for Dance © Archphoto
창단자 Alvin Ailey와 에일리 사후 단체를 이끌어온 예술감독 Judith Jamison. photo by Jack Mitchell. © Alvin Ailey Dance Foundation, Inc. and Smithsonian Institution
창단자 Alvin Ailey와 에일리 사후 단체를 이끌어온 예술감독 Judith Jamison. photo by Jack Mitchell. © Alvin Ailey Dance Foundation, Inc. and Smithsonian Institution

삶에 밀착된 춤, 앨빈 에일리의 유산들

유기체적 춤의 기관으로서 AAADT와 그 산하 공동체는 삶과 박리된 예술작품만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앤 웨일 댄스센터는 나의 거처 가까이에 있는데 통유리 외관으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스튜디오들에서는 밤늦게까지 갖가지 종류, 모든 단계의 춤들이 추어지고 있다. 소속 단원들과 초청 마스터들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발레, 모던댄스, 컨템퍼러리댄스, 스트리트댄스 등을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 Ailey Extension의 현장이다. 지역과 병원이나 교도소 등 춤에의 접근성이 취약한 장소들을 방문하여 마스터 클래스와 강의를 시연하는 AIE의 활동 역시 춤으로써 공동체를 구현하고자 했던 앨빈 에일리의 소신을 실천하고 있다.

세월을 거슬러 꾸준히 연행되는 그의 작품 목록들, 특히 오늘의 ‘All Ailey’의 작품들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영위하는(영위하기를 바라는) 공동체적 삶에 긴밀하고자 하였던 그의 예술적 지향을 확인시켜 준다.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삶 속에 실존했던 사람들, 실질적인 사건들로부터 발현된다. 클래식발레가 낭만주의 문학과 표제음악을, 미국 모던댄스가 신화의 세계를 경유하였던 것과는 달리 그는 자신과 동반했던 사람들의 삶 속으로 직진했다.

첫 번째로 연행되었던 <Memoria>(1979)는 앨빈 에일리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무용가 조이스 트라이슬러(Joyce Trisler)를 기린 작품. 안타깝게도 요절한 그녀의 인생은 재즈 뮤지션 키스 자렛(Keith Jarrett)의 'Runes'와 'Solara March'에 실려 압축적으로 재생된다. 다운스테이지 정 가운데에서 조이스는 종종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뻗고, 침착하고 굳건한 아라베스크(arabesque: 한 다리로 서서 다른 다리를 등 뒤로 한껏 뻗어 들어올리는 발레 동작, 양 팔 포지션에 따라 네 가지로 세분된다)로써 자신을 확장하는 춤을 출발시킨다.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Memoria’ photo by Paul Kolnik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Memoria’ photo by Paul Kolnik

작품은 두 명의 남자 무용수 혹은 여섯 명의 앙상블 그리고 종국의 군무진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관계의 시전으로 확장되는데, 두 남자 무용수에 의해 들려지거나 앙상블이나 군무진에 의해 둘러싸여지거나 그녀는 시종 열렬하고 절실했다. 설령 그 모든 관계들이 단절된 공백이 주어져도 그녀는 춤을 멈추는 법 없이 홀로 팡셰(panche: 아라베스크 자세에서 한쪽 팔과 상체는 아래로 내리고 반대로 들어올린 다리는 상체가 기울어진 각도만큼 하늘로 뻗어올리는 동작. 보통 여성 무용수가 한 손으로 남성 무용수의 손을 지지하여 수행한다)를 시행하거나 혹은 치마 양끝을 펼쳐 회전함으로써 꺾이지 않는 자신의 의지를 펼쳐보였다. 그녀는 나이고 그리고 당신이다.

<A Song For You>(1972, <Love Songs>의 발췌작) 역시 실존의 인물로부터 발현한다. 앨빈 에일리는 이 작품을 자신의 댄서 더들리 윌리엄스(Dudley Williams)를 위해 안무했다고 한다. 막이 오르면 다운스테이지 하수 모퉁이에 한 남자가 서 있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톱 조명이 그린 원 안에 그가 서있고 그를 기점으로 길쭉한 부등호로 밝혀진 바닥의 문양, 길어진 그림자가 인생을 은유한다. “But we’re alone now” “Cause we’re alone now” “I love you for my life” “You’re a friend of mine” 등 역시 인생 모든 관계의 흐름을 축약하는 가사와 블루지한 감성의 선율(레온 러셀(Leon Russell)의 동명곡, 여러 버전 중 도니 해서웨이(Donny Hathaway)의 노래)에 춤이 실린다. 춤은 때로 강인하고 때로 섬세하게 세월의 흐름을 훑는다. 그는 나이고 역시 당신이다.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A Song For You’ photo by Paul Kolnik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A Song For You’ photo by Paul Kolnik

이어지는 <Cry>(1971)는 익히 알려진 바 앨빈 에일리가 모친의 생일선물로 만든, “모든 곳에 있는 흑인 여성들에게, 특히 우리의 어머니들을 위해 to all black women everywhere, especially our mothers."란 축사가 함께 남겨진 헌정작이다. 개시되면 몸에 밀착되는 하얀색 긴소매 상의와 아랫단이 프릴로 장식되어 있는 큰 폭의 흰색 플레어스커트 차림의 여성이 서 있다. 스카프라기엔 길고 무거운, 역시 하얀색의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다. 과거의, 흑인의, 특히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엄중한 삶. 양손을 펼쳐 얼굴을 드러내고 그 위엄을 펼침으로써 그 삶이 압축적 해제(解題)를 시작한다.

17여 분의 여정은 앨리스 콜트레인(Alice Coltrane)의 재즈 연주곡 'Something About John Coltrane'에 실려 출발한다. 코드와 변주아직은 가볍고 규칙적인 리듬의 전개를 타고 그녀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무대의 상하수를 대각선으로 나아와 세상의 중앙에 선다. 어떤 힘에 의해 끌려나오는 것처럼도 보이고 스스로 밀고 나아오는 것처럼도 보인다. 모든 삶에서 얽히고설키며 구동되는 자발성과 타율성. 역시 그녀는 나이고 그리고 당신이다.

그녀가 손에 쥔 흰색의 긴 천은 언뜻 우리 살풀이춤의 긴 수건을 연상시킨다. 흰색의 복장과 흰색의 수건, 어떤 영성(靈性). 생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발현하는 존재론적 춤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이미지라니, 흥미롭다. 우리 살풀이의 수건이 추는 이의 몸에서 분리되는 일 없이 감겨지고 펼쳐지며 존재의 내적 운동을 외화하는 것과는 달리 에일리의 천은 타자적으로 기능한다. 때로는 속박의 밧줄로, 때로는 바닥의 걸레, 때로는 고귀한 이의 머리에 둘러지는 스카프. 어느 상황에 놓여지든 에일리의 어머니, 그가 어머니로 섬기는 세상의 모든 여성들은 삶의 모든 장면에 대하여 능동적이다. 주저하는 바 없이 접고 펼치고 문지르며 감은 채 질주한다. 때로는 그 수건을 바닥에 펼치고 떨어져나와 몸을 한껏 수축시키고 이완시키고 뻗고 회전해 보인다.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Cry’ photo by Paul Kolnik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Cry’ photo by Paul Kolnik

가볍던 음악의 리듬과 음조가 어느덧 금관악기의 파열하는 질주로 치달으면 무용수의 몸짓 역시 가열차진다. 양손 끄트머리를 흔들고 골반을 좌우로 스윙하며 존재의 원천성을 확인하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아라베스크나 데블로페(développé: 한쪽 다리를 접은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들어올리며 펼쳐보이는 동작을 일컫는 발레용어)와 회전으로써 세계를 공략하기도 하고 또 그러다가도 중간중간 의기양양한 포즈와 단호한 표정을 취함으로써 스스로를 확신하고 세상에 각인시킨다.

세상과의 격정이 잦아들면 'Been On A Train', 북풍의 밝은 빛을 좇아 여행한다는, 인생을 은유한 내용의 담담한 여성 보컬(Laura Nyro) 노래가 흐르고 이에 감응하여 춤은 더욱이 깊숙한 내면의 사태를 시연한다. 깊숙한 굴신으로써 자신의 심부를 끄집어내는, 무용수의 사지와 휘날리는 스커트는 마침내 우리 살풀이 수건과 만난다. 온전히 내재적인 중력에 기인하는 존재의 운동. 그러나 서양의, 에일리의, 그리고 에일리 무용수의 몸짓은 현실을 적시한다. 우리네 춤이 열반과 승화의 경지에 있다면 에일리의 춤은 당장의 고통, 당장의 열망을 현시한다. 한껏 소진하는 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곡 'Right On Be Free'(The Voices of East Harlem)의 흔쾌한 합창, 아마도 가스펠을 같이 부르곤 하는 공동체 안에서 그녀는 자유롭게 자신을 펼치고 교류한다. 연속하는 회전과 역회전, 양손으로 펼쳐지고 접히고 펼쳐지는 치맛단, 막춤에 가까운 경련, 춤은 발레로부터 참조되던 춤의 구문(舊文)을 넘어서 해방적 국면의 몸짓으로 펼쳐진다. 그녀는 나이고 당신이다. 당신이 여성이건 남성이건, 어머니건 아버지건 혹은 여전히 자식이건 간에 스스로의 삶에 대하여 열렬하다면, 그녀는 당신이다. 누구에게나 투사 가능한 이 존재론적 경지의 춤은 1971년 주디스 제이미슨(Judith Jamison: 그녀는 앨빈 에일리의 뒤를 이어 1989년부터 2011년까지 AAADT의 예술감독직을 수행했다)의 초연 이래 무용단의 열여덟 무용수에 의해 전수되어 왔다.

‘All Ailey’ 프로그램의 마지막 작품이자 전 공연 일정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작품 <Revelations>(1960)는 앨빈 에일리의 대표작이자 단체의 대표 레퍼토리. 내가 본 공연들에서는 항상 대미를 장식했는데, 36여 분은 과히 총괄적이다. 가족, 친구, 동료, 앞서의 긴밀했던 모든 관계들은 이제 하나의 온전한 공동체를 이룬다. 가스펠 풍 노래 'I’ve Been ‘Buked'를 따르는 군무로부터 출발하여 작품은 아프리칸-아메리칸들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펼쳐낸다. 흙빛 의상을 입고 역삼각형으로 군집한 무용수들은 고개와 상체를 수그리고 양팔을 벌려 공동체의 숙명이었던 고통과 절망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깊은 두 다리의 굴신으로 대지를 굳건히 딛고 두 손을 한껏 하늘을 향해 뻗어 구원을 요청한다.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Revelations’ photo by Paul Kolnik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Revelations’ photo by Paul Kolnik

고난, 신앙 혹은 신념, 그리고 종국엔 성취하고야마는 해방적 국면으로까지 트리오와 듀엣과 군무와 솔로 등의 구성을 지닌 작품은 철저히 재현적이다. 선명힌 노래 가사의 번안으로서의 춤, 고난의 노래에는 고통이 창발하고 축원의 합창에는 환희가 속출한다. 각 노래의 연결로써 진행되는 서사의 이해도 어려울 것이 전혀 없다. 내용적인 측면으로만 파악하자면 어쩌면 평이한 스토리. 상징도 일차원적이고 그 표현은 더욱이 즉물적이다. 역경을 상징하는 강물은 무용수들이 펼치는 흰 천, 푸른 천으로 제시되고 그에 면하여 춤의 동작구들은 헤엄의 속성을 닮았다. 그런데 왜 이 오래된 작품은 매번 볼 때마다 정동(情動, affect)의 그 전이적 역능을 갱신하는 것일까?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Revelations’ photo by Paul Kolnik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Revelations’ photo by Paul Kolnik

아마도 공동체로서의 어떤 필사적인 입장이 대물림되는 것이리라. 하늘을 향해 구원을 갈구하는 양팔, 지상의 물살을 가르는 양팔에는 전신의 집념이 담겼다. 에너지 가동률이 현저히 높고 동작의 반경이 유독이 넓고 깊은 특유의 그루브는 역사가 충전된 몸에서 나온다. 고난과 그를 견디는 인내는 종종 알 라 스공드 데블로페(a la seconde développé: 몸을 정면으로 하고 한 다리로 서서 다른 한 다리를 머리 가까이 들어올리는 발레동작) 동작으로 표현되곤 하는데 안 그래도 온 몸적 전념과 응집을 요하는 그 동작은 발레로부터 온 구문이건만 여느 춤의 장면들과는 달리 한계 지점에서 가능한 최고도의 성형(成形)을 유지하고 몹시 느리게 다른 동작으로 이행되곤 한다. 고난도 그 감내도 아주 짙고 깊숙한 사태로 전이된다. 앨빈 에일리는 공동체의 역사를 안무했다. 그 역사를 춤춤으로써 혹은 그 춤의 정동적 역능에 감화되는 관람의 체험으로써 그들 공동체에 관한 역사와 기억은 다시 짙어진다.

끊임없이 길어지는 에일리의 그림자

발레 그리고 미국 모던댄스, 역사적인 예술춤의 어떤 모드들이 재인되면서도 그럼에도 확연한 아프리칸-아메리칸들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일리의 춤으로 두드러지고야 마는 AAADT의 춤. 나는 언젠가 이들이 웨인 맥그리거(Wayne McGregor)가 로열 발레단(The Royal Ballet)을 위해 안무한 <Chroma>를 공연하는 것을 본 적 있다. 일원론적인 몸들의 익명적 드라마로서 컨템퍼러리발레 레퍼토리의 방점이 된 이 작품을 세계 유수 단체들이 공연해오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AAADT의 연행은 단연코 특출했다. AAADT의 충혈적 뉘앙스로 충천된 웨인 맥그리거의 무보.

‘Contemporary Visions’ 프로그램의 세 작품 역시 그러했다. ‘총기폭력 피해자에 대한 헌사로 설명되지만 남겨졌고 지속되는 삶들에 대한 위무로도 해석되는 작품 <Ode>(2019)는 이 단체 출신 소속 안무가 자마르 로버츠(Jamar Roberts)의 작품. 삶에 대한 위협과 그러므로 더욱이 열렬해지는 생에 대한 감각은 동시대 춤들의 공통적인 주제이지만 AAADT 전통으로부터 그 축출과 현전은 더욱 생생하다.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소속 안무가 자마르 로버츠의 ‘Ode’ photo by Paul Kolnik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 소속 안무가 자마르 로버츠의 ‘Ode’ photo by Paul Kolnik

다운스테이지 전면에 경사진 각도로 비스듬히 걸린 걸개그림의 바탕에는 검음, 즉 죽음이 깔려있다. 그러나 그 위에는 아프리카 전통 의복과 장신구가 지닌 색처럼 작열하는 갖가지 색상의 꽃송이와 이파리들이 만발하고 있다. 재즈 피아니스트 돈 풀런(Don Pullen)의 연주곡 'Suite(Sweet) Malcolm(Part 1 Memories and Gunshots)'에서 창발하는 음들은 걸개그림의 꽃과 이파리들의 운동을 구동시킨다. 선율과 불협, 정박과 당김박 사이를 종횡하는 음들은 공포와 불안과 위로의 뒤범벅인 생의 순간 낱낱들을 포착하고, 그에 흰 바탕에 녹색과 적색으로 그라데이션된 무릎 기장 플레어 원피스를 입고 한 송이 꽃, 한 닢의 잎사귀가 된 여섯 명의 무용수는 따로 또 같이 그 모든 상황과 그에 면한 자신의 생명력을 한껏 발휘해낸다.

이르지 킬리언(Jiří Kylián)과 더불어 네덜란드 단스 테아터(Nederlands Dans Theater, NDT)의 상주안무가로서 단체의 모던발레 시절을 이끌었던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안무가 한스 판 마넌(Hans van Manen)<Solo>(1997)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솔로 연주곡 <Partita for Solo Violin No. 1 in B minor>에 맞춘 남성 무용수 세 명의 독무가 일련하는 소품. 달라붙는 흰색 타이즈 차림의 무용수들은 마넨으로부터 킬리언으로 이어지는 시절 NDT의 특징이었던 정교하고 날카로운 기교를 유감없는 박력으로 소화해내었다.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가 연행한 한스 판 마넨의 ‘Solo’ photo by Daniel Azoulay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가 연행한 한스 판 마넌의 ‘Solo’ photo by Daniel Azoulay

단체의 동시대성을 시전하는 ‘Contemporary Visions’ 프로그램의 말미를 장식한 알론조 킹(Alonzo King)<Following the Subtle Current Upstream>(2000)은 솔직히 필자에게는 예상 밖의 선정으로 느껴졌었다. 샌프란시스코를 기반으로 알론조 킹 라인 발레단(Alonzo King LINES Ballet, 1982년 창단)을 이끌며 세계 무용계 내 블랙 파워를 견인하고 있는 알론조 킹의 작품들은 단체명이 함의하는 바대로 발레 고전의 선형(線形, lineal)적 특질과 네오클래시시즘 발레의 추상성을 지니고 있는 편으로, 상대적으로 정형적인 발레단들에 의해 애호되기 때문이다(뉴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작년 가을 아메리칸 발레씨어터(American Ballet Theatre, ABT)가 알론조의 작품 <Single Eye>를 초연했었다). 혹여 AAADT 특유의 충혈적인 몸성을 제한하지 않을까라는 기우가 있었다.

기우는 기우였다. 단음(單音)의 지속과 전통악기의 영성과 질주하는 타악, 그리고 항진된 존재의 목소리, 인도 작곡가 자키르 후세인(Zakir Hussain)의 연주곡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가수 미리엄 마케바(Miriam Makeba)의 절창(絶唱)에 결합하는 춤. 테크닉은 몸의 자율성을 확보하나니, 테크닉 최대치로서의 알론조의 안무는 AAADT의 몸들을 통과해 몸성의 역학으로 구현되었다.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가 연행한 알론조 킹의 ‘Following the Subtle Current Upstream’ photo by Paul Kolnik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가 연행한 알론조 킹의 ‘Following the Subtle Current Upstream’ photo by Paul Kolnik

AAADT는 오래 전부터 아프리칸-아메리칸 공동체의 유산을 넘어 뉴욕시, 미국의 자산이었다. 오는 730일부터 83일까지 링컨센터에서 열릴 야외축제 BAAND에서 AAADTABT, 뉴욕 시티 발레단(New York City Ballet), 발레 히스패니코(Ballet Hispánico), 할렘 댄스씨어터(Dance Theatre of Harlem)와 더불어 무용 분야를 담당한다. 미국 컨템퍼러리미술계를 책임지고 있는 휘트니뮤지엄(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은 오는 925일부터 내년 29일까지 5층 갤러리 통째를 앨빈 에일리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대규모 전시 <Edges of Ailey>에 할애할 계획이다. 공연 프로그램은 물론 멀티미디어 전시, 학술연구 등 입지전적인 예술가를 조망할 만반의 큐레이팅이 준비 중이라고 한다. 프랑스 파리도 올 1018일에서 26일까지의 AAADT 공연을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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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lly 2024-06-23 21:02:49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