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서울] 김혜라 춤비평가 = 서울시발레단이 비상하기 위해 야심 찬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 첫 발돋움은 재미무용가 주재만의 감각적인 미장센으로 장식한 <한여름밤의 꿈>(8월 23-25일)으로 컨템퍼러리 발레단의 정체성을 과시하려 작정한 듯하다. 국립발레단과 광주시립발레단에 이어 48년만에 클래식 발레가 아닌 동시대 감성을 담은 최초의 공공 컨템퍼러리 발레단 창단이라는 시의적절한 명분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기엔 충분했다. 여간해서 채우기 어려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객석이 마지막 날까지 가득 찼고, 이에 화답하듯 영원한 예술의 소재이자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사랑’으로 농도 짙은 ‘한여름밤의 꿈’을 선사했다.
주재만은 셰익스피어의 희곡과는 다르게 사랑에만 초점을 맞춰 몸의 층위로만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을 충만하고 극적으로 안무했다. 2막 7장으로 구성된 작품은 “우리가 원하는 사랑은 무엇인지?” 화두를 던지며 사랑의 욕망, 자유, 상처, 공허, 분노, 환상, 희망 등을 옴니버스 식으로 나열하고, 이성과 동성의 사랑도 포용하며 자신을 포함한 사랑만이 미래를 살아갈 힘(묘약)임을 선연하게 제시한다. 주재만(현재 뉴욕 컴플렉션즈 컨템퍼러리 발레단의 부예술감독이며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 있는 포인트파크대학 발레교수이다)은 광주에서 발레를 시작해 대학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뒤 도미하여 미국의 다양한 컨템퍼러리 스타일을 섭렵한, 한국 발레계의 미래를 견인할 준비된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전작 <Vita>(2022)와 <Divine>(2023)을 통해 컨템퍼러리 발레가 지향하는 선명한 주제의식을 주재만 식의 감성과 관점으로 극장 무대에 최적화된 씬(scene)으로 증명해냈다.
창단 첫 작품을 주재만에게 의뢰한 것은 적절했고 석 달 남짓도 안 되는 기간에 대작을 만들어 낸 성과 자체는 대단하다. 외국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과 과정이지만 한국(인)이라 가능했지 싶다. 따라서 여기에 숨겨진 많은 문제가 드러났으나 잠시 미뤄두자. 먼저 작품을 살펴보면 여전히 사적인 섬세한 사랑의 감정을 정감과 객관의 선을 지키며 유려하게 묘사하는 춤 표현은 탁월했다. 솔로와 듀엣, 3인무, 군무를 적절하게 배치하며 시성이 짙은 꿈속 같은 무드와 상처와 그늘진 현실의 관계를 내밀하게 조망했다. 춤 정서를 구체적으로 실현시켜주는 무대 장치는 사랑의 감정을 교류하게 하는 내적 공간이 되기도 하고, 환상과 현실 공간이자 전 우주적 공간으로 변모하며 추상의 세계를 받쳐주었다.
원작의 멘델스존 곡을 사용하지 않고 슈만의 성악곡으로 다양한 사실적 감정선을 강화시켰고, 필립 다니엘의 작곡과 라이브 음악연주로 동명의 <한여름 밤의 꿈>과는 차별되는 생동감을 선사했다. 특히 거대한 빗줄기와 고요한 바람과 나뭇잎이 흔들리는 장면, 밤하늘과 지구를 배경으로 한 영상과 조명의 무드로 대극장만의 스펙터클을 충족시켰다. 주재만의 세련된 미감이 발휘된 놓칠 수 없는 인상적인 장면도 꽤나 많았다. 무용수들 개개의 얼굴과 몸과 근육을 적나라하게 무대 배경으로 전시한 연출이나 착시를 일으킬 정도로 실제 비를 맞는 것 같이 처절하게 쏟아내는 군무, 계단이 있는 집 안팎에서 갈등을 겪는 남녀가 화해해 가는 과정은 절절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표현한 움직임이나 우주적 질서와 조화를 염원하는 배리에이션(variation) 마지막 장면은 깊은 감동을 주었다. 무용수들이 거꾸로 떨어지는 컬트 무비 같은 영상은 파격적이었고, 싸이키 조명 아래 SF 감성을 조장한 장면도 이질적이라 신선했다. 관객들은 컨템퍼러리 발레가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는 새로운 춤임을 실감했을 것이다.
반면 각기 장면은 훌륭하나 매 장면마다 결이 너무 달라 1부는 전체적으로 산만했다. 사랑의 다른 양태와 이면을 강조하려 했음직하나 전체적인 포용 속에서 다름을 조명해야 하나 무리가 있었다. 특히 라이브 카메라로 무대 위 무용수를 찍는 모습은 전체 맥락에서 어떤 측면을 부각하려 했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주재만의 전작에서는 무대 장치와 오브제가 춤과 균형감 있게 상호작용하며 내용을 각인하게 하는 주요 메소드였으나 이번 공연에서는 과할 만큼 많이 사용되어 오히려 춤이 장치에 압도당한 인상이었다. 춤이 보여야 사람들의 이야기가 빛나지 않겠는가.
기량도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무용수들 각자의 이력이나 기량은 뒤떨어지지 않으나 전체를 모아 놓은 군무는 대학교 학예회보다 못한 수준으로 보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정규단원이 없이 프로젝트성으로 급조한 탓도 있을 테고 현대적 표현에 익숙해지기에는 연습량이 부족해서 인지도 모른다. 이건 주재만의 지도력 문제는 아니고 서울시발레단 내부 실무진의 전문성 결여 탓으로 보인다. 비슷한 기간에 주재만은 광주시립발레단 단원들을 <디바인>에서 개개인의 기량보다 훨씬 훌륭하고 세련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 이끌었으니 말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충원할 인력이 없었다는 이유도 있다. 공연 전 프로그램 변경 안내에는 무용수의 부상으로 조안무가 출연하며, 심지어 한 씬은 삭제했다고 되어 있다. 하여 2부에 붉은 시스루 타이즈를 입고 등장한 조안무 애디슨 엑터(Addison Ector)는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라 상대적으로 다른 무용수들을 납작하게 보이게 했다. 또한 원래 주재만 안무가가 뽑은 무용수가 이유 없이 사라지고 다른 무용수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모름지기 단체라는 것은 무용수들을 충분히 훈련시키고 상황을 조율하고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준비가 부실한 측면이 드러난 것이다. 예술감독과 전문적인 운영진의 부재 속에 더욱 참을 수 없었던 일은 작품 포스터에 등장한 상상력을 가동시키는 장면을 볼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가장 기대했던 맨위 포스터 장면은 마치 브레겐츠 페스티벌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을 상상하게 하고 누가 봐도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라 생각되나 그 어떤 대체되는 장면이나 안내도 없이 삭제되었다. 공연 후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리허설까지 준비를 다 했으나 출연 무용수가 위험해서 못하겠다는 이유로 작품의 핵심 씬이 날라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누가 하며 책임은 누가 지는 것인가. 안무가의 창의력이 집약된 씬이 기관의 결정으로 한 순간에 사라진 이 사건은 관객을 기만한 행위이며 예술가를 존중하지 않은 결정이다. 위험한 장면이라고 판단했으면 미리 다른 장치로 변경하는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감독과 현장 전문가 없이 TF팀으로 단체를 운영할 수 있다는 생각은 무슨 자신감일까? 작품의 퀄리티와 창작자의 생각을 존중하기보단 만일의 사태가 벌어져 단체에 흠집이 날까 전전긍긍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또 하나, 이 작품은 2시간 15분까지 할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기존 전막 발레는 대본의 내용상 기승전결의 구도를 촘촘하게 풀어야 하나 이 작품은 사랑이란 여러 상황을 옴니버스로 제시하기에 굳이 시간의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작품은 장황하게 늘어져 집중력만 떨어지게 했다. 창작자는 예산과 시간이 주어지는 한 모든 것을 하고 싶은 열망이 있다. 이를 조율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지 않겠는가. 현대발레를 지향하면서 전막발레 못지 않은 시간과 규모로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욕망이나 기존 발레의 관습적인 시간과 형태를 고수하는 것은 구태의연하다. 결과적으로 <한여름 밤의 꿈>은 안무자도 충분히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수 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작품이라 하기엔 관객도 만족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컨템퍼러리 발레는 안무가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를 책임지고 조율하는 감독과 운영진, 나아가 극장과 행정가들의 마인드도 열려야 가능하다.
국립발레단과 민간발레단의 그간의 노력으로 클래식 발레 레퍼토리가 확대되었고, 스타 마케팅으로 발레의 성장과 대중화를 이뤘다. 발레 테크닉을 맹신하며 장인정신으로 여기는 매니아 층도 점차 폭넓은 시각이 담긴 현대발레를 수용할 준비가 되고 있다.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만으로는 성장의 한계를 감지한 발레계는 새로운 현대발레단의 출범을 재촉했고 예술감독이 부재한 채로 프로젝트 무용수와 객원 안무가를 기용하며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성급해 보이는 출발을 했다. 어쩌면 국립발레단이 했어야 하는 컨템퍼러리 발레 작업에 대한 등한시에도 모종의 책임이 있다. 사실 한국적 창작발레를 위한 노력은 민간단체에서 꾸준히 숙제처럼 해왔다. 유니버설발레단의 경우, 명작 <심청>과 <춘향>은 차치하더라도 어려운 팬데믹 시기에도 한국적 창작발레를 만드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적인 정서와 음악이 담긴 <코리아 이모션 정>을 최근 발표했다.
서울발레시어터에서 제임스전은 90년대부터 <현존> 시리즈로, 와이즈발레단도 창단 초창기부터 현대발레를 꾸준하게 시도했다. 김길용 감독의 노고와 안목의 결정체가 바로 주재만을 객원안무로 초청해 만든 <비타>이다. 광주시발레단도 작년에 주재만에게 5.18 광주항쟁을 기념하는 작품을 맡겨 <디바인>이란 훌륭한 레퍼토리를 남기게 했다. 그 뿐인가. 국립무용단이나 국립현대무용단도 객원 안무가를 초청해 현대적인 한국춤, 한국적인 현대춤을 만들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발레 관점에서 본다면 가장 많은 예산을 집행하는 국립발레단은 어떤 작품을 남겼는가? 네 번의 연임을 하는 동안 강수진 단장은 독일계 레퍼토리만 가져와 마치 슈투트가르트 자매학교 발레단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편파적이고 기울어진 모습을 보였다. 거의 독일계 거장들의 드라마 작품만을 선보인 것이다. 우리가 해외 경험이 많은 예술감독을 모시고 오는 이유가 선진 시스템 구축과 함께 다양한 양질의 작품을 소개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사정이 어려운 민간발레단들도 하는 일을 국립발레단이 하지 않는 깊은 뜻을 나만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인식이 부족한 것일까? 참으로 궁금하다.
어찌했든 서울시발레단 창단은 무용계에 반가운 일이며 여전히 긍정적인 기대를 하게 한다. 젊은 발레 안무가들의 창작적 열망을 펼칠 장(field)으로 작동할 것이며, 더불어 관객의 선택권을 넓혀주는 역할과 무용수의 안정적인 직업으로도 유용하다. 아직은 신생단체라 질 높은 작품을 해외 유명 단체에서 사오기 쉽지 않겠으나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 담 달에는 한스 판 마넌의 작품을 선보인다. 그렇지만 기왕에 48년이나 기다렸으니 구멍이 보이는 활동을 볼 만큼 급하지는 않다. 먼저 발레단의 청사진을 선명하게 제시할 감독을 선임하고 과시용 작품이 아니라 창작자의 예술성이 보장받고 발현되는 작품을 선보이며 책임감 있는 무용수들을 모아 성장시키는 서울시발레단이 되길 바란다. 우리가 양궁 올림픽에서 얻은 교훈처럼 극장장과 행정진은 비용과 환경만을 지원하되 창작 관련 모든 것을 현장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야 서울시발레단이 마치 누군가의 정치적인 현시욕 때문에 준비도 안 된 채 발족했다는 애먼 억측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