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프라이부르크] 손인영 안무가/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 오슬로의 아이스 핫(ICE HOT)이 막을 내린 뒤 독일로 향했다. 독일 탄츠플랏폼은 2월 21일부터 25일까지 프라이부르크에서 열렸다. 프라이부르크는 인구 20만의 작은 도시로 프라이부르크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다. 대학/극장/성당이 이웃해 있는 중심가는 몇 번만 걸으면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아담하다.
올해 30주년을 맞이한 탄츠플랏폼은 독일 현대무용을 효과적으로 유럽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94년 출범했다.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뮌헨의 무용기획자와 정책전문가들에 의해 시작된 이 행사는 이후 도시를 바꾸며 2년에 한 번씩 열리고 있다.
공식 쇼케이스에는 2021년 9월 초 이후 공연된 작품 550여 편 중 10편이 선정되었고, 이들 작품은 프라이부르크 극장을 중심으로 근처 중소극장과 인근 프랑스령 라인섬에 있는 아레나(Art'Rhena) 극장 등에서 선을 보였다.
공연 외에도 여러 안무가가 진행하는 아침 웜업(Warm-up), 춤과 건강 및 웰빙에 대한 라운드 테이블 토론, 젊은 무용가들의 국제 레지던시를 위한 네트워크, 독일에서 활동하는 유색인종들의 패널 프로그램, 피칭 세션 등 17개의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이 중 몇몇 행사는 독일어로만 진행되어 아쉬웠다.
6명의 심사위원은 다양성과 획기적인 실험성에 초점을 두고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자기만의 색깔을 내는 안무자들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고 했는데, 전체적으로 3-4개는 놀라울 정도로 흥미를 끌었으나 몇몇 작품은 아쉬웠다.
필자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1994년에 탄츠플랏폼을 조직한 사람들의 면면이다. 첫날 오후 3시에 프라이부르크 극장 로비에서 이들 세 분 -넬레 헤르틀링(Nele Hertling), 발터 호인(Walter Heun), 디터 부로흐(Dieter Buroch)- 이 탄츠플랏폼의 출범 배경 등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아쉽게도 독일어여서 이해가 불가했기에 구글링을 해보았다. 세 분 모두 무용을 전공한 분들이 아니었다. 철학, 연극, 문화연구나 기획을 전공하고 축제나 전시회를 조직하거나 네트워크 또는 혁신적인 문화에 대한 여러 프로그램을 전문으로 기획하고 조직하는 분들이었다.
무용가들에 의해 조직되고 구성되는 한국의 무용계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폭 넓은 안목으로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실질적이고 계획적인 무용정책을 펼쳐나가는 것에 한국 무용계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인상적 장면은 개막식이었다. 개막식의 연사들이 시장을 비롯해 모두 정치가들로 춤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세계적 이슈에 대해 예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연설했는데 꽤 긴 시간 자기 생각을 충분히 표명했다. 예술은 사회적, 정치적 이슈를 포함해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은 작품에서도 표현되고 있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다양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10개 작품을 보았을 때 모두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흥미를 끌만했으나 무용작품으로서 질적으로 최고였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리지아 루이스(Ligia Lewis)의 솔로인 <음모/스캔들(A Plot/A Scandal)>은 춤과 연극의 경계를 허무는 작품으로 서사와 이미지를 활용했고, 모리츠 오스트루슈냑(Moritz Ostruschnjak)의 <터미널 비치(Terminal Beach)>는 다양한 춤 양식이 뒤섞이고, 리믹스되고, 되돌아가서 터미널 비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였다.
안나 틸 & 노라 오테(Anna Till & Nora Otte)는 고전 발레를 바탕으로 한 <운동화를 신은 백조의 호수(Schwanensee in Sneakers)>에서 젊은 관객들을 위한 춤 이야기를 재미있게 재연했고, 마리아나 베낭그와 미리암 루카스(Mariana Benengue & Myriam Lucas)는 <라운지(Lounge)>에서 랩댄스를 통해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었다. 튀마이 킬린셀(Tümay Kılınçel)은 <우리 라크 2명(we 2 raqs)>에서 대중적인 벨리댄스를 예술의 반열에 올렸다.
카타리나 젠첸베르거(Katharina Senzenberger)의 <습지(Wetland)>는 축축한 대화를 거쳐 놀이로 전환했으며, 리타 마자(Rita Mazza)의 <리듬의 문제(Matters of Rhythm)>는 빛과 시각적 감동을 선사한다. 특이한 증상/극장 브레멘(Unusual Symptoms/Theater Bremen)과 아드리엔 호드(Adrienn Hód)의 협업 작품으로, 각기 다른 무용수들의 모습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하나가 되는 <하모니아(Harmonia)>는 인간사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흐리스토스 파파도풀로스(Christos Papadopoulos)의 <멜로잉(Mellowing)>은 동작을 미니멀하게 하여 최소한의 차이를 통해 더 명징하게 바라보게 했고, 욜란다 모랄레스(Yolanda Morales)의 <낙하하는 모래의 정원(The Garden of Falling Sands)>은 멕시코의 정서를 바탕으로 탈식민주의적 표현을 통해 고향을 조망했다.
프라이부르크에 도착해서 하루 푹 쉬고, 2월 21일 탄츠플랏폼 사무국으로 향했다. 오래된 건물의 지하에 환영 다과와 함께 주최 측 스태프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근처에 있는 프라이부르크 극장을 중심으로 공연이 열렸는데, 대극장과 소극장 2개가 있었다. 3시부터 극장 로비에서 탄츠플랏폼을 만든 세 사람의 토크가 있었다. 나는 독일어라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많은 관객이 그들의 얘기를 들으려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첫 작품인 리지아 루이스(Ligia Lewis)의 <음모/스캔들(A Plot/A Scandal)>이 소극장에서 열렸다. 작품의 내용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개념 안무가로 명명되는 리지아 루이스는 역사적, 정치적, 신화적 인물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춤이라기보다 연기에 가까운 장면들을 연출했다. 노예제도의 폭력적인 역사에 대한 분노를 온몸으로 전하고 있었다. 관객들 사이로 숨어들어 소곤거리다가 무대 상/하수로 걷거나 뛰어다니면서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혀를 드러내고 눈을 굴리거나 휜 다리를 흔드는 등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함이 번갈아 표현되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 음모가 드러나고, 사악한 행위가 어떻게 자행되고 스캔들이 일어나는지 등을 두서없이 토로하며 자기 증조모를 저항의 아이콘으로 끌어와 저항의 흔적이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방식을 듀엣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또 거품을 온몸에 바르거나 붉은 조명 속에서 괴상한 몸짓을 하는 등 긴장감을 조성했다. 공연은 전체적으로 텐션이 강했다. 공연이 끝나자 환호성이 터졌다. 관객 중 한 명과 대화를 했는데 작품의 내용이 흥미로워 재미 있었단다. 리지아 루이스의 몸짓 언어는 서툴렀지만, 연기는 좋았다.
프라이부르크 대극장에서의 개막식이 끝나고 모리츠 오스트루슈냑(Moritz Ostruschnjak)의 <터미널 비치(Terminal Beach)>가 공연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공연은 인상에 많이 남았다. 6명의 무용수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깃발을 흔들면서 춤을 추었다. 프로그램에는 "신기술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우리가 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인 터미널 해변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서핑을 하고 파도를 만들고 함께 깃발을 흔들며 알 수 없는 암흑의 세상에서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에 집착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황망함일 것이다.
인라인스케이트로 무대 상·하수를 질주하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속도감 있게, 가깝게 또는 멀게 펼쳐졌다. 하나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이어 간다기보다 콜라주 형식으로 다양한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나타났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군무의 움직임이 사라지고 깃발을 든 무용수 한 명이 무대 중심에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던 장면이었다. 황량함과 갈 곳 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느껴졌다.
이어 전반부에서 행했던 움직임이 마치 리와인드되듯이 되돌아가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마치 인간의 회귀본능을 담아낸 듯했다. 연극적으로 풀지 않고 오로지 춤으로 풀었던 이 작품은 뭔가 장황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추상적으로 드러나게 했다. 텍스트로 설명하거나 논리를 추구하지 않았음에도 감동이 있었던 무대였다.
2월 22일 오전에는 '삼각 경계를 넘는 춤-현대무용의 탈식민지화 과정'이라는 라운드테이블이 진행되었다. 카메룬 출신의 조라 스네이크(Zora Snake), 인도 출신의 수르짓 농메이파캄(Surjit Nongmeipakam) 및 캐나다 출신의 라라 크레이머(Lara Kramer)가 패널로 참석했다.
오슬로와 프라이부르크에서 느낀 건 현대무용의 탈식민주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정형화된 현대무용이 거의 사라질 정도로 춤이 다변화되고 있으며 오히려 각 나라의 전통춤을 현대화한 작품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면서 유럽인들의 열린 시각을 인지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은 이제 현대무용을 소외시키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유럽보다 더 굳건하게 현대춤을 활성화하고 있다. 이번 패널 역시 아프리카와 인도의 현대무용가가 아닌, 전통적인 춤을 새롭게 만든 안무가들의 작품이 영상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아프리카의 전통춤을 현대화한 조라 스테이크의 작품은 의식을 동반한 영적인 춤이었다. 야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독특한 아프리카 의상과 소품을 들고 신기한 음악에 맞춘 조라 스테이크의 집중된 움직임은 영혼을 불러오는 듯했다. 의자를 치우고 직접 실연도 했는데, 연기력이 대단했다.
22일 첫 작품을 보기 위해 프라이부르크 극장 앞에서 버스를 타고 프랑스와 독일 사이 프랑스령 라인섬에 위치한 아레나 극장으로 갔다. 극장의 건축 디자인이 특이했다. 터키 혈통의 독일 안무가 튀마이 킬린셀(Tümay Kılınçel)의 안무 <우리 라크 2명(we 2 raqs)>을 보았다.
벨리댄스와 비슷한 '라크'라는 춤을 무용수 다섯이 솔로, 듀엣, 또는 다 같이 추었는데 각 무용수의 스타일이 흥미로워 즐겁게 봤다. 특별히 안무는 없었고 무대 뒤쪽에 열 지어 있다가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서 자기 춤을 추고 들어가거나 두세 명이 한꺼번에 나오거나 다섯 명이 다 같이 추는 식이었다. 음악이 아주 독특했다. 양금처럼 생긴 악기와 아프리카 북 같은 악기가 만들어 내는 소리는 리드미컬하고 기분 좋게 들렸다. 프로그램에는 오리엔탈 댄스, 부족 퓨전, 미국 부족 스타일, 보깅, 발라디 및 현대 등 다양한 장르를 혼합했다고 했는데 누가 어떤 춤을 췄는지 알기는 어려웠다.
이어 카타리나 젠첸베르거(Katharina Senzenberger)의 <습지(Wetland)>는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품이다. 남자 1명에 여자 4명(동양인 1명 포함)이 출연했는데, 하얀 바닥에 윗옷을 벗고 팬티만 입은 무용수들이 앉아 있었다. 무용수들은 돌아가면서 대무를 했는데, 여성의 벗은 상체 움직임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독특한 동작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상체를 뒤로 젖힌다든지 양손을 위로 들고 허리를 튼 모습이 너무 매력 있었다. 두 여자 무용수의 에로틱한 이인무는 마치 남녀가 사랑하듯 밀착해서 춤을 췄다. 끈끈하게 밀착된 신체는 관객들을 집중하게 했다. 곧이어 천장에서 비가 쏟아지면서 후반부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심각하게 대화하듯 이인무가 이루어지다가 비가 오면서부터 무대는 놀이터로 변했다. 흰 무대에 떨어진 물은 미끄럼틀로 변했고 좌우로 미끄러지면서 다양한 형태를 즉흥적으로 만들었다. 무용수들은 아이들처럼 즐겁게 미끄러지고 빙그르르 돌면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즐겼다. 전반부는 조형적이며 정리된 움직임으로 내면을 주시했고, 후반부는 그 모든 규칙과 규격을 탈피한 자유를 상징하듯 함박웃음으로 관객을 즐겁게 만들었다.